213화 48. 왕의 마구간 (1)
군주와 귀족 중 말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지만, 레벤호스트만큼 말을 사랑하고 조예가 깊은 군주는 없을 것이다.
그의 마구간엔 알려진 모든 세계에서 사 온 아름답고 힘차며 영리한 준마들로 가득 차 있다.
트라이아의 재정 1할이 선제후의 마구간에 들어간다는 소문마저 들 정도였다.
카렐리아에 오면서 레벤호스트는 자신이 자랑하는 준마 여러 마리를 데리고 왔다.
그러나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말은 데리고 오지 않았다.
행여나 카렐리아의 공기나 물, 건초가 몸에 맞지 않으면 둘도 없는 그의 애마가 시들거나 병들 수도 있으니까.
그 말의 이름은 어째서인지 그가 가장 증오하는 황제와 같은 이름을 쓰고 있었다.
루돌프다.
카렐리아에 온 지도 벌써 3개월을 지나 반년을 바라보지만, 레벤호스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마구간을 잊은 적이 없다.
그 마구간에 대한 생각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고 이제는 선제후의 신경을 곤두서게 할 정도로 큰 문제가 되었다.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킨 건 트라이아 쪽에서 날아온 소식이었다.
부크가 만슈타인에게 패배했다.
그것도 보통 패배가 아니다.
군대의 중핵이라 할 수 있는 보병대 대부분이 포로로 잡힐 정도로 압도적인 패배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부크의 패배까지는 계산이 섰지만 레벤호스트가 보기에 부크가 패배하더라도 압도적인 패배가 아닌, 근소한 차이로 인한 패배고 쌍방 모두 손해가 클 거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쪽에서 패한다고 해도 적 또한 큰 피해를 입을 것이고 이쪽이 전장에서 물러난다고 해도 보다 빠른 충원 속도와 인근 지역의 지지로 결국에는 만슈타인을 압도할 것으로 보았다.
그것이 그나마 운이 따르지 않을 경우의 선택지였는데, 부크는 그냥 패배도 아니고 아예 군대 자체를 잃었다.
만슈타인의 군대는 건재했고 심지어 부크의 군대 상당수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는 트라이아와 동맹을 선언한 공작과 백작, 도시에게 엄포를 퍼부으며 막대한 세금을 갈취한다고 한다.
여간한 군주는 따를 수밖에 없다.
공성전이라는 건 공격자에게도 힘든 일이지만 수성자에겐 그 자체로 생사가 달린 싸움이니.
죽어서라도 항전할 각오가 있는 자만이 수성전을 감내할 수 있다.
그러나 트라이아의 동맹들에게 그렇게 할 정도로 지켜야 할 의리가 있냐고 묻는다면 대부분 아니라고 할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신교도 동맹의 대의에 따라 레벤호스트에 합류했지만, 신교 군주의 대부격인 디터팔츠 선제후가 참전하지 않은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애당초 무리수인 전쟁이었다.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데 비해 너무나 성급했고, 방식 또한 저열했다.
어떤 군주는 도둑맞은 왕관을 쓰고 왕 행세를 한다며 사석에서 레벤호스트를 맹비난할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트라이아 일원을 지켜야 할 군대는 패배했다.
카렐리아의 상황도 좋지 않긴 매한가지.
저 명성 높은 하벨이 만슈타인의 군대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우수한 군대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진격했다.
곧 레벤호스트의 운명도 부크를 따라갈 것이라고 다들 예상했다.
신교도 동맹의 전열은 균열이 났고, 붕괴를 피할 수 없는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벤호스트가 자신의 마구간을 떠올리는 건 무리도 아니다.
트라이아마저 무너진다면 그의 마구간은 저 이름도 몰랐던 만슈타인이라는 카렐리아 놈이 차지하게 될 테니까.
평판대로 만슈타인은 좋은 말을 모조리 자기 몫으로 빼돌리고 선심 쓰는 차원에서 레벤호스트가 가장 총애하는 준마-루돌프를 황제에게 전리품으로 바칠 것이다.
그것이 레벤호스트가 예상하는 멸망한 미래다.
그는 자신의 통찰력이 미래로 이어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암울한 미래를 바꿔야 한다.
방법은 있다.
하벨의 군대를 격파하면 된다.
그의 군대는 강성하나 카렐리아의 적이고, 게다가 군대 운용의 법칙도 무시하고 보급을 도외시한 채 슈코브로 직진하고 있다.
심지어 버리는 장기말로 썼던 쇠르너가 구교 요충지를 점령했다.
‘하벨은 승부수를 던졌다. 한 번의 전쟁으로 모든 걸 끝장내겠다는, 육십이 넘은 늙은이에겐 보기 힘든 과감한 결단이군. 그러나 그는 너무나 큰 걸 노리고 있어. 한 번의 전투에서 그의 예봉을 끊어 내고 지연전으로 끌고 갈 수 있다면 하벨이라는 대어를 낚을 수 있다.’
선제후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공성전이다.
슈코브를 방패 삼아 하벨을 구렁텅이로 몰아넣는 게 최상의 시나리오다.
그러나 주변 중신들은 공성전을 택할 경우 슈코브가 반드시 이반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실제로 카렐리아 의회가 전쟁을 위해 특별세를 걷자 곳곳에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자기들이 군자금 관리를 잘못한 것을 왜 우리에게 떠넘기냐는 너무나도 당연한 불평이다.
그러나 특별세를 거둘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었고, 의회는 징세를 강행했다.
세금을 거둔 건 의회지만, 결국 그 비난의 화살을 받는 건 레벤호스트였다.
결국 그의 군대는 슈코브의 성벽에 의지하지 못한 채 바깥에서 싸워야 했다.
그럼에도 승산은 있다.
이쪽은 고지를 장악했고 거기다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강의 깊이는 들쭉날쭉해 깊은 곳은 성인 남성 엉덩이까지 잠길 정도의 깊이지만 얕은 곳은 종아리 정도밖에 차지 않았다.
그러나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강을 살짝 얼려 놓았고, 물을 얼음처럼 차게 했기에 그대로 도강하는 건 지휘관으로서는 쉽지 않은 판단이다.
군대를 지휘해 본 사람이라면 차가운 물이 얼마나 병사의 진을 잘 빼고 병들게 하는지 잘 알 테니 말이다.
레벤호스트가 배치한 고지 우측면에 다리가 하나 있긴 한데 다리를 돌파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옛날 철혈대제라면 다수의 도펠죌트너를 돌격시켜 어떻게든 다리를 빼앗았겠지만, 현재 두 군대 안엔 이능을 사용하는 자는 거의 없다.
오로지 순수한 인간의 힘으로 이루어지는 전쟁이라는 이야기다.
아무튼 이러한 지형이 레벤호스트에게 희망을 실어 주는 유일한 근거다.
실제로 전장의 대부분은 지형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군대의 수준을 논하자면 만만치는 않다.
막강한 트라이아 보병대가 중군을 받치고 각지에서 모여든 보병 연대가 카렐리아 장정들을 신병으로 삼아 병력을 보강해 트라이아의 전열을 구성할 것이다.
트라이아 기병대는 숫자만 놓고 보면 하벨의 기병대보다는 작겠지만, 애당초 이 전투는 기병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전투가 아니다.
레벤호스트의 중앙군은 낮지만 가파른 구릉에 단단하게 진을 치고 있으니.
거기다 트라이아 쪽에서는 박살이 났지만 카렐리아의 전황은 레벤호스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쇠르너다.
‘쇠르너를 불러들여 하벨의 뒤를 위협한다면 아무리 하벨이라고 해도 위협을 느끼겠지. 슈코브의 성벽에 의지하지 않아도 그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이야기다.’
유리한 지점에 눌러앉아 적의 보급을 끊고 후방마저 위협한다.
그러다 적이 공격해 오면 지형의 유리함을 살려 적을 밀어낸다.
이것이 레벤호스트가 생각하는 카렐이아 전역의 필승 공식이다.
이미 전쟁은 그의 계산보다 더 좋은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쇠르너만 온다면!’
하벨의 군대가 태풍처럼 북상하고 있는 가운데 레벤호스트는 쇠르너를 향해 전령을 보냈다.
전령을 바람처럼 빠르게 카렐리아의 산천을 돌파해 쇠르너에게 선제후의 전갈을 가지고 왔다.
선제후가 보낸 새 서신엔 선제후가 직접 쇠르너 백작이라고 쓴 문구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벤호스트가 쇠르너에게 거는 기대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러나 쇠르너는 레벤호스트의 생각처럼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 세상에 처음 모습을 드러낼 때부터 그는 대담한 사기꾼이었고 지금까지 수많은 조롱과 비판, 심지어 협박마저 듣고 산 사람이다.
쇠르너는 소위 높으신 분들이 아량을 베푼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정도의 감정은 예전에 잃어버렸다.
그에게 중요한 건 자신이 밟고 나갈 발판뿐이다.
그가 이 전쟁에서 원하는 건 하나다.
전쟁에서 충분한 명성과 부를 쌓고 허울뿐인 가짜 백작이 아닌, 진짜 백작으로 유유자적하게 은퇴하는 것.
그의 군대는 자신의 꿈을 이뤄 주는 유일한 수단이며, 그의 신보다 그의 소원을 더 잘 들어주는 평생의 연인이다.
“선제후가 나더러 하벨의 꽁무니를 노리라고 하는군.”
쇠르너가 레벤호스트의 편지를 흔들며 부하들에게 보여 줬다.
“그러다 하벨에게 따라 잡혀 전투에 휘말린다면?”
쇠르너가 자신의 장교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전멸까진 아니겠지만 상당한 피해를 받겠지요.”
“대포와 물자를 모두 잃을 겁니다. 보병대 다수를 포함해서요.”
“운이 나쁘면 부크의 군대처럼 전멸할 수도 있겠지요.”
쇠르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들이 보는 대로다. 나는 이미 선제후에게 한 맹세를 완수했다. 그런데 하나를 더 요구한다고? 웃기는 인간이군. 자신의 영지가 부족하니 나를 희생해서 어떻게든 기적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그 기적이 일어나 봤자 내겐 한 뼘의 땅도 가져다주지 못하겠지.”
쇠르너는 선제후의 약속을 무시하기로 했다.
그러자 한 늙은 장교가 잠자코 있다 입을 열었다.
에스테반 토르폴리오라는 카스무어인으로 한 번 퇴역했다가 가족 때문에 포병대 장교로 쇠르너 밑에 들어온 사람이다.
이번에 도시 공략 중에 결정적인 한 방을 날린 것도 이 사내였다.
행운의 상징과도 같은 그 늙은 포병이 수심 어린 얼굴로 허공을 노려보며 담담히 입을 열었다.
“레벤호스트가 패배한다면 장군의 운명도 위태롭긴 매한가지일 겁니다.”
이에 쇠르너는 코웃음을 쳤다.
“그대는 뭔가 착각하는군. 나는 용병 장군이지, 대리 장군이 아니야. 지켜야 할 명예는 전장에서 역할을 다하는 명예뿐이지 특정 군주를 위해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레벤호스트는 이미 민심을 잃어 가고 전쟁에서도 패하고 있다. 그가 패한다면, 황제와 좋은 조건으로 협상을 하면 그만이야.”
그것은 일반적인 용병대장의 생각이다.
실제로 용병대장은 비슷한 패턴으로 행동을 한다.
하지만 늙은 포병 에스테반은 다르게 보았다.
“과연 그럴까요…….”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용병이라는 입장은 쇠르너나 자신이나 다를 바 없으니.
이튿날 에스테반은 전역을 신청했다.
군대가 도시를 장악했고 도시에서 주둔비를 뜯어내고 있는지라 엉덩이만 붙이고 있어도 목돈을 받을 수 있지만, 늙은 포병은 기어코 군대를 떠났다.
쇠르너는 별생각 없이 그를 내보냈다.
사실 그는 에스테반 밑에 한스라는 젊고 똑똑한 부관을 배치해서 에스테반의 모든 걸 보고 배우라고 지시한 상태고, 이제 그 어깨너머로 훔쳐본 솜씨도 상당한 수준에 이른 거 같으니.
돈만 많이 들어가는 늙은 외국인 장교는 안 그래도 필요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3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쇠르너는 에스테반의 송별식에 얼굴조차 비추지 않았다.
대신 그는 새롭게 발견한 술집 여자에게 푹 빠져 그녀와 사랑의 밀어를 나눌 뿐이었다.
“쇠르너 백작. 그대는 좋은 장군이지만 오로지 눈앞만을 보는군. 그 얕은수는 결국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을 뿐이겠지.”
떠나는 에스테반이 쇠르너의 군기가 휘날리는 도시를 돌아보며 쓸쓸히 말을 몰았다.
아직은 윤택함이 남은 농경지가 늙은 포병에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 윤택함이 과연 언제까지 갈까.
에스테반은 지금은 진창과 수렁이 된 저지대의 들판이 한때는 지평선 끝에서 끝까지 이어질 정도로 잘 개간된 농지였다는 걸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