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46. 카렐리아 전역 (2)
한 장의 탄원서가 루페르트에게 도착했다.
발신인은 다름 아닌 그의 옛 챔피언, 베르크 란이었다.
탄원서에서 베르크 란이 요구하는 건 하나였다.
도펠죌트너의 복권과 그 도펠죌트너를 이끌고 전쟁에 나가게 해 달라는 것.
탄원서의 내용은 직설적이고 또한 도전적이었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모르지 않을 터인데 당당하게 황제에게 서신까지 보내 복권을 요구하고 있다는 건, 사람에 따라 도전의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가장 강한 반감을 드러낸 건 베르너였다.
“도펠죌트너를 위해 일자리까지 만들어 줬건만 만족을 모르고 끝없이 요구하는군요. 마치 유모를 끊임없이 보채는 버릇없는 아이처럼 말입니다.”
오토 브라에도 반감을 가지긴 매한가지였다.
“자기도 안 될 거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서신을 보냈다면, 그것은 모르고 보낸 것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것은 그 자체로 폐하에 대한 시험으로 보입니다.”
한편 도펠죌트너에 대해 나름 우호적인 시각을 보였던 요하네스도 이번만큼은 도펠죌트너를 편들지 않았다.
“무시가 능사는 아닐 겁니다.”
그는 말을 아꼈지만, 무시가 아닌 다른 조치를 암시한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처벌을 해서라도 이번 일을 처리할 것을 에둘러 간언하고 있었다.
선택은 언제나 황제의 몫이다.
“……베르크 란. 그자 덕분에 대리결투에서 승리해서 황위를 보전할 수 있었지만, 그를 위해서 내가 해 준 게 아주 없지만은 않다. 이번 일은 섣불리 결정하기보다는 당사자를 불러 이야기를 듣고 해결하는 쪽이 타당할 것으로 보인다.”
루페르트는 결정을 뒤로 미뤘다.
베르크 란의 탄원서가 괘씸한 건 맞다.
탄원서를 읽었을 때 루페르트는 아주 잠깐 피가 거꾸로 솟는듯한 분노를 느꼈으니.
하지만 지금 시국에서 베르크 란을 상대하는 건 시간의 낭비다.
이제 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을 전쟁이 시작된다.
베르크 란이 도펠죌트너를 이끌고 전장에 나간다면 도움은 될 것이다.
필경 큰 활약을 할 것이다.
하지만 선제후와 군주들은 무엇을 연상하겠는가?
당연히 철혈대제 시절을 연상할 것이다.
도펠죌트너를 이끌고 제국 곳곳을 황폐화하고 반항적인 제후들을 무릎 꿇리던 선제의 모습을 되새길 수밖에 없다.
당시 도펠죌트너는 제국 내전에서 마법사를 동원할 수 없기에 그 차선책으로 끌고 다닌 대체품이었으니.
이미 유리한 전투에서 더 큰 유리함을 누리겠다고 정치적인 위험이 도사린 카드를 쓰는 건 철혈대제나 할 법한 생각이다.
‘나는 그 사람과 다르다. 그처럼 근시안적으로 일을 처리하진 않겠다.’
루페르트에게 다시 회귀의 권능이 돌아왔다.
전처럼 언제든 수가 틀리면 회귀하여 일을 원래대로 돌리면 그만이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변했다.
회귀는 어디까지나,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를 대비한 보험이다.
사람의 통찰력이라는 게 유한하기에 당장 모든 것이 끝날 것 같은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것이 진짜 끝이기는커녕 오히려 호재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이번 내전에서 루페르트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실패가 곧 파멸은 아니다.
시간의 힘은 개인이 예상할 수 있는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다.
이번 내전에서 루페르트는 오히려 제국을 살릴 길을 보았다.
‘레벤호스트를 조기에 진압할 수 있다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은 채 불안한 평화를 유지하는 것보다 수십 배는 나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도펠죌트너는 쉬운 승리를 주겠지만 제2, 제3의 레벤호스트를 탄생시킬 위험이 있다.
“비어 있는 날짜를 확인해라. 비어 있는 시간에 베르크 란을 만나겠다.”
루페르트는 좌우를 둘러보며 명쾌하게 명령했다.
신하 하나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빈 시간이 없다.
적어도 한 달간은 격무를 해야 한다.
쉬는 시간에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루페르트 본인이 원하는 바가 아니다.
쉴 수 있을 땐 쉬어야 한다.
베르크 란과의 이야기가 그리 쉬울 것 같지도 않고.
“그렇다면 그에게 회신을 해라. 가까운 시일 안에 부르겠다고.”
이 정도만으로 충분한 답이 될 것이다.
황제가 직접 다음을 기약하는 회신을 했다.
평범한 사람에겐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배려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예상할 수 없다.
“…….”
베르크 란은 황제의 회신을 보았다.
그 눈동자에선 어떠한 감사도 경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오로지 모든 걸 부정하고 불태우는 이글거리는 분노만이 자리 잡고 있을 뿐이었다.
* * *
하벨의 군대가 오랜 준비를 끝나고 드디어 고어문트를 떠나 전장으로 향했다.
보병 4만 명, 기병 1만 5천 기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군대의 핵심은 카스무어 왕국 아래서 훈련을 받고 전쟁을 경험한 고어문트 보병대다.
철혈대제가 벌인 대전쟁 이후 수십 년간 큰 전쟁을 경험한 바 없는 제국에서 보기 드물게 최근까지 전쟁을 경험한 막강한 부대다.
노련한 병사와 연대장이 버티는 그들은 골트문트의 검이자 방패다.
기병대도 무시할 수 없다.
좋은 기병의 조건엔 언제나 좋은 말이 포함된다.
다른 선제후령보다 부유한 골트문트는 양질의 말을 시장에 갖고 있었고, 그 말을 아낌없이 기병대에 풀었다.
하급 귀족 자제로 구성된 그의 기병대는 보병대만큼이나 골트문트가 자랑스러워하는 구교의 검이다.
기병대 사령관을 맡은 제국 장군 네링은 나이는 젊지만 무모할 정도의 용기와 저돌성, 초인적인 행운을 가진 군인이라 알려져 병사들의 인기도 대단히 높았다.
카스무어 왕국에서 오랫동안 복무한 하벨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았지만 대포, 특히 중포 운용의 달인이다.
그는 13문의 중포를 주문했고 두 마리 짐말이 끄는 전용 포가-수레에 싣고 운반했다.
그 13문의 중포는 중요한 회전에서 하벨의 뜻에 따라 적을 분쇄할 하벨의 망치가 될 것이다.
그외 하벨은 30문에 달하는 잡다한 구경의 대포를 대동했는데 포병 장교 중엔 그 유명한 불과 철의 형제단 단원도 포함됐다는 소문이 파다하다.
하벨의 군대가 슈발츠마인을 지날 즈음 하벨이 온다는 소문이 카렐리아 전역에 퍼졌다.
“하벨이 온다.”
“하벨이 카렐리아를 벌하러 온다!”
“구교 광신도인 그가 카렐리아에 무슨 짓을 할 것인가? 나는 그저 두렵기만 하다!”
아무리 카렐리아에 새로운 왕이 들어서고 의회가 그 신왕을 지지한다고 해도 원래 카렐리아는 황제의 영지다.
카렐리아엔 당연한 일이지만, 구교가 우세인 도시도 얼마든지 있다.
슈발츠마인 접경에 자리 잡은 부유한 교역 도시 라토비츠도 그중 하나다.
이미 시민의 절반이 제국인이며 사용하는 언어도 제국어가 대부분인 그곳은 의회에서 반역을 선언할 때만 해도 침묵했지만, 하벨이 다가오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본색을 드러냈다.
도시 단위로 카렐리아 의회를 규탄하며 황제 편에 붙은 것이다.
이러한 배신은 예상된 것이다.
애당초 레벤호스트가 왕위에 오른 것부터가 불법적인 요소로 가득 차 있는데, 그들을 정의로 규탄할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전쟁에서 모든 걸 결정하는 건 무력이다.
레벤호스트의 객장 중 하나인 쇠르너가 라토비츠를 포위했다.
끝없는 전쟁이 벌어지는 저지대 연방과 달리 카렐리아는 지난 수십 년간 평화를 구가했다.
성벽도 구식이고 주둔군의 수준도 저열하다.
하지만 승산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닌 것이 쇠르너의 군대 또한 수준이 비슷하다.
병사 대부분은 어제까지 밭을 갈던 농부나 아녀자를 희롱하던 깡패고, 대포도 오래전에 다른 군이 쓰다 버린 중고에다, 제대로 된 포병 지휘관도 없다.
쇠르너라는 용병대장의 수준도 의심되기는 매한가지다.
그래도 한 가지 재주는 있다고 다른 장군에게 인정받았다.
싼 가격에 군대를 모집하고 유지하는 재주.
한 가지 웃긴 점은 쇠르너의 출신이다.
그의 풀네임은 카를 하이메르 랑그스돌프 폰 쇠르너.
쇠르너 백작의 아들이다.
그런데 같은 이름을 가진 백작의 아들은 22년 전에 남쪽 바다에서 실종됐다.
죽은 제국의 바다라고도 불리는 그 푸른 바다는 아름다운 색채와 달리 잦은 돌풍과 암초, 사방에 도사린 죽음의 땅으로 악명 높은 바다다.
거기서 난파를 당하면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
쇠르너 백작의 아들 하이메르도 거기서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10년 전 갑자기 죽은 아들이 살아서 돌아왔다.
자신을 하이메르 쇠르너라고 주장하는 자가 죽어 가는 쇠르너 백작 앞에 나타난 것이다.
쇠르너 백작의 다른 형제들은 당장 형과 동생을 사칭하는 이 사기꾼 놈을 몽둥이로 때려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갑자기 나타난 하이메르는 10년 전의 하이메르와 전혀 닮지 않았으니까.
옅은 금발에 초록 눈동자, 여간한 여성보다 긴 속눈썹에 다정다감한 용모를 가진 과거의 하이메르와 달리 새롭게 나타난 하이메르는 다부진 턱과 형형한 눈썹, 부리부리한 눈에 햇볕에 탄 구릿빛 피부를 가진 거친 남성이었으니.
심지어 룸어의 기본조차 알지 못했다.
하이메르의 형제들은 당연히 그들의 부친이 이 어처구니없는 사기꾼을 몰래 때려죽이거나 재판에 기소해 법의 심판을 받게 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아버지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죽은 아들을 너무나 그리워한 나머지 쇠르너 백작은 제정신을 잃었고, 정상적인 사리 분별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오! 나의 아들이여! 드디어 돌아왔구나!”
죽어 가는 노인이 엉터리 아들을 껴안았다.
희대의 사기꾼의 대담한 모험이 승리로 굳어지는 순간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새로운 하이메르는 부친의 땅뙈기 하나 받지 못했다.
그가 받은 건 약간의 금괴와 금화.
부친이 남긴 얼마 안 되는 동산이 전부였다.
결국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이야기다.
이미 큰 사기를 친 바 있는 이 사기꾼은 뻔뻔하게 자신이 쇠르너 백작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하고 다녔다.
몇 번의 행운과 불운 속에서 사기꾼은 쇠르너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였고, 10년의 고생 끝에 그나마 자신의 이름을 가진 연대를 만들 수 있었다.
실제로 그는 군인으로서 부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기민한 판단으로 여러 번의 작지만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이제 그는 쇠르너 백작이라는 이름으로 레벤호스트의 신교도 반란군에 합류했다.
누가 봐도 그는 레벤호스트의 대포 밥이다.
쓰고 버리는 카드라는 이야기다.
쇠르너 백작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뼛속부터 용병인 그가 고용주의 의도를 몰랐다면 진즉에 전장에서 주검이 되어 썩어 없어졌을 테니까.
그런데 그에게도 하나의 계산이 있다.
“구교도 도시 하나를 빠르게 장악하여 그 성벽에 의지할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에게 운이 트일지도 모르지.”
그러나 공성이란 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저 명성 높은 하드리아멘디쿠스조차 십만 명에 달하는 인력과 셀 수 없는 자금을 투입하여 간신히 도시 하나를 함락했다.
아무리 구식 성벽에 훈련되지 않은 민병대가 지키는 성벽이라고 해도 성벽은 성벽이다.
경험 많은 고참 장교조차 이번만큼은 행운이 그의 장군을 따르지 않을 것이라 보았다.
그런데 운명이란 묘한 것이다.
쿵!
구식 대포가 불을 뿜었고 성벽을 강타했다.
포탄이 맞은 지점은 용의 형상을 새긴 장식이 있는 곳이었다.
전설에 의하면 용의 불길을 맞고도 버텼다는 일화가 있는 곳인데 거기에 그만 포탄이 적중했고, 용 장식을 박살 내 버린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지점이 오래된 성벽의 가장 약한 결합부라는 걸.
성벽에 금이 갔고 곧 성벽 일부분이 무너졌다.
성문이 열렸고 도시의 시장이 도시의 열쇠를 들고 나타났다.
“장군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열린 성벽 너머로 보이는 휑한 거리를 보면서 쇠르너는 다시 한번 운명을 느꼈다.
죽어가는 노인이 자신을 껴안을 때 느꼈던 그 행운의 바람이 다시 한번 자신에게 불어오고 있다는 걸.
일개 사기꾼에서 장군이 되었다.
이제 그는 장군이다.
행운의 바람이 그를 어디까지 실어 나를지는 오직 신만이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