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43. 도둑 (4)
“그래도 폐하가 우리를 잊지 않았던 모양이네요. 이런 어려운 시기에 우리를 다 불러 주시고. 겨우 좀도둑 하나 잡는 거긴 하지만, 수도 전체에 악명이 자자한 도둑인걸요.”
언제나처럼 쓴소리를 늘어놓고 있지만 마를로네의 기분은 꽤 좋아 보였다.
인쇄소 같은 끔찍하고 지저분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살다간 몸도 마음도 책을 찍어 내는 인쇄소의 롤러같이 잉크로 검게 찌들어 버릴 것 같으니까.
그 모습을 보며 베르크 란은 과거의 자신을 생각했다.
쟁기를 버리고 검을 쥔 자의 생각은 민족과 국적, 성별마저도 불문하다.
더럽고 힘들고 지루한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
병사 대부분은 어떤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산 활동을 하는 자였다.
농부, 허드레꾼, 견습공, 부두 노동자, 도시 빈민 등등.
부모 때부터 대물림된 이른바 “개 같은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병사가 된 거다.
위험이란 건 문제 되지 않는다.
죽을 수도 있는 위험이라고 해 봐야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끔찍함에 비하면 덜 고통스러운 것이니.
베르크 란도 그랬다.
부르봉 시골에서 폭력적인 지주와 귀족, 그 아래서 위세를 떠는 향사 같은 인간들에게 시달림을 당하다 결국 참지 못하고 전장에 나섰다.
어떤 군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매일의 폭력이 반복되는 끔찍한 고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줄 수 있다면 그게 저지대의 병사건, 카스무어의 병사건, 부르봉의 병사건, 제국의 병사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실제로 그가 모병 담당관에게 계약서를 받고 대장간과 총포상에서 갑주와 무기를 받았을 때 베르크 란은 어제까지의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며 오늘부터 진정한 의미를 가진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했다.
전장은 위험하고 공포스러운 곳이었다.
옆에서 사람이 죽거나 혹은 내가 사람을 죽여야 했다.
살려달라고 애원하라는 자를 어쩔 수 없이 죽이거나 죽게 내버려 둔 적도 있었다.
한 번은 창에 찔려 상상도 못 한 고통을 맛보며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파상풍에 걸려 죽을 뻔한 적도 있다.
경험 많은 병사가 마치 활처럼 등이 휜 채 발작하는 베르크 란의 기도를 확보해 발작하는 근육이 숨구멍을 막는 걸 막아서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당시 맛본 고통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나이를 먹은 지금 시점에도 생생히 기억이 날 정도로 또렷하다.
그럼에도 그는 시골보다는 전장에 있길 원했다.
세월은 변했다.
베르크 란은 나이를 먹었고 그가 원하는 걸 최적의 형태는 아니지만, 그럭저럭 만족할 만한 형태로 얻었다.
인쇄소에선 옛 동료들이 새로운 일을 배우며 일하고 있다.
빨간 명찰을 달고 있지만, 그 옆에 다는 황궁 인쇄소 직공이라는 또 다른 배지를 달면 테타우 안에서도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구걸하는 일 없이. 정든 곳 떠나 방랑하는 일 없이. 검을 쥐고 귀족이나 깡패의 더러운 청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베르크 란은 현재의 삶에 어느 정도 만족하고 있다.
어차피 여생도 남지 않았고 이대로 그의 전우들이 평온 속에서 사라질 수 있다면 나름대로 좋은 결말이라고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자문을 구해 보았다.
물론 완벽하게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젊은 시절의 베르크 란을 아는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말하겠지만, 그는 마냥 모두를 위해 싸우는 계층의 투사 같은 인간은 아니었다.
그는 잔인했고 용서가 없었으며 그에 못지않은 탐욕과 향상심이 있었다.
그가 가장 강력한 도펠죌트너인 건 맞겠지만, 그가 그 우두머리가 될 수 있었던 건 비단 검의 실력만은 아니었으리라.
흘러간 세월과 노화와 바뀌어 버린 신세가 늙은 병사들이 과거의 베르크 란을 언급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다.
비슷한 들뜸을 손녀인 마를로네가 보여 주고 있다.
아마 인쇄소가 지긋지긋하게 싫었을 것이다.
차라리 슈발츠마인의 숲이 나을 거라고 마를로네는 몇 번이고 투정을 부렸으니까.
확실히 이제 여성 티가 물씬 나는 손녀가 남자조차 질겁을 하는 구질구질한 곳에서 동년배도 아니고 늙거나 늙어 가는 병사들과 함께 존경받지 못할 일을 하는 건 상당히 괴로운 일일 것이다.
차라리 빨간 명찰을 달고 돌아다녔던 때가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비록 모두에게 천대를 받지만, 동시에 두려움을 심어 주기도 했으니.
마를로네는 자신을 쳐다보던 사람들의 눈동자에 경멸만큼이나 진한 공포를 보면서 자라 왔다.
그 인쇄소에선 흔한 공포의 한 조각조차 얻을 수 없다.
그런 지루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황제가 직접 일감을 주었으니.
자기 일처럼 기뻐할 수밖에.
베르크 란은 들뜬 손녀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내 손녀, 마리도 시집을 보내야 될 때가 왔군. 예전이라면 괜찮은 조건으로 시집보낼 수 있었는데.’
그에겐 아들이 있다.
다른 자식도 있었지만 다 어린 나이에 죽었고 홀로 장성했다.
험한 일을 하며 자라 온 사람들이 늘 그러하듯 베르크 란은 아들에게 도펠죌트너는 물론이고 병사조차 대물림하려 들지 않았다.
남들처럼 책을 읽고 공부에 가서 학식을 쌓고 몸이 아닌 머리로,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일을 하며 살아가길 원했다.
좋은 혼처도 구했다.
그중엔 고위 귀족의 여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이 택한 건 부르봉 출신 소귀족의 딸이었다.
귀족이라고 하지만 농가와 다를 바 없는 곳에서 쥐꼬리만 한 금리로 살아가는 금리생활자였다.
호화로운 식사 한 번, 옷 한 벌 사는 데 가족 전체가 벌벌 떨 정도로.
그러나 소귀족의 딸과 처음 대면한 순간, 베르크 란은 자신의 아들이 왜 그런 여자를 선택한지 알 것 같았다.
퍽 아름다운 여자였다.
살면서 예쁜 여자는 몇 번이나 봤지만, 그토록 우아하고 기품이 있으면서도 소녀다운 풋풋함이 있고, 도전적인 눈빛 같은 여러 색채의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여자는 그 여자가 처음이었다.
결혼을 반대했어야 했다.
어차피 도펠죌트너에게 닥칠 운명이 매한가지라고 했었더라도 그 결혼만은 막았어야 했다.
특히 그 탐욕스러운, 부르봉 장모의 얼굴을 본 순간 힘을 써서라도 아들의 마음을 고쳤어야 했다.
그러지 못했던 게 베르크 란 인생에서 가장 큰 후회 중 하나다.
그의 아들 크리스티안은 가문이 몰락하고 빨간 명찰을 다는 와중에 아내와 장모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어린 아들과 딸을 버리고 집을 나가서 소식이 끊겼다.
어린 아들이 죽었을 때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어쩌면 그도 파란 속에서 죽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는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베르크 란의 생각이다.
빨간 명찰을 달며 제국을 전전하던 중에 크리스티안이 도펠죌트너가 됐다는 정체불명의 소식을 들었고, 그리고 황제 앞에서 결투를 벌였던 그 은 가면.
분노로 이글거리는 자신의 눈동자와 전혀 다른, 모든 걸 얼려 버릴 듯한 한기를 품은 차갑게 가라앉은 초록색 눈동자는 베르크 란이 누구보다 잘 아는 어떤 눈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크리스티안.’
아들이 은 가면일 수도 있다.
황제를 죽이려 들고 황제를 실각시키려 한 인간이 아들이라면, 베르크 란은 기꺼이 그 아들을 죽여 없앨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에게 도펠죌트너의 힘을 주었던 정체불명의 사내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좋은 몸이군. 좋은 몸이야. 이토록 물감이 잘 스며드는 육체라니.”
무모한 젊은이들에게 경이적인 힘과 비참한 죽음, 양자택일의 선물을 안겨다 주던 그 “신부”라는 두건을 쓴 괴인은 베르크 란에게 도펠죌트너의 힘을 주는 붉은 액체를 먹이면서 신이 나 떠들었다.
“자네. 자식을 많이 만들 생각 없나? 그대의 선조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좋은 자질을 물려주었군. 같은 캔버스라고 해도 물감을 잘 먹는 캔버스가 있고 그렇지 않은 캔버스가 있는 것처럼, 도펠죌트너도 죽은 신의 힘을 잘 받아들이는 육체가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이 있지. 그대 정도면 가장 순수한 피를 줘도 괜찮을 거 같아…….”
그 이상의 기억은 없다.
하지만 크리스티안이 도펠죌트너의 길을 걸었다면 당연히 자신만큼 강해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 “신부”는 도펠죌트너 지원자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입을 열지 않는 과묵한 인물이니까.
과묵은 말에 진실의 옷을 입히는 법이다.
“할아버지?”
베르크 란의 무거운 회상은 손녀의 목소리를 듣고 깨졌다.
“마리.”
“갑자기 왜 딴생각을 하고 있어? 오늘 우리가 무슨 일을 하는지 까먹은 거야? 설마 치매는 아니겠지?”
“그딴 질병에 걸릴 정도로 나약하게 살아오지 않았다.”
베르크 란은 검을 들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은 황궁의 지붕 위다.
이미 마법사들이 그들만이 감지할 수 있는 결계라는 것을 펼쳤고, 그 이외에 각지에서 온 사냥꾼과 추적자, 야수 조련인 따위가 찾아왔다.
눈에 띄는 건 야수 조련인이다.
노르드마르크의 산속 깊은 곳에서 왔다는 야수 조련인은 날개를 펼치면 성인보다 더 큰 익장을 자랑하는 거대한 수리를 양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수리가 얼마나 큰지 어깨 하나에 타지 못해 두 어깨 전체를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빙해 수리라고도 불리는 그 거대한 수리는 인간만큼이나 머리가 똑똑해 야수 조련인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의사를 교환해 야수 조련인의 의지를 실천한다고 전한다.
쓸데없이 호기심 많은 마를로네가 다가가자 부리로 쪼려고 해서 다가가지 못했다.
“미안한데 나의 새는 도펠죌트너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야수 조련인이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아직 마를로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진귀한 경험을 좋은 방식으로 승화해야 두고두고 나중에 할머니가 되어도 손자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하지만 누구를 신랑으로 삼아 손주를 만들까 하는 생각에 이르면 눈앞이 검어지는 게 마를로네의 또 다른 고민이기도 하다.
“하아. 할아버지.”
“뭐냐. 마리. 너답지 않게 한숨까지 내쉬고.”
“나 시집을 가야 할 거 같은데.”
“안 그래도 나도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
“좋은 혼처를 구해 보겠다. 안 되면 황제 폐하에게도 부탁하는 수밖에.”
“황제 폐하…….”
“왜 그러냐? 마리.”
“아니, 그냥. 갑자기 그 슈발츠마인 도령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 와서.”
“안젤리나보다 우리를 신경 써 주시는 분이다. 굳이 나쁘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그건 그렇지만.”
이야기하는 도중에 거대한 수리가 갑자기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덩치가 큰 놈답게 단 한 번의 날갯짓으로 황궁 위로 솟구치더니 하늘 위를 유유히 배회했다.
야수 조련인이 수리를 풀었다는 건 때가 됐다는 이야기.
적어도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침입자는 황궁에 얼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아.”
마를로네가 눈을 반짝이더니 베르크 란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하고 찔렀다.
“뭐냐?”
“요하네스 님!”
“요하네스 님? 그 황제의 총신이라는.”
“그 사람, 젊고 괜찮지 않아? 똑똑하기도 하고. 게다가 아직 독신이던데.”
“꿈도 꾸지 마라.”
“왜? 그 사람 작위도 제국 기사 정도일 건데.”
“황제 곁에 있다는 건 작위 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황제의 신임을 받는 한, 작위 같은 건 알아서 높아지니까.”
“그, 그런 거야?”
“갑자기 그 사람은 왜? 이야기나 나눠 본 적 있나?”
“아니. 없어.”
별 긴장감 없이 실없는 대화를 이어 나가던 조손의 눈동자에 일제히 매서운 빛이 떠올랐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서로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