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43. 도둑 (3)
루페르트의 승리가 누적될수록 레벤호스트의 입지는 불안해졌다.
원인을 따지고 보면 모든 책임은 레벤호스트 본인에게 있었다.
루페르트가 순결 서약을 했을 때 모든 대립을 끝냈어야 했다.
슈발츠마인이 독주를 끝내겠다는 의사표시를 한 것만으로 선제후들은 조용하고 온건하게 다음 선거를 기다리면 되니까.
다음 전장은 제국도 외국도 아닌 제국 의회가 돼야 했었다.
선거에서 누굴 나오게 하고 누구를 제외하는 것만으로 선제후들에겐 철혈대제 시절의 굴레를 가볍게 벗어던지고 남을 결과를 얻을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레벤호스트는 그러지 않았다.
그조차도 루페르트의 음모라고 생각하며 끝까지 그 촌놈을 이기려 들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일전에 하켄하임에 찾을 때 어떻게든 기를 꺾어 놔야 했다.
그 건방진 촌놈이 이렇게까지 거물이 되어 자신의 영혼을 갉아먹으리라고는 예전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레벤호스트의 모든 수는 차단됐다.
루돌프의 활약으로 옛 금광을 확보해 상당한 재원을 마련했지만, 그동안에 루페르트는 노르드마르크를 자신의 편, 최소한 중립지역으로 확보했다.
힘 대 힘으로 상대가 안 되는 슈발츠마인을 꺾으려면 사방에서 뒤흔들어야 승산이 있는데, 그 변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디터팔츠가 중립을 고수한다면 내전은 바야흐로 슈발츠마인과 트라이아. 명백한 국력의 차이가 있는 선제후들의 싸움이 될 것이다.
제국 후방에서 비스투라가 기병대를 끌고 유격전을 펼친다 하더라도 그런 마적 떼는 마을이나 불태울 수 있지, 전황을 바꿀 힘은 없다.
심지어 그 외국인은 대학의 마법사가 상대해도 무방한, 제국의 외적이다.
마법사의 호통 한 번에 만족의 기병대는 소리 없이 스러질 것이다.
이제 레벤호스트에게 남은 수는 얼마 되지 않는다.
장인인 앙쥬 왕에게 참전을 부탁하는 게 유일한 수다.
하지만 그의 장인은 앙쥬 왕국은 대대로 대륙의 일엔 간섭하지 않는다고 엄격하게 못 박았기 때문에 그가 전장에서 나설 일은 만에 하나 없다.
약간의 자금이나 병력 지원은 해 주겠지만 그것만으로 이 불리한 전황을 이길 수 없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점점 마음의 병이 깊어 가던 중이었다.
레벤호스트는 오는 손님조차 거부하고 잠옷 차림으로 요양을 하는 중이었는데 시종 하나가 어떤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누구와도 말하지 않겠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레벤호스트가 호통쳤다.
시종은 주눅 든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게, 루돌프라는 분께서…….”
“뭣이?!”
레벤호스트가 병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마 주변 시종들이 만류하지 않았다면 그는 잠옷 바람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촌극을 벌일 뻔했다.
사실 영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아서 그렇지 레벤호스트가 우스갯거리가 될 만한 촌극을 벌인 일은 몇 번이고 있다.
그에겐 수영이라는 군주 세계에서는 축구에 못지않은 독특한 취미가 있었는데, 실제로 그의 수영 실력은 상당한 수준이다.
트라이아 지방은 호수가 많아 오래전부터 호수를 통한 어로 활동과 생산 활동이 활발했고, 자고로 자맥질에 능해야 진정한 트라이아 사람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수영에 대한 전통과 자부심이 깊은 지방이다.
레벤호스트가 어릴 때 살던 트라이아 선제후 별궁 앞에 투명한 호수가 있었다.
트라이아 사람답게 그는 유년기에 수영을 배웠고 취미로 삼았다.
그가 선제후가 됐을 때 그는 수많은 영민 앞에서 벌거벗고 호수에서 수영을 했는데, 본인이 의도했던 건 선제후가 트라이아 사람으로 손색이 없는 수영 솜씨를 갖고 있다는 걸 뽐내기 위함이었지만 그 의도와 달리 사람들은 젊은 선제후가 흉하게 알몸을 내놓는 모습을 구경하러 갔다.
철모르는 어린아이 하나가 선제후의 ‘거기’가 작다고 노래 부르다 치안경찰대에 끌려간 건 트라이아에서만 떠도는 이야기.
아무튼 또 한 번의 좋지 않은 이야깃거리를 남길 뻔했다.
선제후답게 화려한 의복을 걸친 당당한 자태로 레벤호스트는 루돌프는 맞이했다.
‘이 사람은 그야말로 지혜의 화신이군.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품은 눈이다.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훌륭하게 늙을 수가 있지. 정말이지, 내가 나이를 더 먹고 노인이 된다면 마르틴 보엠 같은 성마른 늙은이보다는 루돌프처럼 입을 열 때마다 지혜를 뚝뚝 흘리는 그런 노인이 되어야지.’
나름의 결심을 하며 레벤호스트는 루돌프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안락의자에 편하게 앉은 루돌프는 한동안 차를 음미하다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릿한 시선을 들어 허공을 노려보았다.
“알다시피 현재 선제후님의 상황은 악화됐습니다.”
레벤호스트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설마하니 저 노르드마르크의 재앙이라 불리던 역병 치료제를 발명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이제 루돌프는 레벤호스트의 스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의 깊이를 알 수 없는 지혜는 레벤호스트가 믿는 마지막 동아줄이다.
‘과연 이번에 루돌프는 대체 날 위해 어떤 묘안을 들고 왔을까.’
그 루돌프의 입이 열리길 하염없이 기다린 끝에 결국 루돌프의 입이 열렸다.
“카렐리아에 선제후님의 길이 있습니다.”
“카렐리아?”
레벤호스트의 얼굴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그건 전에도 말씀드린 이야기입니다만…….”
일전에 루돌프는 카렐리아를 도모하라는 의견을 넌지시 제시하기도 했다.
무려 카렐리아의 왕이 되라는 무시무시한 제안이었다.
실제로 루돌프의 제안을 듣고 카렐리아의 귀족들에게 은밀한 사절을 보내 뜻을 떠보기도 했다.
카렐리아가 황제에 대해 불만이 많은 건 맞다.
하지만 그 불만은 감히 황제에 거역하고 반역까지 선언할 정도로 크진 않다.
적어도 레벤호스트를 위해서 반역을 일으키진 않겠다고 그들의 대표자들이 답했다.
실망스러운 답변을 듣고 레벤호스트는 카렐리아의 불만이 과장된 게 아닐까 자문해 보았다.
슈발츠마인에서 카렐리아의 불만을 저평가하는 이유 중 하나가 카렐리아는 여전히 제국에서 두 번째로 부유한 지역이니까.
배가 부르니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는 거라는 말이 나오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카렐리아를 뒤흔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이 난 현재 카렐리아라는 울림은 설령 그것이 루돌프의 입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레벤호스트의 심금을 울리지 못한다.
“카렐리아 말입니까? 거기는 글쎄요.”
“카렐리아의 왕이 되시는 건을 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사람을 보내 봤는데 그들이 말하더군요. 현재 카렐리아의 왕은 루페르트 가우저이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현재의 불만에도 불구하고 왕을 바꾸는 일은 없을 거라고.”
“특별한 사정이 곧 생길 겁니다.”
루돌프의 말에 레벤호스트는 즉각 시무룩한 표정을 풀고 간절한 시선을 루돌프에게 던졌다.
“그 특별한 사정이란……?”
“하나는 대주교가 일으킬 겁니다. 카렐리아의 수도엔 성 스코다의 교회가 있지요.”
“성 스코다의 교회요?”
“크로지우스 본인이 직접 방문했고, 목회를 하며 카렐리아에 신교 신앙의 불씨를 지핀 신교 교도에겐 뜻깊은 장소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러고 보니 들은 적이 있기도 합니다.”
“클라인하르트 대주교가 그 성 스코다의 교회를 구교 성당으로 바꿀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카렐리아 주교구의 부흥을 알리는 효시로 상징적인 신교 교회를 손에 쥐려는 포석이지요.”
“그건 반발이 심하겠군요.”
레벤호스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감의 표현이겠지요. 카렐리아는 명실상부한 황제의 땅. 그 땅에 속한 신민은 그 군주의 신앙을 따라야 하는 것이 옛 종교회의에서 정한 법도인데 카렐리아는 제국 안의 외국이라는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아 지금까지 지나칠 정도의 자유를 허락받았습니다. 죽음을 앞둔 클라인하르트는 하나라도 더 많은 업적을 쌓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데 루페르트 가우저가 황권을 공고하게 다진 지금이 적기라고 보고 무리하게 일을 밀어붙이려는 거죠.”
“호오…….”
확실한 호재다.
늘 불만이 들끓는 카렐리아에 기름을 붓는 격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카렐리아 전체를 태울 순 없다.
단지 화르륵 하고, 불길이 잠깐 솟는 것 가지고는 기회는 오지 않는다.
하나의 계기가 더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루돌프는 하나의 복안을 더 들고 왔다.
“다른 하나는 카렐리아와 왕관입니다.”
“카렐리아의 왕관?”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겨우 왕관 이야기인가?’
왕관의 상징성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왕관이 주는 상징성이라는 건 왕관이 아닌, 왕관을 쓴 자가 부여한다.
왕이 썼기에 왕관인 거지 왕관을 썼다고 왕이 되는 건 아니라는 이야기다.
진정한 왕은 아무것도 쓰지 않아도 그 자체로 왕이다.
겨우 왕관 따위라는 생각이 레벤호스트의 머릿속에서 나온 까닭이다.
“왕관 하나 있다고 해서 카렐리아인의 용기가 커질 것 같지 않습니다.”
“……현재 카렐리아의 왕관이 보관된 도르니에의 금고엔 하나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지요.”
“아, 도르니에의 금고. 어떤 이야기인지 알 것 같군요.”
도르니에가 만든 금고의 전설.
그것은 그 금고가 강탈당할 때 제국은 멸망할 것이라는 자기실현적 예언이다.
도르니에의 금고는 제국이 멸망 당하지 않는 한, 강탈당할 일이 없기 때문에.
하지만 그 금고가 털린다면 조금은 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저 비운의 마법사의 천재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 위대한 마법사는 누구보다 강한 마법의 힘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정작 늙어서는 마법을 부정했다.
“악마의 힘이다. 이 마법이라는 건. 왜 제국만이 이토록 높은 수준의 마법을 가졌는지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레벤호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금고가 털린다고? 저 루돌프라는 자가 아무런 생각 없이 한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는 영원히 잃어버린 금광을 우리 가문에 돌려준 귀인이기도 하니.’
선제후의 시선은 루돌프에게 향했다.
“최근 테타우에 도둑 하나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지요?”
“아, 슈레케 뮤지크라는 자인가. 제 조카의 별장이 그 녀석에게 털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도둑이 카렐리아의 왕관을 노릴 겁니다.”
“그래요?”
“그는 왕관을 빼낼 겁니다.”
“…….”
레벤호스트는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의 황당무계함만이 아니다.
저 루돌프, 저 미지의 사내는 가정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는 이미 이루어진 사실을 말하는 사람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그 왕관으로 무엇을 할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 왕관이 제게 오는 겁니까?”
레벤호스트가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왜냐하면 도르니에의 금고다.
레벤호스트도 가 봐서 안다.
그 맹인이 앉은 암실에서 무언가를 빼내 간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니.
차라리 테타우를 함락시키고 금고를 터는 게 더 빠를 것이다.
“한 달 안에 왕관은 선제후님 손에 들어가게 될 겁니다.”
그 말을 남긴 직후 루돌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제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저 미지의 남자를 믿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그 왕관이 손에 주어진다면 레벤호스트는 많은 걸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