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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91화 (191/225)

191화 43. 도둑 (2)

제국의 황제는 두 개의 관을 쓴다.

첫 번째 관은 녹슨 월계관이다.

악의 제국이었던 룸 제국을 정복하고 전리품으로 얻은 영원한 승리자로서 황제를 상징한다.

다른 하나는 카렐리아 왕관이다.

룸 제국의 잔당이 만들었던 교황이라는 더러운 술책을 두 번째 황제인 경건한 지기스문트가 철권과도 같은 무력으로 파괴하면서 당시 가짜 교황이 점거했던 카렐리아를 해방하여 얻은 종교 통합자로서의 황제를 상징하는 신물이다.

두 황제의 관은 황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금고에 보관되어 있다.

그 금고는 대학의 역대 마법사 중에 가장 편집증적인 광증을 갖고 있었다는 오각의 마법사 도르니에가 만들었는데, 어떤 충격에도 훼손되지 않고 어떤 도구로도 열 수 없다고 전한다.

열 수 있는 건 오직 금고지기를 맡은 맹인뿐이다.

빛을 잃었기에 다른 사람보다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했으며, 그러한 감각만으로 열 수 있는 잠금장치로 금고는 보호되고 있으니까.

그 도르니에가 죽으면서 남긴 유언이 있다.

나의 금고가 털릴 때 그때가 제국이 멸망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섬뜩한 예언이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좋은 의미로 해석했다.

도르니에가 만든 황제의 금고는 제국의 수도가 함락당하는 등의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 한, 외부의 도둑 따위는 결코 털 수 없는 물건이니까.

그 말은 달리 말하면 제국의 멸망이 영영 오지 않는다는 말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테타우에 정체불명의 괴도가 황제의 왕관을 훔쳐 가겠다는 예고장을 범행 현장에 남겼다.

황제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애당초 황궁 자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다.

황궁 근위대가 주야로 돌고 대학의 마법사가 곳곳에서 경계를 펼치고 있으며 황제도 알지 못하는 제국의 첩자들이 시녀나 드나드는 고용인, 악사를 연기하며 가장 구석진 곳까지 수시로 탐색한다.

그 황궁엔 일류의 첩자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하물며 그 황궁에서도 가장 은밀한 곳에 보관된 도르니에의 금고는 거기까지 가는 것도 천운이 따라야 한다.

하늘이 도와 금고실에 침입한다고 하더라도 도둑에게 펼쳐진 건 태초의 어둠뿐이리라.

도르니에의 금고실은 그 자체로 거대한 암실이다.

하층민들이 하는 놀이인 축구장만 한 넓이 전체가 시커먼 암흑으로 물들어 있다.

그 안에서 허락되지 않은 빛을 발하는 순간 그 사실은 즉각 입구를 지키는 마법사에게 알려진다.

그 금고실 안을 자유로이 오갈 수 있는 건 금고지기인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맹인뿐.

선제 클라우데 2세 시절부터 고용됐다고 한 그 맹인은 유일하게 도르니에의 금고를 열 수 있는 자로 어떤 협박과 고통에도 금고를 열지 않을 정도로 충성스러운 자다.

암실을 지나쳐 맹인을 잡는다고 해도 금고를 열 방법은 없다는 소리다.

그런 곳을 털겠다니 루페르트가 실소를 머금은 것도 무리는 아닌 것이다.

황제의 관심은 곧 괴도 본인보다는 카렐리아의 왕관에 주목했다.

“그 왕관이 없어지면 어떻게 되지? 그 괴도가 왕관을 턴다는 가정을 해 보자고.”

오랜만에 모든 총신에게 물었다.

베르너가 답했다.

“황실의 체면이 깎이겠지만, 제국이 무너지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없어진 왕관을 다시 제작해서 쓰면 그만이니까요. 녹슨 월계관만 하더라도 복제품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4대 황제이신 진중제 카를 폐하께서는 투구 위에 녹슨 월계관을 쓰고 야만족과 전쟁을 벌였습니다만 날아오는 화살 비 속에 그만 월계관을 부서뜨렸습니다. 월계관은 룸인 기술자가 만들었는데, 그 시대엔 재현할 기술도 소재도 없기에 다시 만들었죠. 그럼에도 어느 누구도 진중제 카를의 권위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신물은 누구에게나 있다.

심지어 하찮은 마을의 유지조차 대대로 전해 오는 가보가 있다.

접시라든가, 항아리라든가.

사실 그런 게 부서지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물건 하나 부서진다고 해도 그 가문이 망하는 건 아니다.

제국도 마찬가지다.

군주와 군왕이 갑주와 투구를 걸치고 전쟁터에 임하던 시절, 군주들은 투구 위에 왕관을 올리곤 했다.

그 과정에서 부서진 왕관이 몇 개인지는 셀 필요도 없으리라.

왕관을 잃어버린 왕국 중에 멸망한 곳도 몇 군데 있지만 건재한 곳도 얼마든지 있다.

카렐리아의 왕관도 마찬가지.

도난당한다면 베르너 말대로 위신이 깎이겠지만, 도르니에의 예언대로 그거 하나 없어진다고 제국이 망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오래만에 오토 브라에가 입을 열었다.

“카렐리아의 왕관을 레벤호스트 선제후 같은 제국 내의 야심가 손에 쥐여 준다면, 그 자체로 그들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카렐리아가? 레벤호스트에게?”

루페르트는 과거를 생각했다.

레벤호스트와 카렐리아는 무관하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영지와 하위 군주의 힘으로 골트문트와 내전을 벌였다.

카렐리아는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세에게 초토화되기 전까지 루페르트의 영지로 남았다.

황제의 물음에 오토 브라에가 최근 명백히 요하네스에게 밀리고 있는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그동안 조사했던 내용을 담담하게 보고했다.

“카렐리아의 상황은 겉으로는 평안하지만, 그 내부는 심하게 곯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래?”

“그렇습니다. 카렐리아의 귀족과 유지들은 선제의 약속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선제의 약속? 아, 그거 말인가.”

루페르트가 카렐리아의 해묵은 문제를 기억해 내고 혀를 찼다.

“또 그놈의 종교 문제인가.”

카렐리아는 종교의 자유를 요구한다.

그들은 호라 교단이 아닌 신교의 영적 지배를 원한다.

그것은 문제가 된다.

황제의 가장 부유한 땅 하나가 황제와 다른 믿음을 가지게 된다는 뜻이니까.

문제는 그 부탁을 들어주면 다른 비슷한 곳에서 같은 요구를 할 것이다.

황제의 기반인 구교의 지배 체제가 뿌리부터 흔들린다는 소리다.

“……그건 쉽지 않겠군.”

진정으로 어려운 문제다.

레벤호스트 같은 건 단지 하나의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 * *

황제가 괴도에 관한 이야기를 총신들과 주고받고 있을 때였다.

도르니에의 금고 앞에 낯선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금고지기도, 금고를 지키는 산악 민족 용병도 금고실 전체를 관리하는 삼각의 마법사도 아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그 사내를 의심하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는 얼굴이고 무해한 얼굴이다.

지레 그런 생각을 해 버리고 사내를 무시했기 때문이다.

은은한 황금빛이 감도는 정육면체 형상의 금고 앞에서 사내는 뒤집어쓰고 있던 두건을 벗었다.

그 얼굴은 안개처럼 흐릿하지만 이내 지혜롭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는 노인의 형상으로 변했다.

“……실로 오랜만이군.”

그는 세상에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고 알려진 사람이다.

안드리아가 어디인지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지리에 밝은 사람이라면 제국 슈발츠마인주의 한적한 시골 마을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도 정답을 말한 건 아니다.

왜냐하면 안드리아는 룸 제국이 제국 영역 일부를 통치하던 시절, 테타우 일대를 일컫는 말이었다.

룸 제국이 멸망하면서 옛 이름은 사라졌다.

과할 정도로 화려한 군복과 갑주, 할버드를 무장한 산악 민족 용병들이 지나가는 루돌프를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 기억에 있는 사람이다.

아마 금고지기 중 한 명이 아닐까.

이 노인이 여기 들어왔다는 건 금고실 입구에서 사람들을 관리하는 삼각의 마법사의 허락을 받았다는 뜻이다.

삼각의 마법사가 실수했다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도르니에의 금고지기는 맹인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긴 금고실 앞에서 그 맹인은 발소리와 숨소리만으로 그 사람이 누군지 알 수 있다.

빛을 잃은 대신 놈들보다 더 민감하고 정교한 청각을 얻었기 때문이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 맹인은 단지 심장의 고동만으로 사람을 구분하는 재주가 있다고 한다.

누가 됐건 그 맹인을 속이는 건 불가능하다.

그는 보이지 않기에 현혹되지 않고 어둠 너머에서 진실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맹목을 가졌으니까.

금고실의 문이 열리고 발소리가 들려왔다.

빛 한 점 없는 어둠 속에 있던 맹인이 안락의자에 앉아 있다 고개를 들었다.

맹인의 귀가 쫑긋거렸다.

먼저 발소리를 들었다.

아는 발소리다.

분명 기억에 있는, 아마 영원히 기억해야 할 종류의 그런 발소리였다.

하지만 그 발소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숨소리를 들었다.

사람의 숨소리는 폐의 상태와 비강과 목구멍의 형태, 건강 상태에 좌우된다.

어떤 이는 거친 숨소리를 내고 어떤 이는 새된 소리를 낸다.

어떤 이는 너무나 조용해 마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금고지기는 모든 숨소리를 구분할 수 있다.

대단한 마법적인 기술이나 기예가 필요한 건 아니다.

단지 남들보다 잘 발달한 후각과 비상한 기억력만 있으면 충분한 일이다.

맹인이 눈을 떴다.

허옇게 변해 버린 동공은 아무것도 볼 수 없지만, 그가 눈을 뜬 건 그의 감정이 놀라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 숨소리는?’

맹인이 안락의자에서 일어나 지팡이 두 개를 짚고 허공을 두드렸다.

딱. 딱. 딱.

맹인의 지팡이는 단지 땅을 짚는 것만은 아니다.

맹인은 촉각 또한 비상할 정도로 발달하며 얼굴에 와닿는 바람의 강도만으로 사물의 거리를 어렴풋이 추정할 수 있고, 기류의 미세한 온도를 느끼는 것도 가능하다.

어둠 속을 지팡이로 짚어 나간 그는 미지의 침입자 앞에 서 있었다.

하얗게 탈색돼 버린 동공을 드러낸 채 맹인이 보이지 않는 앞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다, 당신은……?”

“오랜만이군.”

“그 목소리는 설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맹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여기 있으면 안 되는 자다.

왜냐하면 선제 클라우데 2세는 이미 오래전에 유명을 달리하여 지금은 슈발츠마인 가문의 묘실에서 천천히 썩고 있을 테니까.

“내가 말하지 않았나. 언젠가 돌아올 날이 온다고.”

“폐하…….”

“내가 돌아왔다는 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게나.”

“저는 오로지 폐하의 종입니다.”

맹인이 어둠 속에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더듬어 루돌프의 손을 찾았다.

루돌프의 크고 거친 손을 만지작거린 후 그는 인장을 찾아 무릎을 꿇고 입을 맞췄다.

루돌프는 어둠 속에서 무릎 꿇은 맹인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가 물러난 후 금고로 향했다.

“관 하나를 받아 가려 하네.”

“폐하의 뜻대로.”

금고지기는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 금고에 다가가 저 광인 도르니에가 만든 결코 파훼할 수 없는 잠금장치를 맹인의 섬세한 감각에 의지해 풀고 금고의 문을 열어젖혔다.

금고가 열리자, 어둠이 잠깐 물러났다.

금고 안엔 스스로 빛을 내는 기이한 등불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등불은 두 개의 관을 비추었다.

하나는 녹슨 월계관이고 다른 하나는 카렐리아의 왕관이다.

루돌프의 손은 카렐리아의 왕관을 선택했다.

“내가 이걸 가지고 간다면 그대는 죽음을 맞이하겠지.”

“어떤 고문도 어떤 고초도, 어떤 수모와 어떤 회유도 제 입을 열지 못할 겁니다.”

맹인이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루돌프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카렐리아의 왕관과 오싹할 정도로 똑같이 생긴 또 다른 카렐리아의 왕관이었다.

조잡한 모조품이 아니다.

금제 테두리에 새겨진 흠집과 세월의 얼룩까지 고스란히 재현했다.

그러나 맹인은 알 수 있었다.

그 새로운 왕관은 저 루돌프의 품속에 있었음에도 원본보다 낮은 온도를 갖고 있다는 걸.

평범한 물질은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이질적인 냄새 또한 은은히 풍겨 왔다.

또 다른 왕관을 금고에 넣은 채 루돌프가 말했다.

“……카를 부흐. 그대의 충정이 위기의 제국을 구할걸세.”

맹인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흐릿한 안개 같은 한마디를 남기고 루돌프는 암실을 떠났다.

금고는 두 개의 관을 드러낸 채 한참이나 열린 상태를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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