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85화 (185/225)

185화 41. 역병의 주인 (6)

한스 징펠만은 역병 의사에게 들은 조언대로 헝겊에 독주를 뿌린 다음 그걸 호흡기 주변에 두른 다음 역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이 수용된 집으로 향했다.

“나으리도 역병에 옮으실 겁니다!”

촌장이 만류했다.

“옮는다고 해도 이야기를 들어야겠소.”

한스 징펠만이 듣고 싶은 건 하나다.

무엇이 그들에게 역병을 옮겼는가.

그동안 수많은 수사관과 의사들이 역병의 원인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역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다.

감염되는 것만으로 죽는데 누가 감히 죽어 가는 사람에게 다가가겠는가.

다가간 사람도 있었다.

물론 모두 죽었다.

목숨을 건 대가는 빈약했다.

누구도 병의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고 무의미하게 인생을 마쳤다.

한스 징펠만은 똑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하려 한다.

그러나 한스 징펠만은 자신을 믿고 있었다.

‘나는 황제의 대리인이다. 혹 역병이 나를 그에게서 앗아 간다면, 그건 세상이 제국을 저버린다는 것이겠지.’

한스 징펠만이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에 들어섰다.

이미 눈에 초점에 풀린 사람들이 얼굴이 검게 변색된 채 잠들어 있었다.

사냥꾼의 눈은 아직 정신을 잃지 않은 젊은 여성에게 향했다.

불룩한 배. 임산부로 보였다.

속으로 혀를 차며 임산부에게 다가가려는 찰나였다.

문이 닫혔다.

“뭐 하는 거냐?”

한스 징펠만은 그것이 누구의 짓인지 아주 잘 알고 있다.

그의 제자, 쌍둥이 도제의 짓이다.

굳게 닫힌 문에서 제자들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려 퍼졌다.

“한스 징펠만.”

차가운 웃음소리가 뒤를 이었다.

“부친의 원수를 갚겠다.”

한스 징펠만은 혀를 찼다.

우려했던 순간이 찾아왔다.

그것도 가장 덧없는 순간에.

전장에서 배신을 당해 죽는다면 차라리 명예롭게 죽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강력한 사냥감을 상대로 싸우다 죽더라도 다르타니아의 이목을 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역병 환자들이 득실거리는 집안에 갇힌 채 죽으라니.

자초한 일이지만 이보다 더 무의미한 죽음이 있을까?

싸울 수도 있다.

총기를 들고 도제들과 총격전을 벌이고 그들을 죽여서 이 곤경에서 탈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스 징펠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굳게 닫힌 문을 노려보며 도제들에게 낭랑하게 말했다.

“그래. 나의 제자들아. 이걸로 너희들의 원한이 풀렸으면 좋겠구나. 그리고 고맙다. 적어도 등 뒤에서 내가 가르쳐 준 총으로 날 쏘지 않았다는 점이.”

그의 제자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마도 문 너머, 은폐하기 좋은 곳에 숨어 한스 징펠만이 나올 만한 출구를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고 있을 것이다.

한스 징펠만은 얕은 한숨을 내쉬고 병자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죽어 가는 임산부가 눈에 들어왔다.

가쁜 숨을 몰아 내쉬는 그녀를 향해 한스 징펠만은 다가갔다.

“안녕하시오.”

안면이 있는 여자다.

도제들을 끌고 마을에 방문했을 때 멀리서 구경하던 사람 중 하나였다.

이 한적한 시골 마을에 외부인, 그것도 과할 정도로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황제의 사냥꾼이 오는 걸 수십 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행사니까.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돌려 한스 징펠만을 응시했다.

“한 가지만 묻겠소.”

한스 징펠만이 죽어 가는 여성의 손을 만졌다.

그 손은 시체처럼 차가웠다.

“역병이 덮치기 전에 전조가 있었소?”

여성이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초점이 점점 흐려져 간다.

죽음이 그녀의 동공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 침통한 얼굴로 그녀의 눈이 감기는 걸 가만히 응시하고 있을 때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배 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한 것이다.

눈을 감던 여성이 갑자기 눈을 떴고 자기도 알 수 없는 기묘한 각성을 느끼면서 한스 징펠만을 보았다.

“헐벗은 여자. 맞아요. 헐벗은 여자가 나타났어요.”

“헐벗은 여자?”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늙은 여자였어요. 아니 어떤 때는 젊은 여자처럼 보였지만 안개처럼 창백해서 잘 구분이 가지 않았어요.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도 마을 사람들은 그 여자에게 별 신경을 쓰지 않았죠. 참견하기 좋아하던 하딩 영감도 그 여자를 보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어요.”

여성이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눈을 감기 시작한다.

죽음에 이르는 역병이 다시금 그녀에게 저항할 수 없는 졸음을 불러온 것이다.

임산부의 손을 강하게 잡으며 한스 징펠만이 그녀를 다그쳤다.

“정신 차리시오. 부인. 제국의 운명이 당신에게 달렸소.”

한스 징펠만의 다그침에 여성이 가까스로 눈을 떴다.

“그래, 그 여자가 무슨 짓을 했소?”

“우물. 우물 쪽에서 물을 긷고 있었어요.”

“우물?”

“뭐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딴 일을 하고 있었어요. 그 여자는 여전히 우물에 머물러 있었죠…….”

여성이 눈이 다시금 감긴다.

이번에는 저항하기 어려워 보였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여성의 손의 온도가 얼음처럼 차가워지는 걸 한스 징펠만은 똑똑히 느꼈으니.

“우리 아이.”

임산부가 보이지 않는 허공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우리 아이.”

여성이 눈을 감았다.

한스 징펠만은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눈을 부릅뜬 채 죽어 가는 여성의 눈을 감겨 준 후 그녀의 배에 귀를 갖다 댔다.

아이는 살아 있다.

그러나 죽을 것이다.

배를 가른다고 해도 살릴 수 없을 정도로 미숙한 생명이니.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가 죽자 아이도 움직임을 멈췄다.

차가워지는 온도 속에서 한스 징펠만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을 터벅터벅 배회했다.

“…….”

또 하나의 마을이 전멸했다.

하지만 적어도 최소한의 단서를 찾았다.

‘헐벗은 여자?’

죽은 사슴에 이은 또 다른 단서.

죽은 사슴과 여성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적어도 사슴과 여성이라는 상징은 한스 징펠만에게 친숙한 것이다.

그가 숭배하는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는 늠름한 사슴을 탄 처녀의 모습으로 묘사되곤 하니.

하지만 사람들이 묘사하는 사슴과 여성의 모습은 불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치 신자를 잃고 죽어 버린, 현재의 모습을 비유하는 양.

‘신의 회초리는 설마 신의 분노인가?’

알 수 없는 일이다.

한스 징펠만은 신화의 시대를 살아 보지 못했다.

좀 더 알아봐야 한다.

죽은 사슴도, 헐벗은 여인도.

최소한 그 여인이 머물렀다는 우물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

“루! 기!”

한스 징펠만이 집 밖을 향해 언성을 높였다.

“너희들이 나를 원수로 생각하는 건 잘 알겠다. 나 하나를 죽여서 너희들의 원한을 풀 수 있다면 이 한목숨 넘겨주겠다. 애당초 별 미련도 없었으니. 하지만 말이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이 죽음에 이르는 역병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한다. 다른 미련은 없다. 이 과업만 달성한다면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너희들에게 내 신병을 인도할 것이다. 한스 징펠만, 불과 철의 형제단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인생 전체를 건 맹세.

그러나 그의 도제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스 징펠만의 눈동자에 살기가 감돌았다.

‘결국은 그 방법뿐인가.’

제자들을 죽이는 방법은 한스 징펠만의 안배엔 포함되지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철컥-

한스 징펠만이 품속에서 총기를 꺼냈다.

네 개의 피스톨이 그의 깡마른 몸을 감싸는 외투 안에 감쪽같이 숨겨져 있었다.

바깥의 지형은 이미 파악한 바다.

어디에 제자가 숨어 어떻게 공격할지도 뻔히 그려진다.

유일한 문제는 제자를 향해 방아쇠를 당길 각오겠지만, 방금 죽은 임산부와 그 아이가 한스 징펠만에게 각오를 주었다.

“간다.”

한스 징펠만이 경고하고 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커억!”

한스 징펠만의 얼굴이 급격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온몸을 불태우는 듯한 격통이 전신을 휩쓸고 지나갔다.

눈앞이 번쩍거리고 숨이 막히고 귀가 멍멍거리고 손발이 후들거린다.

내장에 바늘을 쏟은 듯 참기 어려운 복통이 엄습하는 가운데, 한스 징펠만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쿵!

그가 쓰러지는 소리는 정적이 흐르는 마을 바깥에서도 들을 수 있었다.

“커억!”

바닥에 드러누운 채 한스 징펠만은 자신의 운명을 직감했다.

역병에 걸렸다.

그의 자식과 아내의 목숨을 앗아 간 죽음의 역병에.

“천벌을 받은 거요.”

그의 제자들이 조소했다.

“당신은 아무 죄도 없는 우리 아버지를 죽였지.”

“당신의 아내와 자식이 죽은 건 당신의 죄를 대신 뒤집어썼기 때문이지.”

“이제 고통받으며 잠에 드시오. 우리의 스승이자 원수여.”

쌍둥이들이 엄폐물에서 모습을 드러내며 문이 닫힌 건물을 노려보았다.

“우리들을 키워 주고 가르쳐 준 공도 있으니. 최소한 임종은 지켜 드리리다.”

“시체 또한 화장해 줄 테니, 짐승에게 살이 파먹히는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도제들은 싸늘했다.

애당초 감정이 무뎠고 무딜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들은 멀리서 벌벌 떨며 지켜보는 촌장에게 손짓해 다른 곳으로 가라고 지시한 후, 한스 징펠만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출구를 지켜보며 모닥불을 피웠다.

길어 봐야 이틀.

한스 징펠만은 죽을 것이다.

실제로 한스 징펠만도 온몸이 마비되는 감각 속에서 자신의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졸음이 찾아왔을 때 한스 징펠만은 별 저항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폐하에겐 죄스러운 따름이군. 이 한스 징펠만을 믿고 일을 맡기셨는데 사명을 다하지 못했으니.’

하지만 그가 죽더라도 더 뛰어나고 충성스러운 신하가 빈자리를 채울 것이다.

제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뛰어난 인물이 넘쳐흐르는 곳이고, 그의 황제는 사람을 알아보는 신비로운 안목이 있으니까.

스르르 눈이 감기며 어둠이 시야를 덮는 걸 느끼며 한스 징펠만은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적어도 죽더라도 웃는 얼굴로 죽는 것이 자신답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쓰러진 지 이틀이 지날 무렵이었다.

한스 징펠만의 어두운 시선 앞에 두 개의 상이 떠올랐다.

하나는 군데군데 뼈가 드러나고 가죽이 벗겨진 죽어 가는 사슴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파인지 소녀인지 분간이 가지 않는 헐벗은 옷을 입은 창백한 여자였다.

‘저건?’

틀림없다.

역병의 전조를 본 사람들이 말하던 괴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하지만 한스 징펠만은 그 기괴한, 죽음과 같은 것들이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 죽어 가는 사슴과 헐벗은 여인에게서 빛을 본 듯한 경이를 느꼈다.

곧 그의 흐릿한 뇌리에 하나의 이름이 운명처럼 떠올랐다.

“다르타니아.”

한스 징펠만은 자신이 숭배하는 진정한 신의 이름을 되뇌었다.

그 순간, 죽어 가는 사슴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늠름하고 아름다운 사슴으로 변했고, 헐벗은 여성 또한 결코 잊을 수 없는 기품 있는 여성으로 변해 사슴 위에 단정한 자세로 올라타 있었다.

그 여성이 한스 징펠만에게 손을 내밀었다.

뭐라고 하는 것인가.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그 존재가 뜻하는 바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마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닐까.

“불쌍하게도.”

한스 징펠만은 보았다.

눈을 감고 쓰러진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그 헝클어진 머리카락 너머, 두개골 안에서 꿈틀거리는 기괴한 벌레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그 벌레는 끔찍하게도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아.”

그의 황제를 닮아 있었다.

형언할 수 없는 충격과 공포 속에서 한스 징펠만은 정신을 잃었다.

영혼 동맹이라는 덧없는 소리와 메아리 속에서 한스 징펠만의 기억은 충격과 함께 빠르게 소멸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