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41. 역병의 주인 (3)
그 소식을 알게 된 것은 루페르트가 황실 도서관의 사서 페르디난트 알텐보흐가 가지고 온, 고대의 인물들에 관한 보고서를 읽던 중이었다.
루페르트는 단 몇 줄만을 읽고 사서를 칭찬했다.
“놀랍군. 그 문서의 바닷속에서 이런 자료를 찾아낼 줄이야. 이른바 룸 제국의 연대기를 머릿속에 꿰고 있다던 학자들도 해내지 못한 일인데.”
사서는 황제의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우, 운이 좋았을 뿐입니다. 폐하.”
루페르트는 껄껄 웃으며 그에게 보상을 하라고 주위에 명했다.
기록은 대단히 흥미로웠다.
비달, 포르피리우스, 우줄두스, 심지어 검투사 시절의 티그리트에 관한 일화마저도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대단히 훌륭한 자료다.
단 하나, 에피미논클레아스라는 끔찍한 인물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뭐지? 이 괴물은?’
그 인물의 기록을 읽으면서 루페르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게 느껴졌다.
호라교에서는 인간이 태어날 땐 선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세상의 더러움에 찌들어 악인이 된다는 주장을 펼치지만, 이 인간은 그 호라교의 주장에 대한 완벽한 반례다.
날 때부터 악이다.
필요나 반드시라는 부사도 필요 없었다.
내키는 대로 악을 저질렀고 그 악행은 날이 갈수록 잔혹해지고 교묘해졌다.
일견 무시무시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겁이 많은 맹수를 사람을 당연하다는 듯 죽이고 잡아먹는 식인 괴물로 만드는 기술은 오로지 룸 제국에서만 실천 가능한 끔찍한 것이겠지만, 그 룸인조차 감탄과 공포를 느꼈다는 점에서 에피미논클레아스의 잔혹함이 어느 정도인지 오롯이 말해 주고 있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그 인물이 여신이 보여 준 환상 속의 자신에 가장 근접한 후보군이라는 것이다.
‘설마, 그 인간이 나는 아니겠지. 이치에 맞지 않아. 아무리 생김새가 닮았다고 하더라도 그런 인간 말종과 나와 특별한 연관은 없을 것이다.’
진실을 아는 건 아마 여신이겠지만, 여신은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여신은 지금, 안젤리나가 머물던 저택을 허물고 지은 신전 안에 있다.
여전히 여신의 소라고둥은 루페르트의 목에 걸려 있지만 그의 여신은 지난 2년간 그리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반년 이상 한마디도 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여신이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지만, 루페르트는 굳이 생각하려 들지 않았다.
어차피 여신이라는 건 자신이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길 바라는 존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으니.
다만, 그 에피미논클레아스의 최후가 신경 쓰인다.
미지의 힘에 속박된 채마치 달팽이에게 갉아 먹히듯 잘근잘근 씹혔다니.
잘근잘근 씹히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앞에서 잡아 먹히던 안젤리나의 시체를 떠올리고는 헛구역질을 했다.
“폐하?”
루페르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관찰하던 울피아나가 루페르트의 이상을 눈치채고 급히 다가와 손수건을 내밀었다.
“괜찮으세요?”
“괘, 괜찮습니다.”
루페르트는 억지로 울피아나의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손수건을 받아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도, 손수건에서도 모두 좋은 냄새가 났다.
그것만이 아니다.
지난 2년이라는 시간 속에서 그녀는 좋은 향기만을 풍겼다.
그 끔찍한 상처로 남은 과거가 희석될 정도로.
‘그녀는 정말 좋은 여자가 아닐까?’
라는 의문이 종종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때마다 루페르트는 과거에 유별나게 매몰찼던 울피아나의 모습을 떠올리며 심리적인 거리를 유지하려 했다.
지금도 그렇다.
억지로 그녀에 대한 저항감을 늘리며 그녀에게서 멀어졌다.
운 좋게도 장교 하나가 집무실에 들어와 급한 사안을 보고했다.
“뭐라고?”
한스 징펠만의 돌연한 실종은 그러나, 울피아나 하나만을 떨치기엔 지나칠 정도로 무겁고 심각한 사안이었다.
루페르트는 마음속이 얼어붙는 걸 느끼며 사안을 확인했다.
한스 징펠만은 노르드마르크의 울창한 숲속에서 사라진 지 한 달이 지났다.
일주일만 사라져도 사망이라고 간주되는 세상이다.
한 달 동안 종적이 묘연하다.
아마도 그의 사냥꾼은 죽었을 것이다.
실제로 한스 징펠만을 죽인 살인자로 두 명이 체포되어 테타우에 끌려왔다.
황제의 사냥꾼을 죽인 건 사냥꾼의 도제였던 루와 기라는 쌍둥이였다.
압송 과정에서 얼굴을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가혹하게 폭행당한 이들은 수사관 앞에서 무죄를 주장했다.
“스승은 죽지 않았습니다. 그는 우리를 돌려보내고 혼자 숲으로 들어갔을 뿐입니다.”
“우리는 명을 따랐을 뿐입니다.”
루페르트는 다른 시간 축에서 이들이 한스 징펠만을 죽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 매잡이 프리츠라는 인간이 그랬지. 한스 징펠만이 이들의 부모의 원수라고.’
루페르트는 친히 남매를 심문하기로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황제가 그런 잡범의 심문을 직접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처럼 안개 가면을 쓰고 쌍둥이 도제가 갇힌 지하 감옥으로 향했다.
황궁에서 아름답지 않고 고상하지 않은 곳이 없다지만 감옥은 예외다.
어둡고 횃불이 음산하게 일렁거리며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도르래로 돌아가는 밧줄 소리가 어떤 기괴한 거대생물의 내장처럼 꿈틀거리는 소리는 감옥 전체에 퍼뜨리고 비릿한 악취와 죽음의 냄새가 만연해있다.
루와 기는 구속구에 묶인 채 좁은 감옥에 갇혀 있었다.
루페르트는 이들을 잘 안다.
어린 시절부터 보았다.
스승만큼이나 기이한 옷에 어린 나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솜씨와 정확성으로 한스 징펠만을 돕던 아이들이었다.
그들에게 도움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름이 이들을 죄인의 형태로 루페르트 앞에 싣고 왔다.
“왜 죽였나?”
수사관으로 분한 루페르트가 남매에게 고압적으로 물었다.
“우리가 죽이지 않았습니다.”
“스승은 살아 있습니다!”
형편없이 얻어맞았음에도 남매는 재차 결백을 주장했다.
옆에 있던 형리가 채찍을 들어 루페르트를 쳐다봤다.
형리는 과묵한 사람이기에 질문을 하는 대신 때려도 됩니까? 하는 눈빛으로 루페르트의 허락을 구했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피 묻은 채찍이 오갔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헐떡이는 숨소리가 간극을 채웠다.
한 차례 채찍질이 끝난 후 루페르트가 다시 물었다.
“왜 죽였나?”
대답은 같았다.
쌍둥이는 한스 징펠만이 죽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제가 이 녀석들의 입을 열게 해 보겠습니다.”
형리가 의욕을 드러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일어서려는 찰나였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느닷없이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의 호출에 루페르트는 기쁨과 동시에 의아함을 느끼며 구석진 곳에서 여신을 영접했다.
“여신님.”
보이지 않는 여신을 향해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루페르트 가우저. 그간 격조했죠? ]
“아닙니다. 전부 다 여신님께서 잘 보우해 주신 덕에, 아무런 문제 없이 제국을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 당신이 점점 세련된 황제가 될수록, 뭐랄까 제 마음은 멀어지는 기분이네요. ]
“…….”
[ 영혼 동맹 하나가 죽은 모양이네요? ]
“그렇습니다. 제 첫 영혼 동맹인 한스 징펠만이 노르드마르크의 숲에서 죽임을 당한 것 같습니다.”
[ 과연 그럴까요? ]
리프니에가 웃으며 물었다.
여신의 말에 루페르트는 알 수 없는 야릇함 감각을 느끼며 목에 건 소라고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뭔가 있는 건가.’
[ 한스 징펠만이라는 카드를 꺼내 보세요. ]
영혼 동맹은 카드의 형태로 그 신상과 능력이 일종의 서류철로 남는다.
그동안 잘 쓰지 않았던 권능이다.
영혼 동맹도 지겔슈타트 이후엔 수집하지 않았고, 실제로 쓸 만한 인물을 찾을 수도 없었으니.
그나마 쓸 만한 사람은 저 거인병 낙센이었지만, 그는 지나칠 정도로 사악하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시간 축이 바뀐 지금은 저지대 연방 어딘가에 살아 있겠지만, 루페르트는 그를 자신의 휘하에 넣고 싶은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았다.
간만에 루페르트는 카드의 군단을 구성하는 한스 징펠만이라는 카드를 꺼내 보았다.
전과 같다.
다를 게 없이 한스 징펠만의 모습이 그려진 카드.
[ 어떤가요? ]
“글쎄요. 달라진 게 없는 거 같은데요.”
[ 당연하죠. 실제로 그에게 달라진 건 하나도 없으니까요. ]
“그 말씀은……?”
[ 네, 한스 징펠만은 살아 있답니다. ]
여신의 말이다.
루페르트는 그 말만큼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한스 징펠만이 살아 있다고?’
[ 만약 카드의 군단에 속한 어떤 사람이 죽는다면 카드에 떠오른 그 사람의 얼굴 또한 사라진답니다. ]
“그렇습니까?”
알지 못했다.
카드의 군단에 그러한 기능이 있다는 걸.
아니, 확인할 기회도 없었다.
영혼 동맹 하나의 죽음을 그 즉시 회귀와 연결시켰던 게 지금까지 루페르트의 패턴이니까.
하지만 여신은 군단의 다른 사용법을 느릿하고 청아한 어조로 속삭여 주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아직 당신이 가진 영혼 동맹의 숫자는 턱없이 적지요. 하지만 언젠가 당신도 선제처럼 많은 동맹이 있고 그들 하나하나의 죽음에 휘둘리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숫자를 보유한다면, 동맹의 죽음이란 건 그 자체로 하나의 정보가 되지 않을까요? ]
“…….”
비정한 말이지만 맞는 말이다.
혹, 누군가의 죽음이라는 상태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으면 죽음 그 자체가 어떤 의미의 정보가 될 것이 분명하니까.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선제와 달리 영혼 동맹을 적극적으로 늘리지 않으려는 성향이 있더군요. 물론 형편없는 사람을 동맹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적절한 자세로 보이지만, 이 세상엔 완벽한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니며 인간이 하는 일이란 하늘의 별보다는 적겠지만 충분히 많은 가짓수를 가지고 있답니다. ]
여신의 말에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여신님.”
여신의 기척이 사라졌다.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자신의 곁을 떠난 걸 인지했다.
“…….”
심호흡을 하고 루페르트는 다시 심문실로 돌아왔다.
형리가 씩씩거리며 채찍을 휘두르고 있었다.
루페르트가 형리에게 명했다.
“이들을 풀어 주고 치료해 줘라.”
“……네?”
루페르트가 쌍둥이들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한스 징펠만의 위치를 모른다고 했지?”
쌍둥이들은 서로를 마주 보고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하려 했는지는 알고 있는가?”
분명 알 것이다.
저들은 한스 징펠만을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도제들이니.
아니나 다를까 쌍둥이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들에게 사람을 붙여 노르드마르크로 보낼 것이다. 거기에서 너희들은 스승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이번 여정에 루페르트는 참석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겐 처리해야 할 문제가 너무나도 많다.
대신, 루페르트는 사람을 한 명 쓰려고 한다.
그의 영혼 동맹 중 가히 최강이라 부를 수 있는 자를.
“대학의 마법사 지겔슈타트,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들어 노르드마르크로 향하겠습니다.”
오랫동안 병상에 있던 마법사가 신비로운 눈을 번득이며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회복한 마법사를 보며 루페르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했다.
“내 벗, 한스 징펠만을 찾아와 주게.”
지겔슈타트가 고개를 끄덕이고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마차 안엔 붕대로 온몸을 휘감은 쌍둥이가 처참한 몰골로 서로를 의지하여 앉아 있었다.
지겔슈타트의 눈이 도제를 스치고 지나갔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황제 앞에서는 순종하는 양이지만 그는 사각의 마법사다.
여간한 하찮은 인간 앞에서는 입 한 번 여는 일이 드물다.
그런데 그 도제 중 하나가 감히 사각의 마법사에게 말을 걸려 한다.
지겔슈타트가 눈을 번득이며 주의를 주려 할 때였다.
여성 쪽 쌍둥이가 낮게 속삭였다.
“진실을 말해 드릴까요?”
“뭐라고?”
지겔슈타트가 불쾌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저 여성의 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다.
잠자코 냉담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식으로.
곧 쌍둥이 도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는 동시에 고개를 돌려 지겔슈타트에게 숨겨진 진실을 이야기했다.
“우리 스승은 죽음에 이르는 역병에 걸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