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41. 역병의 주인 (2)
루페르트가 황위에 오른 지도 4년째를 맞이했다.
불안하게 출발했던 하켄하임 출신의 어수룩한 청년은 크고 작은 위기와 위협에 노출됐으나 뛰어난 결단력과 예상을 뛰어넘는 행보로 순식간에 흔들리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강력한 황제권을 구축했다.
이제 누구도 루페르트를 애송이라고 비난하지 못한다.
이미 루페르트는 몇 번이고 자신을 증명했다.
수많은 업적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렌타이어마르크 동란을 조기에 진압한 것이겠지만 가장 중요한 행보는 순결 선언이었다.
제위를 슈발츠마인이 아닌, 다른 선제후 가문에 넘겨줄 수 있다는 뜻을 내비친 것만으로 여간한 군주들은 불만을 가라앉히고 황제의 치세를 지켜봐 줄 용의가 있었다.
루페르트가 도펠죌트너를 불러들이는 의심스러운 행태를 저지를 때에도 군주들은 인내했다.
아니, 정확히는 그들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변명을 지어내며 좌시했을 것이다.
레벤호스트가 수시로 황제에게 도전한다는 건 저잣거리의 아이들마저 알고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사안이니.
그 레벤호스트의 최근 행보는 그야말로 처참하다.
모든 공작이 실패로 끝났다.
가장 통렬한 실패는 저지대 연방과의 외교 실패다.
그레나스가 포위됐을 때 레벤호스트는 특사를 보내 야스퍼에게 신교도 동맹만이 저지대 연방을 구할 수 있는 궁극적인 수단이라고 권유했지만 야스퍼는 차일피일 회답을 미뤘고, 결국 황제 루페르트가 중재안을 들이밀자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중재에 따랐다.
야스퍼의 입만을 뚫어지게 보던 레벤호스트는 그야말로 닭 쫓던 개 신세로 전락했다.
떠들기 좋아하고, 남들에게 유세 떠는 걸 즐기는 레벤호스트는 사적인 자리에서 중신들과 친지들 앞에서 저지대 연방이 우리 측에 합류할 것이고 신교의 대의는 그로서 완성될 것이라 몇 번이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그 호언장담이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이다.
특히 레벤호스트의 은밀한 지지자인 트라이아 인근의 신교도 군주들에게 실망을 안겨다 준 것이 치명적인 결과였다.
헤겐슈타트 방백을 비롯한 군소 군주들이 레벤호스트의 자질에 우려를 표했다.
아직까지는 눈에 띄는 이반으로 나타나지 않았지만, 실패가 거듭되면 레벤호스트는 동맹을 잃게 될 것이다.
시름 속에서 레벤호스트는 안드리아의 루돌프라는 베일에 싸인 사내를 다시금 찾았다.
그 사내는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졌다.
두꺼운 로브로 몸을 반쯤 가린 건장하고 위압적인 체격에 지혜를 머금은 강인한 관상의 노인이라는 건 변함없지만, 항상 다른 사람을 보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 잊을 수 없는 카리스마적인 중저음의 음성은 루돌프의 속성이다.
레벤호스트는 처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중한 예의를 보이며 루돌프에게 의견을 구했다.
“루돌프 님의 지혜로 오랫동안 버려진 광산을 수복하여 영지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시류라고 할까요. 시대의 흐름이 우리 편을 들어주지 않는 것 같군요.”
선제후와 나란히 놓인 사치스러운 의자에 앉은 루돌프는 말없이 푸른 눈으로 허공을 노려보다 이내 무거운 입술을 천천히 열었다.
“저지대 연방도 잘 아는 거지요. 제국의 내전에 휩쓸려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는 걸. 하지만 그들도 제국의 내전에 휘말릴 수밖에 없을 겁니다.”
루돌프의 눈이 레벤호스트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담았다.
“선제후께서 보다 강한 소용돌이를 만드신다면.”
“강한 소용돌이라…….”
레벤호스트는 그 소용돌이가 대체 어디서 비롯되는지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루돌프가 실마리를 주었다.
“선제후님의 스승이었던 마르틴 보엠 목사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곳이 있을 겁니다.”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머리로는 뭔가로 새로운 걸 개척하거나 상황을 바꿀 만한 착상을 할 수 없는 사람이지만 적어도 주어진 단서에서 결과를 찾는 건 능한 사람이었다.
“스베아? 아니, 스베아는 아니야. 아!”
레벤호스트가 드디어 이해했다는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카렐리아!”
루돌프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레벤호스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루돌프를 노려보았다.
“카렐리아는 황제의 직할지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지만 그 백성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클라우데 2세의 금인칙서.”
새롭고 기발한 착상과 거리가 먼 레벤호스트가 명민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적어도 한번 이해한 주제에 관해서는 비상한 기억력과 방안을 도출해 내는 재주가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선제후는 카렐리아에 산적한 수많은 문제를 거의 빠짐없이 기억해 냈고,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득까지 계산해 냈다.
“저 잘난 철혈대제께서 카렐리아에 종교의 자유의 개선을 보장했으나, 결국 후임자에게 떠넘기고 저세상에 가셨고 그 후임자는 선제의 약속을 차일피일 뭉개고 있다…….”
레벤호스트가 코웃음을 쳤다.
“하긴, 도펠죌트너를 위한 일자리나 만들어 주고 거기에 대한 비난을 막는 데 급급하시니, 선제가 남긴 골칫덩이 같은 건 눈에 보이지 않을 수밖에.”
아니, 어쩌면 이라고 레벤호스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지. 카렐리아는. 그래서 뒤로 미뤄 둔 것일지도. 그러나!’
레벤호스트는 단지 카렐리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과 그걸 이용하는 것 사이엔 상당한 거리가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카렐리아 시민들이 불만을 품고 있다고 한들, 그걸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카렐리아는 제국의 법률상 황제의 직할지인데.
왜냐하면 황제가 쓴 두 개의 왕관 중 하나는 카렐리아의 왕관이기 때문이다.
그 왕관을 무시하고 선제후가 함부로 개입한다면 제국의 적이 되어, 사면받을 수 없는 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
레벤호스트의 시선은 루돌프에게 향했다.
저, 볼 때마다 인상이 달라지는 사내가 괜히 그 분란의 땅의 이름을 꺼낸 건 아닐 것이다.
과연 무슨 생각으로 카렐리아를 언급한 것인가.
선제후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돌프는 다시 무거운 입술을 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현재 카렐리아의 왕입니다. 그렇기에 카렐리아의 주권을 홀로 행사할 수 있는 거지요.”
“그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지요.”
맞장구를 치면서도 레벤호스트는 꺼림칙함을 느꼈다.
‘황제의 옛 이름을 부르다니. 이 사내의 배짱도 보통은 아니군.’
그 레벤호스트의 의문스러운 시선을 받으며 루돌프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루페르트 가우저가 카렐리아의 왕관을 잃는다면?”
“왕관? 설마 카렐리아에서 반란을?”
“단순한 반란은 진압의 대상일 뿐이겠지요.”
“…….”
레벤호스트가 눈동자를 굴렸다.
이내 그가 다시 루돌프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왕관의 주인을 바꾼다는 소리요?”
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제후의 은은한 분노 앞에서도 루돌프의 얼굴엔 구름 한 점만큼의 변화도 찾을 수 없었다.
“이제는 많이 잊힌 사실이지만, 카렐리아 의회는 그들의 왕을 정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요. 카렐리아가 제국에 편입될 당시, 제국의 황제가 직접 제국의 법률로 보장한 자치의 권한이니. 물론 카렐리아가 그들의 왕을 스스로 바꾼 적은 카렐리아가 제국령이 된 이래 단 한 번도 없었지만, 제국의 수도라는 명예를 잃고 이류의 도시로 전락해 간다는 위기감을 이용한다면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선제는 카렐리아에 대해 거한 약속도 했지요. 아직까지 지키지 못한.”
루돌프, 아니 티그리트는 속으로 웃었다.
‘그 약속은 내가 했지만 말이다.’
처음부터 지킬 생각 따윈 하나도 없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거짓으로 시간을 번 다음, 주모자들을 은밀하게, 마술적인 방법으로 죽여서 자연스럽게 여론을 무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지금 그 약속은 제국의 독소가 되기에 충분한 파괴력을 갖게 되었다.
“……약속이라.”
레벤호스트가 멍청했다면 그 약속을 이용할 생각 따윈 이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레벤호스트가 똑똑했다면 그 약속 이면에 깔린 위험성을 이해하고 과감하게 거절했을 것이다.
그러나 레벤호스트는 어중간한 명민함을 가지고 있다.
그 약속이 가진 의미를 알고 그것이 줄 수 있는 이득까지는 알아볼 안목이 있지만, 그 이면에 깔린 무저갱으로 향하는 위험은 보지 않는다.
“해 볼 만하겠군.”
자기도 모르는 어둠을 향해 순진한 아이처럼 뛰어드는 선제후를 보며 티그리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
제국은 한 차례 불탈 것이다.
진정한 재앙의 불길이 제국을 불태우기도 전에 말이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
단지 그 흐름을 약간, 아주 약간 늦추거나 돌릴 수 있을 뿐이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 티그리트 본인이 잘 알고 있다.
* * *
“폐하. 안녕하세요?”
2년을 함께 있었다.
아무리 낯설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해도 2년이라는 시간 동안 함께한다면 그 사람의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세월의 힘을 루페르트는 고스란히 느끼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루페르트는 자신 앞에 선 울피아나를 보고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울피아나는 눈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하녀와 시종에게 뭔가를 지시했다.
2년을 울피아나와 함께했다.
전처럼 부부 관계가 아닌, 같은 집무실에 있기만 한 기묘한 관계긴 하지만.
그 2년 동안 울피아나는 아무런 위해도, 날카로운 말도, 상처 주는 일도 하지 않았다.
늘 옆에서 그를 지켜볼 뿐이었다.
처음엔 꺼림칙했고 이 사달을 만들어 낸 문어를 저주했지만, 세월의 힘은 그러한 악감정조차 가볍게 묻어 버렸다.
루페르트는 곁눈질로 울피아나의 아름다운 옆얼굴을 잠시 보다가 그녀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며 서류로 눈을 옮겼다.
마음에 난 상처가 완전히 아문 건 아니다.
여전히 울피아나는 루페르트에게 있어 공포의 대상이고 극복해야 할 무언가다.
그래도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녀에 익숙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울피아나가 여기에 있는 의미를 잘 알고 있다.
“상황이 나아진다면, 선언을 파기하십시오. 폐하 같은 훌륭한 황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는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
골트문트는 울피아나를 자신에게 시집보내려 한다.
그가 강권하지 못하는 건 아직까지 상황이 무르익지 않아서다.
하지만 언젠가 고어문트-슈발츠마인 동맹이 제국의 나머지 선제후와 군주를 압도하고도 남을 전력을 가졌을 때 골트문트는 선언의 파기를 종용할 것이다.
그때 루페르트가 그의 제안을 거절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
사실상 식만 올리지 않았다 뿐이지 선제후의 머릿속에선 둘은 부부와 다를 바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이런 상황이라면 울피아나와 결합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고 일어난 것 또한 사실이다.
일상의 혼란 속에서 황제의 업무가 시작됐다.
중신들이 서류를 가지고 와 금일 회의의 주제를 설명하고 회의에 참석했다.
황제가 주재하는 회의엔 종교, 재무, 군사, 무역, 외교, 궁내, 황제 직할의 각 영지의 대표, 제국 첩자단의 우두머리 등 다양한 군상들이 모여 저마다의 현안을 황제 앞에서 보고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점과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시점이 같을 수가 없듯 중신들은 황제의 입장에선 별 중요치 않은 주제를 수시로 가지고 왔다.
그렇게 별 중요치 않은 회의를 마치고 황실 도서관에서 가지고 온 보고서를 읽던 중이었다.
한 사내가 알현을 요청했다.
챙 넓은 모자를 쓰고 화려한 깃털을 꽂은 산뜻한 복장의 사냥꾼이었다.
루페르트는 그 사내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제국 수렵대의 간부다.
루페르트는 귀찮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황실 도서관의 사서가 가지고 온 보고서가 보기 드물게 흥미로운 내용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수렵대의 사냥꾼은 살짝 짜증이 치민 황제의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충격적인 소식을 가지고 왔다.
“폐하의 사냥꾼, 한스 징펠만 엽사가 노르드마르크의 외딴 숲속에서 사라졌습니다.”
한스 징펠만이 실종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