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41. 역병의 주인 (1)
티그리트는 무서우리만치 굳은 얼굴로 자신 앞에 서 있는 흑발의 소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폐하~.”
리프니에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티그리트를 올려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가 그레나스를 지켜 냈다는 소문, 들으셨어요?”
티그리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조롱하러 온 것인가.’
아직도 알 수 없다.
왜 리프니에가 투기장에서 고슴도치 꼴이 되어 죽어 가던 자신을 구원했는지.
처음엔 순수한 신의 선의라고 생각했다.
“당신은 실패했는데, 그 사람은 해냈네요?”
전혀 아니었다.
저 자칭 균형의 여신이라는 건 힘과 권능을 주면서도 동시에 끊임없이 사람을 시험하고 조롱하고 고통을 주는 걸 즐겼다.
마치 그 사람이 부서지는 것이 자신의 진정한 목적이기라도 한 것인 양.
“명색이 제국의 진정한 주인이 비루한 교외의 어수룩한 소년만도 못하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지금도 그렇다.
리프니에는 또다시 그를 조롱하러 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티그리트가 고개를 들었다.
“……저를 모욕하러 온 겁니까?”
티그리트의 물음에 리프니에는 은은한 웃음을 흘릴 뿐 아무런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세상이 잠깐 어두워졌고 그 어둠이 걷혔을 때 흑발의 소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티그리트는 무표정한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
전쟁이 휩쓴 거리 위에서 죽어 가던 소년이 있었다.
까맣게 물든 손톱에서 알 수 있듯 사회의 밑바닥을 차지하던 인쇄공이었다.
인쇄소 주인이 부품처럼 갈아 치우던, 직인(職人)의 구타와 모욕에 시달리던 하루살이 같은 인생이다.
눈앞의 황제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분별력이 없던 그 어린 촌놈은 황제 앞에서 어이없는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가 황제라면 이보다 잘했을 겁니다.”
황제는 촌놈에게 껄껄 웃으며 답했다.
“그럼 어디 네가 한번 해 보거라.”
* * *
금속활자가 발명되기도 전에도 인쇄산업은 도시를 중심으로 크게 번창했다.
호라교의 경전에서부터 저잣거리에서 팔던 한 장짜리 팸플릿까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은 새롭고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요구했다.
그것이 진실에 들어맞는지, 유익한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삼류 판화가가 새긴 싸구려 판화 하나에 그럴듯한 이야기 하나만 끼워 내면 그 팸플릿은 불티나게 팔렸다.
이익의 소문을 들은 부유한 상인과 상회, 심지어 귀족마저 인쇄 사업에 달려들었고 그 결과 테타우엔 34개에 달하는 인쇄소가 성업하고 있다.
매해 꾸준하게 폐업하는 인쇄소가 생기지만 그와 비슷한 인쇄소가 새롭게 문을 여는지라 34개라는 숫자는 꾸준하게 유지됐다.
큰 인쇄소는 국가의 지원을 받아 운영한다.
그쪽이 국가가 원하는 정보를 사람들에게 퍼뜨리기 쉽기 때문이다.
지금은 반쯤 전설이 된 파멸의 예언자 크로지우스가 인쇄물이 얼마나 강력한 파괴력을 가지는지 실증한 이래 인쇄소는 늘 군주의 감시하에 있었다.
그렇다 보니 인쇄소들은 다른 사업과 달리 그들을 하나로 묶은 이익집단을 만드는 일엔 무관심했다.
테타우만 해도 황궁에서 얼마만큼의 금전적 지원을 하는가, 어떤 행정 편의를 봐주고, 비위를 눈감아 주냐에 따라 인쇄소의 흥망이 바뀌는 법이니.
그리하여 인쇄소 간엔 길드 같은 업자들 대표하는 이익집단이 나타날 일은 없었는데, 최근에 갑자기 인쇄소들을 하나로 묶는 인쇄업자 길드가 홀연히 나타났다.
다분히 정치적인 의도였다.
“도펠죌트너를 인쇄소에 받아들이라고?”
“빨간 명찰을 단, 전쟁밖에 모르는 자들을 왜?”
“도펠죌트너를 새로운 사병으로 키우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황제의 총신, 재무성의 우두머리를 맡은 요하네스가 테타우의 34개 인쇄소를 하나의 길드로 묶고 길드의 감독하에 도펠죌트너라는 불길한 무리를 인쇄소로 흘려보냈다.
교외에서 공포의 대명사가 된 붉은 명찰이 줄지어 도시로 들어오는 걸 보고 테타우의 시민은 우려를 표했지만, 황제의 뜻이다.
거듭된 승리와 정치적인 성공으로 황제 루페르트는 즉위 당시의 불안정한 상태와 달리 굳건한 기반과 안정세를 마련했다.
귀족과 군주들의 불평도, 선제후의 견제도 이제 루페르트에겐 대수롭지 않은 파고에 지나지 않았다.
호사가들은 이번 결정이 황제가 자신의 권위를 시험하려는 시도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점쳐 보기도 했다.
또 어떤 호사가들은 보다 조심스럽게, 황제가 도펠죌트너라는 자신의 사병을 육상, 마치 철혈대제처럼 무시무시한 철권통치를 휘두르려는 초석을 밟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도펠죌트너가 지금 테타우의 인쇄소에 모여 검을 쥐던 손으로 활자를 만져 식질을 하고 철봉을 놀려 인쇄물을 찍어 내고 있는 건 사실이다.
“……하아.”
어수선한 인쇄소의 풍경을 보며 마를로네는 한숨을 내뱉었다.
“뭘까요? 황제 폐하 생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네요. 글도 모르는 사람이 천진데 인쇄소에서 일하라니.”
깨끗한 모습으로 숯검정 하나 묻히지 않은 마를로네와 달리 베르크 란은 온 얼굴에 검게 변할 정도로 치열하게 식자공이라는 경험해 보지 않은 일에 매진하고 있었다.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
베르크 란은 큰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인쇄라는 생소한 사역을 떠맡기 전의 일이었다.
“그대들을 복권하는 건 시간이 필요할 거 같소.”
황제 루페르트가 개인적으로 베르크 란을 불렀다.
“당신이 원하는 게 장군직인지, 아니면 도펠죌트너의 복권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후자라고 생각하고 있소. 전자는 쉽지 않겠지만 후자는 시간이 해결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
“…….”
“곧 전쟁이 시작될 거요. 하지만 그 전에, 당신들을 한곳에 모아 관리하고 싶소. 그렇게 해야만 전쟁이 시작됐을 때 그대들이 빠르게 과거의 명성을 되찾을 수 있을 터이니. 그 명성 속에서 어쩌면 그대는 그대가 간절히 원하는 걸 얻을 수도 있겠지.”
황제가 도펠죌트너의 복권을 사실상 약속했다.
‘전쟁.’
그에게서 떼놓을 수 없는 속성.
그 전쟁이 일어난다면, 그 전쟁에서 활약할 수 있다면 베르크 란의 전우들은 붉은 명찰을 떼어내고 과거처럼 당당하게 제국을 지키는 검으로 대접받을 수 있으리라.
그에 비하면 장군직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
베르크 란은 직인의 호통을 받으며 서툰 손놀림으로 인쇄소에서 일하는 그의 동포들을 깊은 눈동자에 담았다.
곧 전쟁이 시작될 것이다.
거리의 아이들마저 전쟁이라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레벤호스트가 반기를 들 것이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사람들은 저 카스무어의 하드리아멘디쿠스가 그레나스르 함락시킬 때 레벤호스트가 반기를 일으킬 거라고 수군거렸다.
그레나스가 함락됐다.
세간의 평가와 다르게 그레나스가 함락되고도 2년이 지나도록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국이 안전하다는 건 아니다.
어떻게 보면 전쟁보다 더 무서운 것, 역병의 그늘이 제국의 북부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 * *
“어떤가?”
황제의 사냥꾼 한스 징펠만은 굳은 얼굴로 마치 잠을 자는 것처럼 편안한 얼굴로 굳어 버린 시체들을 내려보았다.
제국 역병 의사가 시체를 살피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틀림없습니다. 신의 회초리입니다.”
한스 징펠만은 반쯤 스러진 채 섬뜩한 고요 속에 잠긴 마을을 슬픈 눈으로 응시했다.
또 하나의 마을이 치명적인 역병 “신의 회초리”에 의해 전멸했다.
여전히 “역병의 주인”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분명 그 역병을 퍼뜨리는 자가 존재하고 실제로 노르드마르크를 돌아다니며 역병을 퍼뜨린다는 증거를 확보했지만, 역병을 퍼뜨린 주인의 행방은 너무나도 묘연하여 타고난 사냥꾼인 한스 징펠만조차 단서를 찾을 수 없었다.
“…….”
역병의 주인을 처치하라.
황제 루페르트에게 직접 명을 받은 지 거의 3년이 다 되어 간다.
무려 3년을 투자했는데도 아무런 성과를 내지 못했다.
벌을 받는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애당초 관직이나 화려한 건 한스 징펠만의 성미에 맡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자신을 믿어 주고 이끌어 준 황제를 배신하는 건 죽음보다 더한 형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한스 징펠만의 뒤엔 어느새 성인으로 자라난 쌍둥이가 그림자처럼 그의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루와 기.
둘은 여전히 한스 징펠만의 도제를 맡고 있다.
이번 일이 끝나면 불과 철의 형제단의 본부에서 정식 사냥꾼의 시련을 받게 하여 한 명의 어엿한 형제단의 일원으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그 일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안하구나.”
좀처럼 도제들에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사과했다.
쌍둥이 도제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들의 마스터를 보았다.
“아닙니다. 마이스터예거.”
둘은 언제나처럼 동시에 말했다.
한스 징펠만은 훌쩍 늙어 버린 얼굴로 도제들을 보았다.
그가 늙은 만큼 도제들은 어엿하게 자라났다.
자식 관계는 아니라지만 그들의 성장은 한스 징펠만에게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안겨다 주었다.
“…….”
착잡한 심정으로 사냥꾼의 막사에 발걸음을 옮겼다.
막사 입구엔 황실 수렵단 소속의 사냥꾼 하나가 한스 징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한스 징펠만을 보자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그가 가지고 온 은밀한 소식을 전달했다.
“뭐라고?”
한스 징펠만이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럴 법도 하다.
황실 사냥꾼이 가지고 온 소식이란 불쾌할 수밖에 없는 인물을 포함하고 있었다.
“강령술사가…… 역병을 퍼뜨리는 자를 봤다, 이 말인가?”
현재 노르드마르크엔 렌타이어마르크에서 올라온 강령술사-망자의 목동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다.
역병으로 워낙에 많은 마을이 죽어 나가자 그 사라진 마을을 단체로 매장하기 위해 강령술사들이 시체 냄새를 맡은 까마귀처럼 몰려든 것이다.
여느 제국 사람이 그러하듯 한스 징펠만 또한 강령술사를 뼛속부터 혐오했다.
그런데 그 망자의 목동 하나가 귀중한 정보를 알고 있단다.
“…….”
과거라면 결코 만나지 않았을 것이다.
한스 징펠만은 확실히 선을 긋는 사람이다.
그 선의 기준이 그다지 높다고 할 순 없지만, 그 선에 미달하는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무려 3년간 황제의 명을 달성하기는커녕 달성할 실마리조차 찾지 못했다.
“……망자의 목동에게 안내해라.”
지금 한스 징펠만은 악마의 손이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다.
강령술사 정도라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느 강령술사처럼 그 망자의 목동 또한 음산하고 켜켜이 쌓인 시체의 냄새를 진하게 풍겼고, 적당히 늙고 적당히 찌든 용모를 하고 있었다.
“사슴이었습니다.”
서슬 퍼런 사냥꾼들이 노려보는 가운데 망자의 목동이 흐리멍덩한 목소리로 말했다.
“틀림없습니다. 그건 사슴이었습니다. 그런데, 썩어 가는 사슴이었죠. 몸통은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갈가리 찢겼고 눈알 하나가 빠져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습니다……. 시체보다 더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숲속을 거닐었죠. 그런데 그건 발굽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더군요!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는 소리지요! 그 형언할 길이 없는 존재가 우리에게 침을 뱉고 문전박대하던 마을로 가는 걸 보았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후, 우리는 그 마을의 시체를 치우라는 명을 받았지요…….”
사냥꾼들은 그 의견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한스 징펠만은 달랐다.
3년이 넘는 실패 속에서 그는 작은 지푸라기라도 잡길 원했다.
“그 사슴이 어디에 있는지 내게 말해 줄 수 있나?”
이에 강령술사는 두려운 얼굴로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낮게 귀띔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것은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어두운 숲속을 걷고 있노라면 느껴집니다. 산 자를 찾아다니고, 저주하는 죽은 사슴의 흐느낌이 말이지요.”
“사슴이라…….”
한스 징펠만은 자신이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그의 진정한 신앙을 떠올렸다.
사냥의 여신 다르타니아.
이제는 호라 교단 만신전의 구석에 밀려난 그 죽은 신은 사슴의 모습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