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40. 지옥의 4개월 (8)
지하 수로를 통해 빠져나갔다.
출구를 지키던 병사가 몇 있었지만, 베르크 란이 검을 번득이는 것만으로 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도륙당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전보다 더 강해진 거 같은데?’
안 그래도 강한 사람이 더 강해지다니.
낙센과 달리 이 인간에겐 도저히 검을 섞는다는 상상조차 들지 않았다.
그 강력한 베르크 란의 인도 아래 루페르트 일행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도시의 뒤편에도 포위망이 있었지만, 경계는 허술했다.
먼 곳에서 루페르트는 불타오르는 그레나스의 모습을 보며 그동안 있었던 길고 지루했고 지옥 같았던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는 걸 체감했다.
‘도시의 사람은 어떻게 됐을까.’
루페르트가 의문을, 베르크 란이 질문을 듣지도 않고 답했다.
“병사의 고삐가 풀렸군요. 도시의 사람은 대부분 죽겠지요.”
베르크 란은 품에 안은 마를로네를 움푹 팬 눈으로 가만히 노려보았다.
“조금만 참으렴. 마리. 곧 의사에게 데려갈 테니.”
불타오르는 도시를 향해 포위망을 형성했던 카스무어군이 참호와 능보를 나서 몰려들고 있었다.
몰려들 수밖에 없다.
도시의 불길 속에서 그들이 맡은 냄새는 고통받는 시민의 사정이 아닌, 향긋한 약탈의 기회였으니.
그 혼란 속에서 루페르트 일행은 어렵지 않게 하드리아멘디쿠스의 포위망을 지나 저지대 연방의 영역으로 향할 수 있었다.
장장 11개월을 끌었던 그레나스를 둘러싼 공방전은 도시 전체의 파멸이라는 최악의 결과로 끝맺음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그레나스는 그 소임을 다했다.
포위당한 지 10개월 만에 연방 의장 야스퍼가 이끄는 연방군이 카스무어 왕국이 장악한 요충지를 장악했고 전쟁의 무게중심을 돌려놓았다.
그걸로 전쟁이 끝났다면 연방은 굳이 그들의 전쟁을 대륙 전체에 지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스무어 왕국군은 그레나스를 철저히 파괴했고 야스퍼의 이복동생인 시장과 그가 임명한 사령관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사람을 학살했다.
그 행동에 대가는 피의 복수다.
어쩔 수 없이 야스퍼는 확전을 선언해야 했고, 전쟁의 불길은 이제 제국으로 옮겨붙으려 했다.
확전을 원하는 레벤호스트가 그 기회를 마다할 리 없었다.
곧 내전이 일어날 것이다.
회귀는 선택이 아닌 필수다.
“……잘하고 있었나? 문어?”
피골이 상접한 얼굴로 루페르트는 궁으로 돌아왔다.
잘하고 있다는 건 테타우로 향하는 와중에서도 익히 들었다.
문어는 루페르트가 가장 어려워하는 군주 간의 까다로운 권한 해석을 매끄럽게 해결했고, 매년 있는 제국의 밤 행사에서 군주들에게 세련된 의견과 관점을 피력함으로 제국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무엇보다 그는 울피아나라는 폭탄을 1년 동안 옆에 데리고 있으면서도 어떠한 문제도 일으키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나 혹은 평판적으로나.
정적에게 흠잡을 만한 일을 단 하나도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잘 안다.
황궁이라는 밀림 속에 얼마나 많은 뱀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그 뱀들을 밟지 않고 밀림을 걸어 나가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 어려운 일을 문어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냈다.
‘대체 이 문어의 정체는 뭐지? 왜 저렇게 잘하는 거지?’
여신은 문어를 아티팩트로 취급했지만, 루페르트는 알고 있다.
이 문어는 자신과 비슷한 하나의 인격체라는 걸.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사람 비슷한 무언가라는 걸.
“넌 대체 정체가 뭐냐?”
루페르트가 문어에게 정색하며 물었다.
문어는 코웃음을 치며 답했다.
“시간이 답을 줄 텐데 굳이 서둘러 확인할 필요가 있겠나? 촌놈?”
“촌놈이라니. 촌놈은 맞지만 하켄하임 정도면 그래도 아주 촌놈은 아닐 텐데.”
“네 고향이 하켄하임인가?”
“그렇다.”
“……그래?”
문어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흘리며 마치 액체처럼 흘러내리며 문어의 형상을 갖췄다.
“그럼, 필요할 때 언제든 나를 불러주게.”
문어는 루페르트의 팔에 휘감겨오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췄다.
다시 황제라는 자리를 되찾은 루페르트는 황궁의 목욕탕에서 오랜 여정의 묵은 때를 벗겨 냈다.
사치스럽고 화려한 욕탕의 풍경을 보며 루페르트는 문득 마를로네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여기에 한번 와 보고 싶다고 했었지.”
그 마를로네는 지금 죽어 가고 있다.
간신히 테타우에 도착했지만, 전장의 상처는 결국 그녀의 목숨을 앗아 갈 기세다.
탕에서 나선 후 루페르트는 자신의 총신들을 소집했다.
“베르크 란에게 장군 직위를 주려 한다.”
황제는 다짜고짜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예상치 못한 황제의 요구에 총신들은 저마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들의 반응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반대, 완곡한 반대, 혹은 침묵.
“안 된다는 말만을 하지 말고 대안을 말하도록.”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유는 안다.
제국의 부조리할 정도로 고착화된 신분과 편견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갖는지.
황제의 적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는 사안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처음 그 질문을 던졌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다른 이들이 깨끗하고 화려한 거리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보내는 동안 1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파멸하는 지옥에 있었다.
“아무도 없나. 내가 원하는 답변을 해 주는 이는.”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새로운 인재를 찾아야 할 시간이 아닌가 하는.
이 세 명의 총신은 결국 안젤리나의 선물이다.
자신이 직접 선택하고 고른 자들이 아니다.
이들의 능력이 탁월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겠지만, 황제의 아래에서 일하는 사람은 황제와 비슷한 색채를 가져야 한다.
실망을 감추지 않고 돌아서려는 찰나, 한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가 장군직을 얻으려는 이유는 결국 도펠죌트너의 복권을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가장 영민하면서도 믿을 수 없는 남자, 요하네스다.
황제의 시선이 야심 찬 젊은이의 얼굴에 머물렀다.
다른 두 총신의 시기 어린, 혹은 경계가 어린 시선을 받으며 요하네스가 입을 열었다.
“도펠죌트너의 복권은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하지만 굳이 복권을 하지 않더라도 사실상 그들에게 과거의 영광의 편린이나마 쥐여 주는 방법은 있지요.”
“그게 뭔가?”
“길드를 만드는 건 어떨까요? 도펠죌트너의, 과거 전쟁 노병들의 길드를. 베르크 란을 그 길드의 장으로 임명하게 합시다. 어차피, 도펠죌트너가 각지에 흩어져 범죄나 골치 아픈 일을 일으키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 그들을 한곳에 모아 감시한다는 명목으로 황궁에 모아 놓고 나름의 대접을 해 주는 것이지요.”
“호오. 길드라…….”
이제는 서서히 잊히는 개념.
그러나 그 울림엔 거부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
루페르트는 요하네스에게 내일을 기약하고 황궁의 병실로 향했다.
병실엔 마를로네가 있다.
천신만고 끝에 테타우에 도착했지만 죽음이 그녀를 감싸 안으려 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몸소 그녀를 찾았다.
황제가 아닌, 류크의 얼굴로.
병상 위엔 죽어 가는 마를로네가 누워 있었고 그 옆은 무표정한 얼굴로 베르크 란이 지키고 서 있었다.
루페르트가 오자 베르크 란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루페르트가 마를로네 옆에 앉자 마를로네는 루페르트의 기척을 느끼고 초췌한 고개를 돌렸다.
“하하…….”
그녀가 웃었다.
“역시 상냥하시네요. 류크 님은.”
“……글쎄. 걱정이 돼서 왔을 뿐이야.”
“그게 상냥하다는 거죠. 안타깝게도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네요. 그래도, 괜찮은 여정 같았어요. 끝은 좋지 않았지만.”
마를로네가 억지로 웃음 지었다.
“전에 한 말은 잊어 주세요.”
“무슨 말?”
“결혼 운운한 거요.”
“아.”
“당신이 상냥해서 해 본 말이랍니다. 딱히 당신을 좋아한다는 감정은 없었어요…….”
“그래?”
“그런 끔찍한 곳에서는 누구나 평소 하지 않던 짓을 하기 마련이니까요.”
마를로네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멀리, 병실의 입구 쪽에 서 있는 자신의 조부를 응시했다.
“……할아버지를 잘 부탁해요. 이번에 공을 세웠잖아요? 황제 폐하에게 잘 말씀해 주세요. 우리가 거기서 얼마나 많은 고생을 했고 얼마나 많은 죽음을 봤으며, 얼마나 많은 비극 속에서 살아남았는지.”
“……굳이 황제에게 전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마를로네를 지켜보던 루페르트의 얼굴의 안개가 거짓말처럼 걷혔다.
안개 가면의 권능이 해제됐다.
“다, 당신은?”
마를로네가 죽어 가는 와중에도 놀라움을 담아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화, 황제 폐하?!”
“……그래. 너의 황제란다.”
사실을 말해 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 그녀의 조부는 그럴 자격이 있다.
어차피, 이번 시간 축은 되돌릴 생각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겹겹이 쌓은 인연과 함께 보낸 시간이 루페르트에게 진실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당신이 왜……?”
놀라움 속에서도 생명의 빛을 급격히 잃어 가는 마를로네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루페르트는 쓸쓸히 미소 지었다.
“걱정 마라. 다음에 네가 죽는 일은 없게 할 테니.”
“다음.”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다음이라는 말을 입 밖에 냈다.
기이한 일이다.
이제 다음은 없을 터인데.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자에게 어찌 다음이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는 다음이라는 말에 강한 끌림을 느꼈다.
“다음…….”
죽어 가는 마를로네를 뒤로하고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에게 다가갔다.
“베르크 란!”
루페르트가 그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고 서 있던 베르크 란이 비로소 루페르트를 보았고, 곧 그 이글거리는 눈동자에 강렬한 의문부호를 떠올린 채 뚫어지게 응시했다.
“황제?!”
놀라워하는 베르크 란을 보며 루페르트가 똑똑히 말했다.
“슬퍼하지 마세요! 당신의 공로는 반드시 보답을 받게 될 터이니!”
베르크 란의 놀란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었다.
황제의 양 볼이 힘차게 부풀어 올랐다.
부우우우우우---
회귀의 물결이 다시 한번 모든 걸 덮었다
절망과 아쉬움이 아닌, 희망의 빛을 담고서.
* * *
“일곱 남작을 찾아와라. 그들에게 그레나스를 맡겨라. 부족한 돈은, 글쎄. 상회에서 빌리든가 해야겠지. 리히트보덴을 저당 잡히면 될 거 같군.”
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루페르트는 불가능한 과제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발견했다.
조금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는 모든 미래와 경우의 수를 알고 있으니.
쉽고 편한 가르침은 아니었다.
매일매일 죽음과 비극을 마주하며 현실의 지옥 속에서 살아야 했다.
루페르트는 일곱 남작을 그레나스에 파견했다.
자신과 마를로네 일행이 가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사족이니까.
하드리아멘디쿠스가 그레나스를 포위한 지 10개월이 흘렀을 때 루페르트는 특사를 보내 저지대 연방과 카스무어 왕국에게 중재안을 제시했다.
저지대 연방이 그레나스를 넘겨주는 조건으로 현재의 영토를 유지한 채 휴전에 임하는 안이었다.
시의적절한 중재였다.
저지대 연방은 더 이상의 추가 공세를 할 능력이 없었고 카스무어 왕국 또한 그레나스 공성에 국력의 상당 부분을 기울였다.
공성군을 이끄는 하드리아멘디쿠스는 한 달 안으로 그레나스의 함락을 자신하며 휴전안을 거부했지만, 그 한 달이라는 시간 또한 카스무어 왕 입장에서는 확신할 수 없는 것이고 무엇보다 그 시간조차도 돈이다.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자금을 아낄 수 있다는 소리다.
황제의 은밀한 중재안에 따라 전쟁 중인 두 나라가 일시 휴전에 합의했다.
전쟁의 불길은 저지대 밖으로 퍼지지 않았다.
기어코 일어날 운명의 내전을 피해 낸 것이다.
“……후.”
왕좌 위에서 루페르트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진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레나스라는 포위된 도시에 있었던 수많은 나날이 허공 위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해냈다. 드디어 해냈어.’
루페르트도 알고 있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위업을 이루어 냈는지.
회귀 이래로 최대의 성공이다.
그러나 그 성공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으며 그 과정에 황제가 얼마만큼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아는 사람 또한 아무도 없다.
그저 홀로 외롭고, 소리 없이, 경비병과 시종만이 있는 텅 빈 알현실에서 루페르트는 속으로 쓸쓸히 자신의 성공을 축하해야 했다.
“…….”
고독하다.
하지만 그 또한 황제의 아니, 수레바퀴에 올라선 자의 숙명이라고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 달리 아무도 그의 활약을 몰라 주는 건 아니었다.
살짝 열린 알현실의 문 앞에 금발의 여성이 몸을 숨긴 채 홀로 앉은 루페르트를 조심스럽게 훔쳐보고 있었다.
목에 건 기묘한 목걸이를 만지작거리며 마를로네는 죽어 가던 자신과 그 앞에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던 젊은 황제를 떠올렸다.
“……꿈은 아닌 거 같아.”
회귀의 장막이 벗겨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