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78화 (178/225)

178화 40. 지옥의 4개월 (7)

제국 서고의 하급 사서 페르디난트 알텐보흐가 최근에 맡은 임무는 룸 제국 멸망기의 인명록을 확인하는 것이다.

정확히는 제국의 건국자 티그리트가 검투사로 활동하던 시절과 동시대를 살아 간 사람 중 일부.

비챈자드, 포르피리우스 같은 룸 제국의 집정관에서부터 비달이나 우줄두스 같은 투기장에서 죽어 간 이름 없는 검투사까지.

황제가 직접 과제를 주었다.

정확히는 현상금을 걸었다.

그 이름을 찾아내고 그 사람들의 행적이 기록된 서적을 찾는 사람에겐 두당 1만 탈러에 달하는 거금을 내리겠다고.

황궁 도서관이라는 지식의 보고에서 활동하는 걸 평생의 목적으로 여기고 수많은 책벌레들이 사서에 지원하지만 사서의 삶이란 책 이외엔 궁핍하고 별 볼 일 없는 삶이다.

만성적인 가난은 테타우에서 작고 냄새나는 셋방을 얻는 데 불과하고 깨끗한 물을 마실 수도 없다.

책이 좋아서 그러한 어려움을 버티지만 눈앞에 돈을 벌 기회가, 그것도 좋아하는 책을 통해 거금을 쥘 기회가 생기는데 마다할 사서가 어디 있겠는가.

페르디난트 알텐보흐는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시대가 바로 티그리트의 시대이기 때문이다.

티그리트의 건국 신화에 매료된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만, 페르디난트는 달랐다.

그는 티그리트의 신화적이고 허무맹랑한 전설로 가득 찬 건국기보다는 멸망하는 룸 제국에 더 강한 매력을 느끼고 이에 탐닉했다.

그 어린 시절부터의 학구열은 그에게 남들보다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고, 이제 그 결실을 맞이하려 한다.

페르디난트에게 1만 탈러를 쥐여줄 자료는 룸 제국 투기장에 대한 기록도 아니고 티그리트에 관한 기록은 더더욱 아니었다.

페르디난트가 찾아낸 건 룸 제국의 수사관-아르도 데므리우스의 요주의 인물 기록이라는 조금은 생뚱맞은 자료였다.

그 자료에서 페르디난트는 자신보다 지위가 높고 학식이 높은 역사학 교수조차 찾지 못했던 흑인 비달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아르도 데므리우스의 수사 기록은 무미건조하고 축약을 좋아하는 평균적인 룸인과 달리 문학적인 소양을 듬뿍 넣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체로 범죄자들을 재구성했다.

성명: 비달(성은 없음)

연령: 24세

민족: 기니에족(툼북타 이남의 흑인 종족)

용모: 나이보다 들어 보이는 완고하고 공업제품 같은 풍모

출신: 툼북타

역사: 불사자의 땅 이남, 부글부글 끓는 정글 너머에서 온 총명한 흑인으로 대경기장의 검투 노예다. 그는 고대 룸어와 미네아어를 해독할 수 있을 정도로 높은 지식을 가졌고 점잖은 사람이나, 운이 나빠 에피미논클레아스 같은 악종과 벗이 되어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 에피미논클레아스와 함께 검투 노예의 반란을 은밀히 획책하던 그는 자신이 죽이려던 티그리트에게 살해당했다.

“비달.”

아마 이게 처음일 것이다.

황제가 직접 찾던 검투사-흑인 비달의 기록을 찾은 건.

지긋지긋한 셋방과 더러운 물에서 자신을 해방해 줄 1만 탈러가 바로 앞에서 손짓하는 듯하다.

페르디난트 알텐보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해력이 뛰어난 그는 황제가 진정으로 찾는 게 비달이 아닌, 비달과 엮인 자, 즉 우줄두스 같은 검투사라는 걸 어렵지 않게 깨달았다.

우줄두스는 그다지 흥미로운 인물은 아니다.

평범한 노예로 평범하게 살다 평범하게 죽었다.

황제가 진정으로 원하는 건 다른 인물일 것이다.

에피미논클레아스라는 미네아식 이름은 페르디난트의 가슴을 터뜨릴 정도의 동요를 일으켰다.

‘어쩌면 이 인간이?’

단순히 1만 탈러만은 아니리라.

그 사내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황제는 1만 탈러 이상의 지위, 어쩌면 이 도서관의 상급 서기, 나아가 도서관장의 자리까지 줄지도 모른다.

평생 마음껏 원하는 책을 읽으면서, 황금 박차를 단 장화를 신고 도서관장이라는 존칭을 들으며 여생을 살 수 있는 길이 활짝 열렸다는 이야기다.

뛰는 가슴을 안고 페르디난트는 에피미논클레아스라는 인간의 기록을 살폈다.

“음?”

기이하다.

아니, 인간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 악마와 같은 검투사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성명: 트릭수스 “카포포루스” 에피미논클레아스

연령: 18세

민족: 미네아 - 크리티아인

용모: 잘생기고 오만한 용모, 나체로 다니는 걸 즐김

출신: 아데네스

역사: 미네아 투기장의 챔피언. 제국과 달리 미네아인들은 검과 창 대신 투창이나 원반, 심지어 판크라이톤이라 불리는 사람의 이만을 사용하는 끔찍한 투기를 즐기는데, 이 오만하고 잘생긴 미네아인은 그러한 원시적 투기의 챔피언이다. 그는 새 흥행주의 명에 따라 전 흥행주의 아내를 강간했고 그 몸종을 강간해서 죽였다. 전 흥행주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흥행주는 8시간 동안 살려 둔 채 고문하여 죽였다. 그 타고난 악마는 사람의비명을 노래로 여기고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며 최대의 웃음을 터뜨린다.

그는 투기장의 야수 사냥꾼으로 단순히 야수를 사냥하는 것만이 아닌, 야수를 식인 동물로 육성하는 특별한 재주를 갖고 있다. 한 야수를 식인 동물로 육성하기 위해 그는 아이와 여성, 팔을 부러뜨린 노예를 차례차례 던져 주며 야수가 인간을 쉬운 사냥감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 인간 말종은 저 불멸의 챔피언 티그리트를 죽이기 일보 직전까지 갔으나, 티그리트의 몸에서 뿜어나온 알 수 없는 광휘 속에서-마치 달팽이에게 뜯어먹히는 풀처럼 잘근잘근 씹히며 처절한 비명을 지르다 죽었다고 한다.

비고: 그의 범죄 기록은 별표를 참조할 것.

“트릭수스 에피미논클레아스라…….”

끔찍한 인간이다.

잔학성과 포악함으로 악명 높은 룸 제국인마저 서슴없이 인간 말종이라고 부를 정도의 악인이다.

순수한 악 그 자체였다.

그가 저지른 범죄는 차마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서리쳐질 정도로 잔혹했다.

특히 야수를 사용한 그의 잔혹 행각은 차마 눈으로 읽어 나갈 수 없을 정도였다.

“……정녕 인간이길 한 건가.”

그 인간과 쌍둥이처럼 닮은 사람이 이 세상을 활보하고 있다.

그는 그레나스에 있다.

* * *

좁은 골목을 뱀처럼 긴 몸을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할버드라는 장병기로 무시무시한 공격을 가해 오는 거인병을 보며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한 마리 야수를 떠올렸다.

그 야수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거대한 뱀이었다.

길이만 10미터를 가볍게 넘어 사람은 물론 황소조차 한입에 삼킬 수 있고 사람을 물어 그 길고 거대한 몸으로 꽁꽁 묶어 온몸의 뼈를 으스러뜨리는 무시무시한 야수였다.

루페르트는 그러한 뱀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심지어 책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이 생사를 가르는 좁은 처형장 안에서 루페르트는 오싹할 정도로 명료하게 한 마리 뱀을 떠올렸다.

‘이 느낌은 대체?!’

낙센이 할버드를 찔러 온다.

우월한 사거리와 속도로 찔러 오는 그 일격은 막기는커녕 피하는 것조차 급급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그러나 한 마리 뱀을 떠올린 이후 루페르트의 눈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였다.

어떻게 저 쉭쉭거리는 뱀의 머리처럼 찔러 오는 할버드를 피해 낼 수 있을지.

그대로 회귀의 소라고둥을 부는 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건만, 루페르트는 맞서기로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진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만용인지 아니면 착각인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 루페르트는 대담하게 찔러 들어오는 할버드를 노려보며 멈춰 섰다.

슈욱-!

할버드의 창날이 심장을 향해 그대로 찔러 들어오는 순간 루페르트는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

날개가 있을 리 만무하지만 좁은 두 벽을 타고 인간의 다리로는 불가능한 높이까지 한 번에 뛰어오른 것이다.

하아!

숨소리가 크게 들린다.

심장의 고동 동안 찰나의 부유 속에서 더욱 또렷하게 들려온다.

그리고 보인다.

자신의 발아래서 일그러진 얼굴로 이쪽을 올려다보는 거인의 낭패한 얼굴이.

‘죽여 버릴까?’

순간 자신의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학적인 충동이 루페르트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꿈틀거렸다.

그러나 그 살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뒤이어 일어난 객관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살의를 깔끔하게 지워 버렸기 때문이다.

대신 루페르트는 물에 젖은 기병용 피스톨을 꺼내 낙센을 겨누었다.

한번 마를로네에게 호되게 당할 뻔한 거인병은 마치 뱀과 같은 움직임으로 뒤로 물러나 거리를 벌렸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피스톨을 낙센에게 던지며 그대로 벽면을 타고 미끄러지듯이 바닥에 착지한 루페르트는 쓰러진 마를로네를 일으켜 뒤로 달아났다.

“제국 놈!”

성난 낙센이 뒤따라오는 게 느껴진다.

여유는 있다.

루페르트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눈 부신 빛의 영역을 향해 질주했다.

할버드가 루페르트의 등을 노리고 찔러 들어오지만 루페르트는 이미 마를로네와 함께 골목을 벗어난 이후였다.

“이 벌레가!”

낙센이 분노하며 골목 밖으로 뛰쳐나왔다.

살기등등하던 거인병의 얼굴은 그러나, 곧 나쁜 짓을 하다 엄한 스승에게 들킨 아이 같은 표정을 지었다.

“…….”

베르크 란이 서 있다.

한 손에 검을 쥔 채, 마치 사신과 같은 모습으로.

베르크 란에 서린 분노가 평소보다 더 가열 찬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걸 보고 낙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오해다. 베르크 란. 명예로운 부르봉인이여.”

베르크 란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낙센을 향해 걸어갔다.

낙센이 눈동자를 굴리다가 종탑 위를 보았다.

종탑 위에 숨어 있던 매잡이 프리츠가 그 모습을 보고 총을 겨누었다.

탕!

오랜 조준도 없이 붉은 투구를 쓴 살인자가 총탄을 베르크 란의 뒤통수를 향해 날려 보냈다.

순간 베르크 란의 팔이 잠깐 흔들렸다.

챙캉!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탄환이 튕겨 나갔다.

단 한 번의 휘두름에.

낙센의 얼굴에 파랗게 질렸다.

‘이, 이 부르봉 애송이! 뒤도 안 돌아보고 총탄을 튕겨 내?! 괴물인가?! 이놈은?!’

그 베르크 란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거인병을 올려다보았다.

낙센은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걸 알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250년 전, 저지대 연방의 독립 전쟁에서 무수히 많은 제국인과 카스무어인을 짚단처럼 베어 넘긴 할버드가 베르크 란을 토막 낼 기세로 날아갔다.

베르크 란의 검이 움직였다.

검이 창대를 막았다.

두 손을 쓴 것도 아니다.

단지 한 손만으로 거인병의 모든 걸 담은 공격이 막혔다.

낙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가 뒷걸음질 치며 비굴하게 말했다.

“그대와 나는 함께 싸운 전우 아니었나? 작은 오해가…….”

베르크 란이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낙센은 자신의 운명을 예상했다.

스걱-

허망하고 신기루 같고 부질없는 삶이었다.

거인병의 참수 당한 목이 하늘 위로 솟구쳤다.

베르크 란은 목을 잃은 채 부들거리는 거인병의 시체를 뒤로하고 루페르트와 마를로네를 바라보았다.

분노에 이글거리던 눈이 루페르트를 담았다.

“당신이 구해 준 거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모릅니까?”

베르크 란이 마를로네의 상태를 살피려 들었다.

루페르트는 기꺼이 미약한 숨을 내쉬는 마를로네를 내어 주었으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성난 카스무어의 병사들이 수비대를 죽이고 시청으로 난입하며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창으로 찔러 죽이고 있었다.

시장과 얀한데가 목숨을 간청했으나, 연대장의 죽음에 눈이 뒤집힌 병사들에게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전쟁의 진정한 주인은 왕도, 군주도, 장군도 아닌 병사들이다.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이 한 말을 뼈저리게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일단, 빠져나갑시다.”

베르크 란이 앞장섰다.

그의 드넓고 강인한 등을 보며 루페르트는 확신했다.

그가 여기서 죽을 일은 만에 하나 없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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