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40. 지옥의 4개월 (6)
“류크 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다급히 소리쳤다.
“아래로 가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를로네가 한 팔로 루페르트를 잡아끌며 옥상에서 뛰어내렸다.
아래에 소방용으로 마련한 더러운 물구덩이가 있었다.
먼저 물 밖으로 고개를 내민 건 마를로네였다.
뒤이어 루페르트가 고개를 내밀었다.
“너무 과격한 거 아니야?”
마를로네와 함께 물구덩이에서 기어오르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다른 방법이 없잖아요? 저 거인. 엄청 강한걸요.”
낙센이 옥상에서 둘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청 안으로 들어가요!”
골목만 돌면 바로 시청 쪽이다.
갑자기 출구 쪽에서 붉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마를로네는 즉시 헝겊을 꺼내 코를 막으며 루페르트를 뒤로 잡아끌었다.
“동료가 있나 봐요. 돌아가요.”
마를로네가 앞장섰다.
루페르트는 품속에 있던 권총을 꺼냈으나 물에 젖은 걸 보고 다시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 거인이 왜 우리를 공격하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 거인이 저를 아주 싫어하는 건 확실해요.”
“왜 싫어할까?”
“글쎄요.”
순간 마를로네의 눈앞에 한 소년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분명 본 기억이 있고 함께 대화를 나눴으며 소년이 눈물을 흘리는 걸 위로한 적도 있다.
그러나, 다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런 적은 없다.
소년병 몇 명을 보긴 했지만 그게 전부.
소년병과 말을 섞은 적도 없었다.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위로 같은 건 있을 수도 없는 일.
‘뭐지? 왜 자꾸 헛것이 떠오르는 걸까?’
마를로네는 그 기이한 환각이 연유도 모른 채 자신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찬 이후부터 일어나는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설마 이 목걸이가?’
건물의 뒤편에 다가왔다.
공터다.
시청 쪽 벽은 막혀 있고 반대편 벽은 막사에 막혀 있다.
마를로네는 주변을 살폈다.
매복이나 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바깥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이쪽을 노린 게 아니다.
바깥의 것이다.
잠시 후, 광장 쪽에서 여러 명이 일제히 내지르는 고함이 울려 퍼졌다.
“뭐라고 하는 거지?”
루페르트가 고함을 알아들으려 했지만 이해 불능이다.
아마 카스무어 왕국의 언어로 보인다.
루페르트는 제국어와 룸어 이외에 다른 언어의 소양은 없다.
애당초 룸어 하나를 익히는 것만으로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니.
하지만 조부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한 마를로네는 광장에서 들려오는 언어를 어느 정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연대장이 당했다는데요?”
“연대장?”
“아마, 카스무어 왕국 쪽 연대장이 아닐까요?”
마를로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총성이 울리고 고함이 울려 퍼졌다.
동시에 천둥이 치는 소리와 함께 끔찍한 비명이 이번엔 이쪽에서 울려 퍼졌다.
마를로네는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끼며 가볍게 몸을 떨었다.
“……마법사가 마법을 쓴 모양이네요.”
“그런가.”
분명 옥상에서 봤을 땐 전쟁은 끝나는 분위기였다.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시장의 마음이 꺾였고, 얀한데도 이쯤에서 끝내려는 생각이었다.
헨드릭 빌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기회도 주어지지 않았다.
한때 도시 전체를 좌지우지했던 헨드릭 빌렘이 일개 용병 대장이라는 신분을 전쟁의 막바지에 되찾은 것이다.
한 발의 총성이 상황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카스무어 왕국군은 광분했고 온건하게 끝내려던 평화 교섭은 파탄 났다.
“누구야? 누가 총을 쏜 거야! 그것도 연대장을!”
얀한데가 길길이 날뛰며 범인을 찾으려 했지만, 범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애당초 범인은 얀한데의 휘하에 들어간 적이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범인은 종탑의 그늘 아래 숨어 있다.
“……우리 대장도 참 고약한 인간이라니까. 일 년 동안 동고동락한 도시를 이런 식으로 끝장내려는 걸 보면 말이야.”
일곱 남작 중 하나 매잡이 프리츠는 연기가 피어오르는 자신의 총열을 바라보며 음산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 도시의 미래가 보이는군.”
카스무어 왕국군이 복수를 부르짖으며 노도와 같은 공세를 펼쳤다.
시체의 벽 뒤에서 전열을 갖추던 연방군 병사는 마법사가 떨어뜨린 벼락을 맞고 전열에 큰 구멍이 났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끝까지 싸우려 한다.
“놈들을 막아라!”
“연방 만세!”
타타타타탕!
쾅!
총과 대포가 불을 뿜었다.
날카로운 창이 몰려오는 적을 향해 앞으로 창날을 겨누었다.
카스무어 왕국군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총병의 지원도 없이 장창병들이 일제히 질주하며 시체의 벽 너머에 있는 적을 향해 창을 찔러 들어갔다.
창들이 서로의 육체를 꿰뚫고 상처 입히는 가운데 시체의 벽은 그 두께를 더해 간다.
그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거인병이 루페르트와 마를로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왜 우리를 공격하는 거죠?”
마를로네가 물었지만, 낙센은 대답하지 않는다.
그는 다짜고짜 자신의 신장만큼이나 긴 할버드를 휘둘렀다.
마를로네는 자신의 팔로는 도저히 닿지 않을 거리에서 휘둘러 오는 할버드 앞에 물러서기 급급했다.
힘의 차이만이 아니다.
거리 자체가 아예 견적이 나오지 않는다.
휘두르는 힘도 힘이지만 속도와 기술도 최상급.
마를로네는 저 교활한 거인병이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것 같은 할버드가 실은 자신을 벽면에 몰아넣기 위해 교묘하게 자신을 몰아간다는 걸 파악했다.
‘이 거인. 강해!’
하지만 그녀에게도 비장의 무기가 있다.
늘 갖고 다니던 부르봉국 기병대의 단발 피스톨이다.
30년 전의 구식 부싯돌형 피스톨이지만 성능은 탁월하다.
어떤 귀족이 당대의 장인에게 의뢰했고, 뒤이어 한스 징펠만이 마를로네의 피스톨을 개조해 주었다.
그 결과 화력도 명중률도 동시에 반동도 대단히 강한 도펠죌트너용 피스톨이 만들어졌다.
기사의 갑주를 앞면은 물론이고 뒷면마저 한 번에 뚫어 버리는 피스톨의 탄환이라면 저 거인병이라도 별수가 없을 것이다.
인간의 두개골이 아무리 튼튼하다고 해도 강철로 만든 갑주보다는 단단할 순 없는 법이니까.
‘할아버지가 말했어. 아무리 강한 적이라고 해도 승리를 확신하면 방심을 한다고.’
적을 함정에 밀어 넣기 위해 이쪽이 불리함을 감수하는 건 최악의 수라고 베르크 란이 말했다.
도박에 실패하는 순간 이쪽의 패배를 돌이킬 수 없게 될 테니까.
하지만 어떠한 방법으로 이길 수 없다면 그러한 도박도 시도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베르크 란의 말이다.
수많은 사선을 넘은 그의 조언은 마를로네의 가슴 깊숙한 곳에 새겨져 있다.
낙센의 할버드가 춤을 추며 마를로네를 궁지로 몰아갔다.
마를로네는 감히 할버드에 검을 맞댈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피하기 급급한 모습을 보였으나 그녀의 눈은 점점 가까워지는 등 뒤의 벽과 자신과의 거리를 계산했다.
낙센이 할버드를 거칠게 찌르고 들어왔다.
‘지금이야!’
마를로네가 두 눈을 번득이며 자신도 알 수 없는 미지의 힘을 심장에 응축했다.
한 곳에 몰린 기운이 마치 화약처럼 폭발하며 경이적인 기운을 온몸에 흩뿌리는 가운데 마를로네는 벽으로 역으로 뛰어가 그걸 박차고 하늘 위로 도약했다.
마치 한 마리 새처럼 날아오른 그녀는 저 거인병마저 내려볼 정도의 높이에서 피스톨을 꺼냈다.
거인병이 이쪽을 올려다보는 게 보인다.
위를 잡았다.
그리고 승기 또한 잡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총을 격발하려는 찰나였다.
탕-!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다음 순간 마를로네는 누군가가 어깨를 후려치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마를로네!”
아래에 있던 루페르트가 고함쳤다.
총격이다.
누군가 총격을 가했다.
그 범인은 종탑 위에 있었다.
“……낙센 녀석. 실력이 많이 쇠했군. 놈도 늙는 건가.”
매잡이 프리츠가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총기를 겨눈 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던 마를로네는 그대로 지면에 처박혔다.
“마를로네!”
루페르트가 다가서려 하자 낙센의 할버드가 그를 가로막았다.
“꺼져라.”
거인병이 살짝 고개를 옆으로 돌려 살기등등한 푸른 눈을 보이며 으르렁거렸다.
그 기세는 인간 같지 않았다.
인간을 흉내 낸 괴물이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만 같았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오금을 저리겠지만 루페르트에겐 그는 단순한 괴물 한 마리에 불과하다.
“마를로네를 어쩔 셈이지?”
낙센이 마를로네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답했다.
“심장을 먹을 것이다.”
“시, 심장을 먹는다고?”
이에 낙센이 소리 내어 웃었다.
처음이다.
저 괴물이 저렇게 웃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건.
그래서일까.
거인병의 말이 많아졌다.
“도펠죌트너는 죽은 전쟁 신의 피로 만들어진 피조물. 전쟁 신 미르미도스는 죽었지만, 신에게 죽음이란 건 권능의 상실을 의미할 뿐이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이 길고 긴 전쟁은 전쟁 신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축제겠지. 그리고 그 축제의 끝에서 나는 이 계집의 심장을 먹고 전쟁 신이 남긴 몇 남지 않은 권능의 조각을 얻겠다.”
낙센이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운이 좋군.”
“……뭐?”
“보기 드문 진기한 묘기를 보게 될 거야.”
마를로네는 지척에 있다.
그녀는 의식을 잃은 채 미약한 신음만을 흘리고 있었다.
할버드가 그녀의 몸을 뒤집었다.
“나는 인간의 심장을 마치 강낭콩의 껍질에서 콩을 꺼내는 것처럼 단번에 꺼낼 수 있지. 어렵지 않아. 할버드의 도끼날 끝부분을 찌르듯이 몸통의 정중앙에 찔러 넣고…….”
낙센이 만면에 웃음을 띤 표정으로 중얼거리며 할버드의 도끼날 부분을 마를로네의 심장 아래 갖다 대려 할 때였다.
뒤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낙센의 뒤통수를 정통으로 가격했다.
꽤 묵직한 일격이지만 낙센은 눈썹 하나 끔뻑하지 않았다.
대신 천천히 뒤돌아서서 자신에게 돌을 던진 사내를 섬뜩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냐? 제국 벌레.”
돌을 던진 건 루페르트다.
루페르트는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감히 내게 덤비겠다는 건가?”
루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괴물아.”
상대가 안 되는 건 안다.
저 괴물은 너무나 강하다.
상식을 초월한 키와 길이에 속도와 힘까지 겸비했다.
그 육중한 할버드를 마치 채찍처럼 휘두르는 괴물이다.
루페르트는 그 앞에서 단 1초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괴물 앞에 섰다.
참을 수가 없었다.
저 사악한 거인이 마를로네를 눈앞에서 죽이는 걸.
물론 여기서 회귀를 하면 그만이다.
회귀하면 죽기는커녕 태평하게 차를 마시며 농담 따먹기나 하는 여자아이가 이쪽을 빤히 보고 불평을 늘어놓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목숨을, 생명이라는 걸 회귀라는 수단으로 너무 가볍게 취급해 버린다면 결국엔 모든 생명과 인연을 가볍게 취급할 것이라는 섬뜩한 상상이 황제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러한 생명의 경시 끝엔 티그리트라는 또 다른 괴물이 서 있을 것 같다.
그것은 루페르트가 인간으로서 티그리트에게 느끼는 몇 안 되는 공감 중 하나일 것이다.
‘그녀를 구해 낼 수 없다고 하더라도 시늉은 해 보겠다. 일이 뒤틀린다고 나팔을 불어 대는 짓은 이제 하지 않겠다.’
리프니에에게 버림받았을 때부터였을 것이다.
회귀에 의지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싹튼 건.
게다가 수많은 사투와 죽음의 추억이 루페르트에게 용기를 주었다.
가장 큰 자산은 리프니에가 보여 줬던 투기장의 환영일 것이다.
그 죽음의 경기장 안에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또 다른 자질을 발견했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재능이 그의 몸에 숨 쉬는 게 아닌가 하는.
“나는 사람을 제법 끔찍하게 죽이는 법을 알고 있다네.”
낙센이 굽은 등을 펴며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일촉즉발의 상황.
“베르크 란!”
루페르트가 고함을 질렀다.
그 이름을 듣자 낙센이 몸을 움찔거리며 주변을 돌아본다.
그 틈을 타 루페르트는 마를로네 쪽으로 뛰어가 그녀를 부축하고 좁은 골목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 골목은 두 사람이 간신히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았다.
‘이 안이라면 저 괴물도 그 무기를 마음껏 휘두를 수 없겠지.’
마를로네를 발밑에 놓고 루페르트는 검을 들었다.
건물 사이의 비좁은 탐으로 거인병이 눈을 희번덕거리며 마치 뱀처럼 긴 몸을 놀려 다가오는 게 눈에 들어왔다.
“베르크 란!”
재차 이 상황을 해결할 조력자의 이름을 부르며 루페르트는 검을 들었다.
낙센이 할버드를 높이 들어 올려 아래로 내리쳤다.
쿵!
지면이 울리고 돌바닥이 깨질 정도로 강렬한 일격.
파편이 사방에 튐과 동시에 낙센이 할버드의 창부분으로 루페르트를 찔러 들어왔다.
그 순간 루페르트는 느꼈다.
이 좁은 틈새는, 저 전장에서 살아 온 괴물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걸.
오히려 이 피할 길 없는 좁은 영역 자체가 거리라는 최대의 무기를 가진 거인병의 처형장이라는 걸.
슈욱-
피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다가오는 창날을 보며 루페르트는 위기를 감지했다.
‘이대로는 죽는다!’
다음 순간 한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작은 방패와 투창을 든 전사였다.
“……아파? 짐승처럼 울부짖을 정도로 아파? 그런데 어쩌나. 나는 너를 바로 죽이진 않을 텐데. 들리나? 응? 피와 고문을 원하는 인간들의 외침이?”
그 전사는 마치 고슴도치처럼 온몸에 투창이 박힌,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전사를 노려보며 생채기 하나 없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산뜻한 모습으로 전사를 조롱하고 있었다.
날렵한 근육질의 나체에 번들거리는 향유를 바른 그 가학적인 전사는 루페르트와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