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40. 지옥의 4개월 (2)
여신이 과거에 말했던 것처럼 문제를 해결하는 건 황제가 아니다.
황제는 단지 판을 깔아 주고 장기 말을 배치할 뿐, 실제 문제는 처리하는 건 황제가 올려놓은 장기 말이다.
일곱 남작이라는 장기 말을 전장에 투입했다.
평범한 장기 말은 아니다.
과거에 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사랑하는 부하의 원수마저 뒤섞인 의심스러운 집단이다.
아마 회귀 초반의 루페르트였다면 그들을 기용하는 일은 영원히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모든 건 변했다.
시간의 흐름도 루페르트의 마음도.
“놈들이 강을 막았다!”
“머리를 쓰는군. 하지만 우리는 준비를 다 했지.”
“왜 그 인간이 하수도를 정비하라고 했는지 이제는 알 것 같군.”
보통 역사의 변화는 알게 모르게 형태 없이 찾아오는 게 대부분이다.
하지만 이번엔 가시적인 형태로 변화가 나타났다.
이른 새벽 병사들은 보았다.
상류에서 몰려온 급류가 카스무어 왕국군이 만든 댐에 거세게 부딪혀 댐을 박살 내며 막혔던 물줄기를 내달리는 모습을.
그 변화의 중심에 일곱 남작의 수장 헨드릭 빌렘이 서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환호 속에서 일곱 남작의 수장은 침통한 얼굴로 미래를 예언했다.
“……그럼에도 이 도시의 함락은 막을 수 없습니다.”
* * *
댐을 무너뜨린 급류는 전쟁 전 헨드릭 빌렘이 상류의 도시에 부탁해 미리 댐을 만들어 두었고 그들이 물줄기를 막았을 때 댐을 터뜨려 일으킨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 번의, “물의 포위”는 풀었지만, 전장에서 같은 일은 여간하면 두 번 이상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더 크고 더 단단한 댐의 건설을 주문했다.
수많은 자재가 여전히 구교를 믿는 남부 저지대에서 조달했고 제국의 기술자, 심지어 부르봉의 노역자까지 가세해 새로운 댐을 만들었다.
도시 주변은 다시금 메말라 붙었다.
이미 준비를 했기에 도시의 사기가 떨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통렬한 한 방을 먹었음에도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카스무어 왕국군의 움직임은 노련한 병사와 시민의 기를 죽이게 하기에 충분했다.
“일곱 남작이라고 했나.”
하드리아멘디쿠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상대방의 실력을 인정했다.
“헨드릭 빌렘이라는 자의 수완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건 들었지만 이 정도로 유능한 인물인지는 몰랐군.”
그는 주위를, 특히 동석한 카를슈타인 대령 쪽을 강하게 응시했다.
“카를슈타인 대령.”
“네. 각하.”
“내가 알기로 일곱 남작은 제국의 황제이신 루페르트 1세께서 친히 수배령을 내린 범죄자라고 들었는데, 그 정보가 정확합니까?”
장군의 질문은 단순한 사실의 확인이 아니다.
황제가 직접 수배한 범죄자를 저지대 연방이 받아들인 걸 꼬투리 잡아 전쟁의 규모는 카스무어와 저지대 연방 간이 아닌, 제국마저 끌어들이게 할 정도로 확장하려는 왕의 전권을 위임받은 장군 다운 안배가 포함된 질문이다.
‘저지대 연방이 자충수를 둔 것이겠지. 그들이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들이 갈라져 나온 제국 그 자신의 방관이 어찌 보면 가장 큰 원인이니까.’
저지대 연방의 독립에 제국이 관여했다는 의심은 이미 2백 년 전, 저지대 연방의 독립 당시에 여기저기서 거론되던 음모론이다.
지금까지는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이번 전쟁은 부유한 카스무어 왕국으로서도 국가의 운명을 건 도박이다.
병력만 8만 명의 급료만 해도 여간한 나라는 몇 개월도 버티지 못하고 파산할 텐데 거기에 대량의 자재와 기술자의 노임까지 지급해야 한다.
호라를 믿는 나라 중에서 이 정도 공성이 가능한 나라는 제국, 부르봉 그리고 카스무어 정도다.
다른 나라는 그 절반의 절반조차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저지대 연방의 수장인 야스퍼가 그레나스를 구원하는 걸 포기하고 다른 요충지를 찾아 기웃거리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가 구원을 한다고 해 봐야 변하는 것도 없다.
제국군은 그들이 최강의 군대라고 주장하지만, 정작 이 세상에서 최강의 육군으로 취급받는 건 카스무어의 보병대다.
방진을 짠 카스무어의 보병연대 3천 명이 사악한 주술사를 동반한 동방 제국 군대 10만의 공격을 정면으로 받아 낸 건 불과 10년 전의 일이다.
강철의 기율과 전통이 가져다준 상승의 자부심 속에서 그저 약탈의 희망으로 군대에 합류한 동방 제국의 잡병들은 계란처럼 부서졌다.
‘제국이 최강이라는 건, 지나간 시대를 추억하는 자의 망언일 뿐이지. 사실 제국은 이미 오래전부터 무너지는 나라였다. 값비싼 천들을 주섬주섬 모아 만든 누더기라고 할까. 사람들은 철혈대제가 명군이라고 말하지만, 글쎄. 내가 보기엔 이미 죽은 제국이라는 시체를 일으켜 세운 강령술사에 지나지 않아.’
아무튼 그 제국을 움직일 수 있다면 저지대 연방을 굴복은 손쉬운 일이다.
어쩌면 10년 안에 저지대 연방의 모든 영역에 카스무어 왕실의 깃발이 휘날릴지도 모를 일이다.
“대령. 어떻게 됐습니까?”
“그게, 말입니다.”
카를슈타인이 이류, 아니 삼류밖에 안 되는 군인이라는 건 처음 볼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열심히는 하는 것 같은데 머리가 나쁘다.
어떤 사실을 봐도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 대충 이해한 걸 무려 황제에게 보내는 보고서에 적어 넣는 걸 보면 말이다.
“대령.”
장군이 은근한 짜증을 담아 물었다.
그제서야 카를슈타인이 답했다.
“아, 그게 말입니다. 각하. 제가 알아본 결과, 일곱 남작에 대한 수배령은 공교롭게도 장군께서 그레나스를 향해 진군하기 얼마 전에 철회됐다고 하더군요.”
“그래요?”
하드리아멘디쿠스는 코웃음을 쳤다.
‘이제 스물하나, 둘이라고 했나. 머리가 좋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일곱 남작을 끌어들인 게 황제는 아니겠지?’
그건 아닐 것이다.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다.
그레나스의 함락이 현재 황제의 치세에 중대한 계기가 되는 건 맞겠지만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처신의 폭이라는 건 있는 것이다.
아무리 자신의 치세를 위해서라고 하지만 최우방인 카스무어 왕국과 척을 지겠다?
그건 하나를 얻자고 열, 아니 모든 걸 잃는 짓이다.
‘나중에 차차 조사하면 될 일이고, 일단은 저 일곱 남작의 도시를 떨어뜨리는 게 우선이겠지.’
하드리아멘디쿠스는 참모들을 불러 새로운 작전 명령을 하달했다.
장군이 명하자 부하 장군과 연대장들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자신의 자리로 가서 장군의 명을 수행했다.
외벽이 완성됐고 참호가 끈질기고 느릿하게 요새를 향해 악몽처럼 뻗쳐 왔다.
쌍방의 대포가 불을 뿜었고 사람이 죽는 가운데 삽들은 쉬지 않고 땅을 파헤쳤다.
마치 무덤을 파는 장의사의 삽처럼.
그 치열하고도 지루한 전장을 황제는 성벽 위에 우뚝 서서 지켜보고 있었다.
“…….”
한 줄기 바람이 가면을 쓴 황제의 머리카락을 흔들었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이 가볍게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느끼며 자신의 목에 건 자신의 또 다른 정체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 * *
흔히 공성전에서 사람이 많이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떠돌지만, 사실이 아니다.
조금씩 가랑비에 옷이 젖는 것처럼 사망자가 발생한다.
참호로 가득 찬 전장 너머엔 이름 없는 병사들의 묘가 줄을 지어 서 있었다.
하나 같이 대포에 맞아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해 버린 처참한 몰골로 죽은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묘 안에 시체조차 넣지 못했다.
땅이 매몰되어 그 자리에 아예 영원히 매장되어 버린 것이다.
공성을 시작한 지 4개월이 흘렀다.
공성 측의 사상자는 어느새 5천 명을 넘어가고 있었다.
역병이 조짐이 일어 진영 바깥에서는 대량의 시체를 태우기까지 했다.
가장 큰 문제는 급료가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지대의 사략선이 남부 저지대의 항구 일대를 봉쇄했다.
카스무어 왕국의 막강한 함대가 출동해 보급선을 지키려고 하지만 함대는 느리고 사략선은 빠르다.
함대를 소규모 함대로 재편해 제해권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그러나, 기민한 늑대 떼와 같은 저지대 연방의 약탈 함대에 쓴맛을 봤을 뿐이다.
해로가 막힌 상황에서 왕국군이 의지할 수 있는 건 옛 룸 제국의 강역을 지나, 붉은 산맥을 지난 고갯길을 통하는 육로뿐이다.
제국의 봉신인 자부아 공국이 그 고갯길을 장악하고 있다.
신대륙에서 가져온 무수히 많은 금화와 은화를 실은 호송대가 붉은 산맥을 지나 제국을 거쳐 저지대 연방으로 향하고 있지만, 해로보다는 시간이 걸린다.
그동안 급료를 받지 못한 병사들은 불만을 터뜨리고 일부는 항명까지 했다.
일선에서 병사들을 상대해야 하는 대위들은 병사들의 사기 자체는 나쁘지 않지만, 지지부진한 상황에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불온한 보고를 속속 보내왔다.
다행스럽게도 고갯길을 지난 호송대가 뒤늦게 도착해 8만 군세의 갈증을 어느 정도 해갈했다.
이 문제가 어느 정도로 중요했냐면, 호송대가 도착했을 땐 하드리아멘디쿠스 본인이 직접 말을 타고 호송대를 멀리까지 마중 나갈 정도였다.
그 사실은 카스무어 왕국의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예행 연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자부아의 고갯길마저 막혀 버렸을 때 카스무어 왕국군이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지 드러낸 것이다.
비록 자부아는 현재 제국의 봉신이라고 하지만, 자부아 공작은 본시 부르봉에서 나고 자란 부르봉인으로 지금도 부르봉의 따뜻한 해안 지대에서 살고 있다.
제국이 약해진다면 언제든지 제국을 배신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마 제국이 약해지고 무너질 수 있다는 약점을 내비치고 부르봉이 제국에 감히 맞설 수 있다는 사실이 확실해지면 자부아는 언제든 색을 바꿔 제국에게 적대할 것이다.
카스무어 왕국의 거의 모든 주력이라 할 수 있는 군대가 붕괴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사실은 성벽 안에 있는 루페르트에겐 아직 알 수 없는 이야기다.
카를슈타인의 보고서에 적혀 있지도 않았고.
이미 공성전은 보고서에 적힌 날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곧 5개월이군요.”
베르크 란이 흙으로 뒤덮인 황량한 전장을 내려다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5개월이네요.”
길다면 긴 시간이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부족하다.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루페르트는 헨드릭 빌렘을 직접 찾아갔다.
헨드릭 빌렘은 당구를 치고 있었다.
그 옆엔 행실이 단정치 않은 여성들이 어깨를 드러내는 옷을 입은 채 루페르트 쪽을 보고 수군거렸다.
타인의 시선에 무뎌진 루페르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담담하게 제 할 말을 했다.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요?”
헨드릭 빌렘이 당구대로 공 하나를 경쾌하게 치며 그 궤적을 눈으로 좇다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흘러가던 공이 멈췄다.
“8개월.”
헨드릭 빌렘이 답했다.
“1년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버티려면 버틸 수 있겠지요.”
헨드릭 빌렘이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그 4개월은 지금이 천국처럼 보일 지옥이 될 겁니다.”
빈말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웃음 너머에 도사리는 섬뜩한 각오를 어렵지 않게 읽어 낼 수 있었다.
“4개월을 더 버텨 줄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가 류크라는 사내의 가면을 쓰고 물었다.
헨드릭 빌렘이 넌지시 물었다.
“귀공이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건 두렵지 않습니다.”
“귀공의 친우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 또한 두렵지 않습니다.”
흐릿한 안개 가면 너머 명료한 황제의 시선이 부평초처럼 떠다니는 용병대장의 마음을 꿰뚫었다.
“호오.”
헨드릭 빌렘이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채 게슴츠레 뜬 눈으로 루페르트를 훑어보았다.
“좋습니다. 하지만 각오는 하셔야 할 겁니다.”
지옥의 4개월.
루페르트는 어째서인지 그 4개월이라는 시간에서 운명을 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