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40. 지옥의 4개월 (1)
일곱 남작이 왔다고 해서 역사의 큰 틀은 바뀌지 않았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도시를 에워싸는 외벽을 건설하고 참호를 파고 괴물을 보냈다.
한 가지 다른 점은 대응이다.
“역시 공작이 그 괴물을 쓴다는 소문은 진짜였군.”
헨드릭 빌렘이 비범함은 저지대 연방에서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지만 정작 그의 강점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선뜻 말하지 못한다.
그는 리더이지 앞에서 싸우거나 아니면 탁월한 자신만의 특기로 각 방면에서 활약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단언할 수 있다.
헨드릭 빌렘의 진정한 강점은 탁월한 정보력이라고.
‘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많은 인맥을 갖고 있기에 시체를 먹는 자 같은 정보까지 알고 있는 거지?’
정보력만이 아니다.
일견 평범해 보이는 갈색 머리 사내는 소위 대학의 교수나 학자보다 더 넓고 방대하고 실용적인 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과거 동방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썩은 시체를 미끼로 줬다지만, 정작 동방 부족 간의 다툼에서는 다른 방법을 쓴다고 하더군요.”
그는 커다란 북을 만들게 하여 두들기게 했다.
송아지 다섯 마리 분의 가죽으로 동방 제국이 쓴다는 전쟁 북보다 더 큰 북이 만들어졌다.
헨드릭 빌렘은 병사와 시민들이 보는 앞에서 몸소 성벽 위에 전쟁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북소리는 낮고 둔중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전쟁 지대에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북을 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는 거지?”
마를로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베르크 란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뭔 북을 쳐서 괴물을 몰아낸다는 거지?”
“알 수가 없구만.”
“제아무리 일곱 남작이라고 해도 8만 명을 끌고 왔다는 하드리아멘디쿠스 앞에서는 총기를 잃기 마련인가.”
헨드릭 빌렘을 믿는 건 그의 부하와 그리고 낙센 정도였다.
‘저 거인.’
루페르트는 낙센이라는 자가 저토록 흐뭇한 표정을 짓는 걸 본 적이 없다.
그 거인병은 과할 정도로 키가 자라면서 표정을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도 표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류크 님.”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다가오는 일은 좀처럼 없는 일이라 루페르트는 의아해하며 답했다.
“무슨 일이냐.”
“저기. 저 거인 있잖아요.”
“그래. 낙센이라고 했었지.”
“저 거인 말이죠. 우리끼리 하는 이야긴데 뭔가 기분이 나쁘지 않나요?”
“생김새가 다른 사람은 거부감을 주길 마련이지. 나병 환자라든지 난쟁이라든지 꼽추라든지, 이 세상에 소외된 사람은 얼마든지 있지 않나.”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제 말은…….”
마를로네가 자기도 모르게 목걸이를 움켜쥐었다.
“이건 진짜, 미친 소리일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래.”
“아, 아니다. 그냥 기분이 나빠요. 저 사람 위험해 보인다고요.”
“……그래?”
마를로네의 감이 좋다는 건 그동안 수많은 전장을 함께하면서 몸소 깨달은 것이다.
‘그녀가 제국 성인 같은 괴물을 제외하고 저렇게까지 누군가를 경계한 적은 없었던 거 같은데.’
루페르트는 피식 웃었다.
‘날 싫어한 건 대단히 오래 간 거 같지만. 지금도 싫어하려나.’
별거 아닌 일처럼 보이지만 루페르트는 마를로네의 말을 깊숙이 속에 새겼다.
‘낙센이라. 하긴, 저 남자. 상당히 위험해 보인다. 정확한 나이는 모르지만 100살을 훌쩍 넘기기도 했고.’
이번에 회귀하면서 루페르트는 황궁의 서고에서 로이테르에 대한 초인병사에 관한 자료를 조사했다.
로이테르가 처음 나타난 건 약 지금으로부터 몇 세대나 거슬러 올라, 그 고색창연한 저지대 독립 전쟁이 펼쳐지던 때다.
당시 저지대 연방은 선제후는 아니지만 선제후급의 재력과 부를 가진 할슈타트 공작의 영지였는데 할슈타트 공작이 영지와는 준마로도 3일이 걸릴 정도로 먼 거리에 있었다.
공작이 전쟁을 위해 세금을 높이자 시민들이 반발한 건 당연한 귀결.
시민들은 반란군을 결성했고 공작에 맞섰다.
당시 황제가 반란군을 지원한 정황이 있었다.
할슈타트 공작이 자신의 재력을 믿고 일곱 선제후라는 체제를 흔들어 자신도 선제후에 오르려는 야망을 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제국의 황제가 봉신이기도 한 제국 군주를 대놓고 적대할 수 없기에 황제는 은밀한 지원을 저지대에 보냈던 모양이다.
그때 탄생한 것이 로이테르라는 초인병이다.
‘어쩌면 저 거인도 티그리트의 작품일 수도 있겠어.’
거인병의 키는 최소 2미터에서 크게는 3미터에 이르는 자도 있었는데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나 같이 얼음처럼 차가운 마음과 눈동자를 가진 비정한 전사라고.
무엇보다 그들에겐 사람이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어제까지 팔을 맞대고 창벽을 이뤘던 전우를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사지를 부러뜨려 죽일 수 있는 게 로이테르다.
그 뱀과 같은 성정은 그들의 강함과 요긴함에도 불구하고 저지대에서 배척받는 원인이 되었다.
남들과 구분되는 확연한 생김새도 배척의 원인이 됐을지도 모른다.
배척과 차별이란 건 철혈대제가 그랬던 것처럼 법과 제도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다.
법으로 정하지 않은 은근한 무시와 적대야말로 배척의 본질이다.
사회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로이테르의 최후는 알려진 바 없다.
그 기록을 좋아하는 저지대에서도 그들 하나하나의 운명 같은 건 보지 않으려 했으니.
소수의 생존자는 여전히 어딘가의 전장을 떠돌아다니고 있다고 한다.
전쟁의 신이 남들보다 두 배는 키가 큰 그들을 돌아봐 주기를 기도하면서.
둥- 둥- 둥- 둥-
북소리는 계속해서 전장을 파도처럼 두들겼다.
아무런 변화도 없었고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도 보이지 않았다.
북소리가 3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헨드릭 빌렘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였지만 그는 북 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우려의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들은 짜증을 담아 그를 노려보았다.
머리를 울릴 정도로 두들겨대는 북소리에 슬슬 환멸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갑작스러운 변화는 저녁 무렵, 적진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땅이 움푹 튀어 오르더니 형언하기 어려운 끔찍한 괴물이 발버둥 치며 기어 나온 것이다.
하늘로 올라가는 토사 위로 사람의 짓이겨진 사지와 팔다리가 흩날렸다.
“보아라!”
헨드릭 빌렘이 소리쳤다.
“저 괴물이 미쳐 날뛰는걸!”
그가 더욱 가열차게 북을 두드렸다.
둥- 둥- 둥- 둥-
괴물은 더욱 크게 날뛰었고 기어코 가장 가까이 있는 인간의 진형에 뛰어들었다.
카스무어 병사들이 총과 대포를 쏘았고 창벽이 괴물을 가로막았다.
포도탄의 파편이 온몸에 박히고 탄환을 잔뜩 몸으로 집어삼킨 채 괴물은 카스무어인의 창벽에 꿰뚫린 채 발작을 멈췄다.
그제야 헨드릭 빌렘은 북 치는 걸 멈추고 땀을 시원스레 닦아 냈다.
“저런 섭리를 벗어난 괴물은 질서에 속하지 않는 존재, 그러므로 극도로 불안정해. 불안정하다는 건 쉽게 미친다는 말과도 통하지.”
그가 주변 병사들에게 들으라는 식으로 말했다.
“무엇이 그런 괴물을 미치게 하는지 안다면, 그 괴물을 상대하는 건 인간을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네.”
헨드릭 빌렘이 성호를 그었다.
그는 여전히 구교를 믿는 남부 저지대인이었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호라의 자식인 인간은 그 어떤 피조물보다 안정된 존재니까.”
헨드릭 빌렘의 기지로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준비한 비장의 무기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러나 역사가 말해 주듯 전투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카스무어 병사들이 물길을 막기 시작했다.
* * *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수로를 막는 전술은 사실상 막을 방법이 있다.
댐을 무너뜨리려면 결국 성벽 밖으로 뛰쳐나와야 하는데 전투 병력만 5만 명에 이르는 카스무어군 상대로 한 줌도 안 되는 병력으로 맞선다는 건 그레나스의 함락을 앞당기는 일에 다름이 아니니까.
그나마 시도할 수 있는 방법이 특공대를 보내 무너뜨리는 건데 그것도 전자와 다르지 않다.
적이 당해 줄 리도 없을뿐더러 수비 병력 중 가장 정예라 할 수 있는 병력을 자진해서 소모하는 일이니.
‘과연 이 친구들의 명성이 진짜인지는 아닌지는 지켜볼 일이겠지.’
이 전쟁에서 루페르트는 철저히 관찰자다.
누가 이기고 지는 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이 전쟁을 언제까지 끄느냐다.
1년.
추상적인 수치지만 1년 정도를 끌어야 한다.
1년간 이 공성 중인 지옥을 버텨야 한다는 것이다.
쉽진 않은 일이다.
선제후가 되면서 갖은 호사에 익숙한 루페르트에겐 점점 상태가 나빠지는 식량과 식수를 먹고 절망이 역병처럼 거리를 배회한다는 게.
하지만 각오를 했다.
그만큼 그레나스 전역은 루페르트의 치세에 있어 중요한 지점이다.
문득 루페르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티그리트는 마치 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이 시대를 살아 본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자도 그레나스의 공성을 경험했다는 소리겠지. 어쩌면 카스무어를 흔들어 공성 자체가 없도록 할 수 있겠지만, 모를 일이지. 그 사람이 이 전쟁을 경험했고 여기서 실패를 맛보았을지.’
티그리트의 치세는 실패했다.
그가 성공했다면 루페르트에게 기회가 주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전쟁은 티그리트 본인이 와도 해결하기 쉽지 않아 보인다.
그 제국 성인이라는 섭리를 벗어나는 괴물을 풀지 않는 한.
하지만 그런 괴물을 푼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괴물에 의한 치세라니.
그건 결국 티그리트 본인이 만든 인간이 만들고 주도한 제국의 질서를 부정하는 게 아닐까?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은 반쯤 신격화되고 흔히 있는 이야기의 과장 정도로 세상에 받아들여지고 있지만 그 전쟁에서 미쳐 버린 병사가 거리를 배회하며 피를 뿜어내는 거신상의 이야기를 지껄이는 것 또한 사실이다.
신화와 우화, 동화와 현실이 구분 없이 뒤섞인 세계.
그것이 루페르트가 살아가는 현실이다.
하지만 신화가 현실을 침범하는 것에도 한계는 있으리라.
제국인들은 구교와 신교를 막론하고 신을 믿지만 진짜 그 신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개입한다면, 제국은 과연 유지가 될 것인가?
적어도 황제를 비롯한 군주는 설 자리를 잃게 되리라.
황제만이 아니다.
선제후, 군주, 귀족, 기사, 갖은 이름으로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사람들이 자취를 감추게 될 것이다.
누군가의 어버이라면 한 자식이 다른 자식 위에서 주인처럼 군림하는 걸 결코 놔두지 않을 것이니.
‘여신님이 마음만 먹는다면 어쩌면 이 세상은 내가 상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여신은 그렇게까지 세상에 개입하려 들지 않는다.
그녀도 두려워하거나, 혹은 꺼리는 것들이 있다.
티그리트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모종의 이유로 섭리를 벗어난 존재가 아닌, 인간의 힘으로 사안을 해결하려 했고 실패한 게 아닐까.
‘그 인간은 결코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그 나병의 제국 성인이 말하지 않았던가. 티그리트는 그리 영민한 사람은 아니라고. 일개 검투사일 뿐이라고.’
경의와 존경은 질투와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그 인간이 뭐라고.’
지켜볼 일이다.
이번 전쟁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