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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71화 (171/225)

171화 39. 일곱 남작 (6)

루페르트는 헨드릭 빌렘 옆에서 갖은 범죄로 얼룩진 사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다.

“이쪽에서 오겠군.”

그 명성은 헛되어 전해진 게 아니었다.

“이곳 정면으로 접근하여 능보를 두들기겠지. 나라면 그렇게 하겠어. 세 개의 물줄기로 분단된 다른 방면과 비교해 이쪽이 부채꼴 형태로 가장 넓게 포진하여 안정되게 두들길 수 있으니.”

미래를 본 것도 아닌 자가 미래를 정확히 예견했다.

“강줄기를 막아 버리는 작전도 고려해 봄 직해. 하드리아멘디쿠스라면 당연히 그렇게 하겠지. 이 세상에 수많은 장군이 있다지만 그 인간만큼 토목 공사를 좋아하는 인간은 또 없을 테니.”

무엇보다 그에겐 평균을 아득히 뛰어넘는 각 분야의 전문가가 있었다.

“메르는 차치하고 얄타의 상류는 연방의 영역입니다. 휘빙엄이라는 도시가 있지요. 지금이라도 휘빙엄 쪽에 전갈을 보내 댐을 만들게 합시다. 그 잘난 하드리멘디 공작의 콧대 한 번 정도는 꺾을 수 있겠지요.”

“요새의 배치와 축성은 교과서적으로는 흠잡을 곳이 없으나 한 면에 과할 정도로 압력이 가해졌을 때를 가정한다면 약한 고리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터, 공격이 예상되는 방면에 새로운 보루를 짓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 같습니다. 저에게 새로운 보루의 건설을 맡겨 주십시오.”

“시장에게 아낙네들을 저에게 내주도록 말씀해 주세요. 이 도시의 여인들과 함께 시민과 병사들이 버틸 수 있는 식량을 만들겠어요. 병이 여러 개 필요하겠네요.”

“포대의 배치를 제가 한번 손을 보고 싶군요. 마스트리히뎀에서 전용 화포를 갖고 올 생각입니다. 시간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만.”

“버려진 구교의 수도회 건물을 병원으로 쓸 생각입니다. 약품을 살 돈과 병원에서 봉사할 사람들도 필요하게 될 겁니다. 시체를 태울 장작도 포함해서요.”

“낙센과 함께 소티조를 맡겠습니다. 그 사람은 저보다 뛰어나니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겠지요.”

전략, 공성 건축, 식량, 화력, 의학, 공작 활동.

공성전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최고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헨드릭 빌렘이라는 사내 옆에서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그들의 지식을 유감없이 지키려는 도시에 투사했다.

누구 한 명도 무시할 수 없었다.

일견 평범한 시골의 아낙네로밖에 보이지 않는 아그네스라는 여인은 병 안에 몇 개월이 지나도 썩지 않는 음식을 보존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공성전에서 식량이 부족한 이유는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보존한 식량의 수명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감안하면 전장의 법칙 그 자체를 흔드는 지식이다.

“이런 병 안에 넣는다고 몇 개월이나 신선함이 유지된다고? 나는 믿을 수 없군.”

베르크 란은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왜 그렇게 부정적이야? 몇 개월 뒤에 가서 지켜보면 되는 거 아냐?”

마를로네가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하는 조부를 게슴츠레 뜬 눈으로 보며 핀잔을 줬다.

“아니, 마를로네. 넌 전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공성을 당하는 도시에서 신선한 식량이란 건 어제 밭에서 딴 채소나 갓 잡은 가축이 유일한 것이다. 곡식? 곡식이 얼마나 잘 썩는 줄 아나? 조금만 놔둬도 쥐새끼와 이루 말할 수 없는 벌레들이 갉아 먹고 있다.”

“좀. 지켜보자고. 어차피 여기 있을 운명이잖아?”

“……뭐, 지켜보면 알겠지.”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사람. 전형적인 자기가 경험하고 본 것만 진리라고 믿는 사람이구나.’

마를로네가 조금은 불쌍해 보였다.

그런데 마를로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조부가 이상한 불평을 늘어놓을 때마다 옆에서 기다렸다는 듯 타박을 늘어놓는 걸 보면.

보면 볼수록 죽이 잘 맞는 느낌이다.

일곱 남작의 구성원 중 만만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지만 루페르트는 그중 온통 붉은색으로 치장한 음침한 사내를 향했다.

움푹 들어간 눈에 툭 튀어나온 광대, 감정의 편린조차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무표정으로 무장한 그 사내는 한스 징펠만이 노골적인 살의를 드러내던 자였다.

‘매잡이 프리츠라고 했나.’

노르드마르크 고유의 총사 집단-불과 철의 형제단의 배신자라고 들었다.

장거리 저격에 관한 실력은 저 한스 징펠만마저도 한 수 접어 둘 정도라고.

“나에게 볼일이 있으신가?”

매잡이 프리츠가 루페르트를 움푹 들어간 눈으로 노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당신의 명성을 들은 적이 있어서.”

“호오. 내 이름이 그리 멀리 퍼진 줄은 몰랐는걸.”

프리츠가 씨익 웃었다.

“명성이 퍼지기 전에 상대가 죽어 버렸으니.”

“총의 대가로 들었는데. 저 불과 철의 형제단과 버금갈 정도의.”

“아, 그런 집단도 있었지.”

프리츠는 코웃음을 치고는 자신의 총기를 꺼내 보였다.

그의 총은 총이라기보다는 창병의 파이크를 연상할 정도로 긴 총신을 가지고 있었다.

‘저런 총을 어떻게 장전하는 거지? 혼자서는 불가능할 거 같은데.’

그의 총은 다른 총처럼 앞에서 장전하는 게 아니었다.

철컥!

총신이 꺾어지듯 두 개로 갈라졌다.

루페르트의 눈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자세히 보니 꺾인 총신 너머에 탄환을 넣는 구멍 같은 게 보였다.

프리츠가 보란 듯이 그 구멍에 화약과 탄환을 털어놓고는 다시 꺾인 총기를 하나로 결합했다.

철컥!

목이 꺾인 것처럼 보였던 총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처음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한 치의 흠도 없이 맞물렸다.

프리츠가 멀리 날아가는 솔개를 보더니 창처럼 긴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겼다.

탕!

총성과 함께 하얀 연기가 총 여기저기에서 뿜어져 나옴과 동시에 유유히 날던 솔개로 날개가 꺾여 아래로 추락했다.

지켜보던 병사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루페르트도 마찬가지였다.

“놀랍군.”

프리츠는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붉은 투구를 질끈 뒤집어쓰며 연기가 피어오르는 자신의 총기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불과 철의 형제단의 지식은 오래된 것이지. 잠깐 남들보다 앞서 나간 것을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그걸 기를 쓰고 보존만 하려고 하니 안 되는 것이야. 그들이 남들보다 앞서 나간 건 남들이 하지 않던 방식을 시도한 결과라는 걸 망각한 것이지.”

그의 담담한 말속에서 루페르트는 프리츠가 불과 철의 형제단이라는 과거의 조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걸 놓치지 않았다.

‘단순한 사고나 감정의 다툼으로 이탈한 건 아니군.’

그의 표정을 살피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그에게 불쑥 하나의 질문을 던졌다.

“한스 징펠만이라는 사람을 아시오?”

“아? 그 위선자?”

“위선자?”

“술을 마시고 친구를 죽였지. 친구가 전통을 어기고 새로운 기술을 연구한다는 명목으로. 그런데 내가 알기로 그 친구가 한스 징펠만보다 총술은 부족할지언정 기술적으로는 더 뛰어난 사람이었지. 총기 제조인으로서는 몇 수는 위였어. 한스 징펠만은 구시대의 케케묵은 총기밖에 만들어 내지 못하는 인간이니. 이상한 옷을 입고 다니며 자신의 열등감을 극복해 보려 하는데, 내가 볼 땐 그조차도 애잔해 보일 뿐이야.”

“…….”

놀라운 일이다.

프리츠라는 사내가 한스 징펠만에 대해 어떠한 적의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걸.

한스 징펠만은 매잡이 프리츠에 대해 맹렬한 살의를 드러냈지만, 프리츠는 살의는커녕 그를 크게 중요하다고 여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프리츠가 한스 징펠만에 대해 가진 감정은 무시와 경멸에 가까우리라.

“……불과 철의 형제단의 최고의 가치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탐구심이었지만, 언제부터인가 재능이 없는 자들이 과거의 것을 숭상하면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자를 배척하기 시작했지. 한스 징펠만은 그 재능 없는 자들의 사냥개에 지나지 않아. 그래도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지 친구의 자식을 죽이진 않았다더군. 도제로 거뒀다든가? 그런데 혹시 아나? 그 이상한 옷을 입는 한스가 친구의 자식에게 몹쓸 짓을 하고 있을지?”

루페르트는 굳은 얼굴로 프리츠의 비아냥을 경청했다.

다른 건 다 떠나서 한스 징펠만을 모욕하는 발언은 영혼 동맹으로서, 한스 징펠만의 주군으로서 참고 넘기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지금 루페르트는 황제가 아니다.

그는 연줄로 도시에 온 트라이아에서 온 제국인 류크라는 사람이다.

감정을 드러낼 필요는 없다.

적어도 이 프리츠라는 사내의 실력은 확실해 보이니 말이다.

한편 헨드릭 빌렘의 등장으로 가장 많은 변화가 나타난 인물은 도시의 사령관 얀한데였다.

명색이 제국 대령이자 도시의 사령관이라는 자가 텃새나 야료를 부리기는커녕 오히려 자진해서 헨드릭 빌렘이라는 용병대장 아래로 가려는 모습마저 보였다.

“대장. 이쪽입니다.”

호칭마저 대장이라는 근본 없는 호칭을 부르며 헨드릭 빌렘에게 지휘권마저 이양하려는 모습은 놀라움 넘어 경멸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왜 저렇게까지 하지? 저 사람은 줏대도 없어?”

마를로네가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으로 얀한데를 보자, 베르크 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어쩔 수가 없지.”

루페르트와 마를로네가 나란히 바라보자 베르크 란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 도시를 지켜 낸다면, 얀한데는 다른 곳에서 불러 주겠지. 그것도 대단히 비싼 값으로. 실질적으로 도시의 방어를 지휘한 게 일곱 남작이라고 해도, 명목상 사령관은 얀한데이고 그의 경력도 덩달아 높아지는 것이니. 오히려 그는 행운이라고 생각할 거야. 패배가 확실한 전쟁에서 절로 일곱 남작 같은 소방수가 왔다는 것이.”

그 일곱 남작의 수장 헨드릭 빌렘은 실제로 도시의 사령관처럼, 때에 따라서는 시장처럼 행동했다.

여섯 명의 다른 남작에게 저마다의 소임을 맡긴 채 자신을 얀한데와 도시의 관료를 거느리고 마치 시장처럼 도시 곳곳을 살피며 명령을 내리고 숙제를 주었다.

도시 곳곳에 새로운 우물이 만들어졌다.

쫓겨난 구교도의 집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막사를 짓고 화장터를 늘리고 교수대를 세웠다.

자격 없는 병사들이 쫓겨나고 새로운 병사들이 빈자리를 채웠다.

민병대원은 모두 해산했고 일부만을 노역자로 받아들였다.

땅 위엔 새로운 보루가 우뚝 서서 동쪽 평야를 굽어보았고 지하에서는 전쟁 전부터 수많은 병사들이 삽질을 하며 개미의 굴 같은 지하망을 구축했다.

병원이 만들어지고 저장된 식량과 약품이 쌓이고 전보다 더 많은 병사들이 외부로부터 들어왔다.

다가올 전쟁을 준비하는 작업이 한창인 가운데 두 사내가 성벽 밖에서 만남을 가졌다.

“오랜만이군.”

헨드릭 빌렘이 참호 안에 있음에도 자기와 눈높이가 비슷한 거인을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보았다.

낙센이 코웃음을 쳤다.

“그대가 이곳에 오다니.”

“그레나스는 어떤가. 잘 대우해 주던가?”

낙센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왜? 전쟁이 있어서 이곳에 온 건가? 또 그 믿음이 그대를 여기에 이끈 것인가?”

헨드릭 빌렘의 비웃음이 진해졌지만, 낙센의 얼굴은 오히려 경건한 색채로 물들었다.

“내 심장엔 바다 신의 피가 돌고 있지만, 내 믿음은 언제나 전쟁의 신을 향하고 있지.”

“……전쟁의 신 미르미돈께서 그대를 돌아봤으면 좋겠군.”

미르미돈.

숭배가 금지된 전쟁의 신이다.

하지만 전장의 병사들은 대체로 호라에게 기도를 하지만 일부 노병들은 전쟁의 신에게 그들의 무운과 승리를 기원한다.

그런데 헨드릭 빌렘이 전쟁의 신이라는 말을 입에 담는 순간 낙센은 자기도 모르게 저편에 서 있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를 돌아보았다.

“저자들은 뭐지?”

거인의 차가운 푸른 눈이 베르크 란 조손을 담았다.

마를로네는 지끈거리는 두통을 느꼈다.

‘이 사람, 어디서 본 적이 있는데.’

헨드릭 빌렘이 대답했다.

“날 고용한 분의 호위를 맡고 있지.”

“그런가.”

“왜? 뭐라도 느껴지나?”

헨드릭 빌렘이 고개를 숙이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낙센이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도펠죌트너군.”

“호오. 그래? 어쩐지. 저 계집.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은은한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었지.”

“……냄새가 나. 전쟁 신의 냄새가.”

낙센이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

“아직도 도펠죌트너가 죽은 신의 피를 마시고 힘을 얻은 존재라고 믿고 있나?”

이에 낙센이 참호에서 기어 나왔다.

결코 키가 작다고 할 수 없는 헨드릭 빌렘을 수직에서 내려다보며 낙센이 싸늘하게 말했다.

“나 또한 죽은 신의 피를 마신 존재지.”

“……뭐, 당신이 말한다면 그게 맞겠지.”

헨드릭 빌렘이 베르크 란 조손을 곁눈질로 보며 속삭였다.

“저들을 죽일 건가?”

낙센이 희게 웃었다.

“……당장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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