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39. 일곱 남작 (5)
마스트리히뎀.
저지대 연방 최후방에 자리 잡은 부유한 항구 도시다.
의장 선출 때마다 수도가 바뀌는 저지대 연방이지만 마스트리히뎀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른 강성한 부족에게 평원과 숲과 마른 땅을 빼앗긴 선조 부족이 개펄과 모래톱에서 일으켜 세운 최초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 도시엔 수많은 상선이 오가는데, 상선과 군함의 경계가 모호한 날렵한 배들이 수시 항구 주위를 돌며 항구에 접근하는 배들을 살폈다.
마스트리히뎀은 상업항이자 군항으로 저지대 연방 최대의 조선소가 자리 잡고 있다.
일부 조선공은 도시의 수심이 너무나 얕아 점점 배수량이 커지는 배들을 만들 수 없기에 다른 항구에 조선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당장 카스무어 왕국과의 전쟁에 거의 모든 세금을 군비에 지출하는 연방으로서는 어림도 없는 주장이다.
최근 항구를 들썩이게 하는 건 저지대 연방의 사략선들이 카스무어 왕국 상대로 펼치고 있는 노략질이다.
한 대담한 선장이 카스무어 왕국의 코앞에서 상선을 공격, 나포하여 왕국이 신대륙에서 금과 은을 가지고 온다는 소문을 사실로 입증했다.
“마치 사람 그 자체가 황금으로 변해 버린 것 같은 황금 동상을 발견했소. 신대륙엔 역병과 재밖에 없다고 하지만, 그 재 속에서 카스무어 왕국은 황금과 은을 아무도 모르게 자기들끼리만 은밀하게 캐내고 있었던 것이오.”
그 선장은 자신이 탈취한 황금의 절반을 자신의 몫으로 챙겼다.
저지대 연방의 사납고 날랜 뱃사람들이 그 소문을 듣자 모든 사업을 멈추고 마스트리히뎀에 몰려들었다.
마치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이 몰려드는 것처럼 말이다.
한몫을 챙기려는 탐욕스러운 선주와 투자자, 겉으로는 신사인 척하지만 언제든 포악한 해적으로 변할 수 있는 선장, 그런 흉포한 선장 밑에서 기꺼이 죽을 각오가 된 뱃놈.
마스트리히뎀은 그 어느 때보다 폭력적인 활기에 가득 차 있었다.
이 도시에 루페르트가 방문한 이유는 하나뿐이다.
저지대 연방, 아니 세계를 통틀어 손꼽히는 전쟁 전문가 집단-일곱 남작이 이곳에 있다.
“헨드릭 빌렘이라는 자를 찾고 있소.”
베르크 란의 호위를 받으며 루페르트는 수소문을 해 일곱 남작이 있다는 주점을 찾았다.
간판도 없이 부식되어 가는 전 시대의 화승총이 방패 위에 교차하여 걸어 놓은 게 그 주점을 알리는 유일한 표식이었다.
주점에 들어가자 눈 하나가 하얗게 변색 돼 버린 섬뜩한 관상의 사내가 루페르트를 맞이했다.
“일곱 남작? 그들을 왜 찾는 거지?”
“의뢰를 하려고.”
“일곱 남작이 제국에게 수배됐다는 소식을 아직도 못 들은 건가? 아니면 알고도 묻는 건가?”
“제국의 끄나풀은 아니오. 게다가 수배령은 철회됐소. 제국 황제가 일곱 남작을 쫓는 걸 포기한 것이지.”
외눈 사내가 살기를 담아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의 손가락이 움찔거리고 그의 허리춤에, 외투에 가려진 단도의 손잡이가 눈에 들어왔다.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에게 주의를 줬다.
그도 저 외눈 사내의 살기를 읽은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외눈 사내와 싸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가 먼저 몸을 돌렸다.
“직접 찾아보시오. 여기에 있기는 하니. 하지만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말을 거는 추태를 부리진 않았으면 좋겠구먼. 이 주점에 모인 사람들은 조용히 홀로 마시는 걸 즐기는 편이니.”
사내의 말대로였다.
꽤 넓은 주점 안은 적지 않은 사람이 있음에도 기묘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외눈 사내의 말대로 테이블을 차지한 사람은 예외 없이 1명이었고.
모종의 룰이 지배하는 특이한 세계로 보였다.
뒷골목의 깡패들이 으레 그들끼리 구속하는 의례를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술을 나르던 풍만한 여성이 루페르트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말했다.
“두 번 이상 말 거는 건 금지랍니다.”
루페르트가 그녀를 응시하자, 그 여성은 눈웃음을 치며 루페르트를 지나쳤다.
“다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베르크 란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역시 범죄자들의 소굴처럼 보이는군요. 돈을 좀 써야겠습니다.”
돈을 쓰는 건 관계가 없다.
돈이라면 언제든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여신의 금고엔 군대를 움직일 정도는 아니지만, 여러 사람으로 하여금 가볍게 목숨을 던지게 할 정도의 자금이 모여 있다.
‘보통내기는 아니겠지. 그런 인간에겐 가볍게 보이면 곤란해.’
루페르트는 이름 없는 주점 안에 있는 서른 명이 넘는 사람 중 한 번에 일곱 남작을 찾기로 생각했다.
물론 그에겐 비장의 수단이 있다.
“잠깐 여기서 기다려 줬으면 하는데.”
“혼자 들어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닙니다.”
“괜찮아요. 기다려 주세요. 생각이 있어요.”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입구에 두고 홀로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싸늘한 시선들이 화살처럼 루페르트의 몸 구석구석을 찌르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이미 루페르트는 몇 번이고 지옥을 보았고, 죽음에 이르는 상처도 몇 번이고 입었다.
이딴 범죄자들이 날을 세워 본들 루페르트의 코웃음조차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회귀를 거듭하면 좋지 않다고들 하는데, 의외의 장점도 있군.’
마음이 무디어진다는 게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루페르트는 가게 안쪽 휘장을 친 장소에 주목했다.
“저긴 뭐 하는 곳이요?”
술을 나르는 여성에게 묻자 그녀가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다, 아시면서. 지금은 안 돼요. 아직 해가 중천에 있잖아요?”
“잠깐, 저 안에서 홀로 명상을 하고 싶은데.”
루페르트는 대뜸 은화를 내밀었다.
“이상한 취미를 가지신 분이네요. 마음대로 하세요.”
루페르트는 휘장이 있는 작은 공간으로 들어가 휘장을 치고 작은 틈새 너머로 실로 오랜만에 여신의 권능을 가동했다.
루페르트의 눈에 불길한 초록색 빛이 불꽃처럼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 루페르트는 사람들의 운명을 본다.
역시 범죄자의 소굴이었다.
살인자, 납치범, 강도, 해적, 신성모독자, 방화범.
이 세상의 모든 인간 말종을 한곳에 모아 놓은 시장처럼 보였다.
그 안에서도 가장 빛나는 건, 의외로 평범한 관상의 사내였다.
1. 개요
종족: 인간-서부 저지대인
분류: 군인, 항해자, 학자
성별: 남성
연령: 47세
명성: 일부 사람에게 알려짐
신체상의 특징: 통풍
2. 운명의 실타래
일곱 남작이라 불리는 용병대의 대장: A+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고 죽은 저지대의 위인: A+
인기 많은 대학교수: A
3. 특기사항
- 무신론자
4. 등급
A+
< “일곱 남작” 헨드릭 빌렘에 관한 보고 >
‘이 사람인가?’
뭐랄까, 지금까지 본 사람과 다르다.
평탄하고 할까, 저점이 높다고 할까.
어떤 궤적을 걸어가든 이 사내는 타인보다 훨씬 높은 곳에서 살 운명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토록 높은 평균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사내의 존재감은 지나칠 정도로 옅었다.
통찰의 만화경을 쓴다고 사람 하나하나를 찾지 않았다면 그냥 지나쳤을 정도로 존재감이 옅고 평범한 관상.
그 갈색머리의 사내가 루페르트가 찾던, 그리고 세상이 아는 일곱 남작의 리더 헨드릭 빌렘이었다.
루페르트는 홀로 술잔을 앞에 두고 멍하니 있는 그 앞에 앉았다.
“당신에게 맡기고 싶은 일이 있소.”
헨드릭 빌렘이 눈동자만을 움직여 루페르트를 노려보았다.
그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 루페르트는 아주 잠깐 몸이 경직되는 감각을 느꼈다.
시선이 강하고 약하다의 문제가 아니다.
뭐라고 할까.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닌 것의 시선을 받은 느낌이다.
뱀이나 혹은 그보다 더 끔찍한 파충류나 양서류 같은.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지? 난 당신을 본 기억이 없는데. 내 부하 중에 입이 가벼운 사람도 없고.”
“느낌이 오더군. 당신한테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어.”
헨드릭 빌렘이 코웃음을 쳤다.
“사기꾼 같은 소리를 해 대는군.”
“당신의 힘이 필요하다.”
“누가 보낸 거지?”
“그건 말할 수 없다.”
“고용주도 모르는데 전장에서 죽으라는 건가?”
헨드릭 빌렘이 씨익 웃었다.
“게다가 우리는 제국에게 찍힌 몸이야. 무려 황제가 우리를 직접 수배했지. 그런 우리는 대륙 어디에서 써 줄까? 동방 제국 정도면 써 줄 수도 있긴 하겠네.”
“황제가 수배령을 거뒀다면?”
“확실한 건가?”
“이미 수배령을 철회했소. 제국에 사람을 보내 확인해 보시오. 그 사람이 다른 말을 한다면, 계약금을 가진 채 전장을 떠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소.”
안개 가면을 쓴 채 루페르트는 한 치의 표정 변화도 없이 자신이 해야 할 말을 똑똑히 말했다.
냉소를 머금던 헨드릭 빌렘의 입가에서 냉소가 싹 사라졌다.
그가 몸을 기울여 얼굴을 가까이 대며 조용히 물었다.
“우리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지?”
이에 루페르트는 가지고 있던 술잔을 기울여 테이블에 술을 약간 흘리고는 손가락으로 그 술로 글자를 썼다.
[ 그레나스 ]
헨드릭 빌렘이 코웃음을 쳤다.
“제국인은 아닌 모양이군. 아니, 어쩌면 제국 쪽 인간일 수도 있겠지. 그 도시가 빠르게 무너지면 가장 피해를 볼 건 제국의 황제일 수도 있으니까.”
“지킬 수 있나?”
루페르트는 은은한 조소를 머금고 있는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헨드릭 빌렘이 웃음기를 머금은 채 루페르트를 힐끗 쳐다보았다.
“지킬 수 없어. 저 부유한 카스무어 왕국이 3년 전부터 수십만 플로린에 달하는 거금을 들여 준비한 공성을 어떻게 막나? 늦추는 게 고작이지.”
“얼마나 늦출 수 있지?”
이에 헨드릭 빌렘은 손가락 하나를 폈다.
“1년.”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었다.
“그 정도면 충분하오.”
* * *
일곱 남작을 부르는 건 역시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들었다.
여신의 금고에 루페르트가 쌓아 둔 비상금을 모조리 소진할 정도로 많은 돈을 요구했다.
3천 명에 달하는 정규 연대 둘을 1년이나 잡아 둘 수 있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실력은 역사와 명성이 증명한다.
그레나스의 광장에서 루페르트는 역마차를 타고 온 일곱 명의 개성 강한 남녀를 눈으로 담았다.
‘저들이 일곱 남작인가.’
한 명 한 명이 각 분야의 마스터를 넘어서는 실력을 가졌다는 전쟁 전문가 집단.
평범한 용병과는 다르다.
숫자와 기율, 거기에서 나오는 전투력으로 봉사하는 일반 용병과 다르게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지식과 경험을 주변에 전파해 환경 자체를 바꾸는 것으로 소임을 다한다.
그들이 가장 자신 있어 하는 전쟁은 다름 아닌 공성전.
특히 수성전에서 일곱 남작은 승리 그 자체를 보증하는 수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곱 남작이다.”
“저 사람들이 일곱 남작이라고?!”
“믿기지 않는군. 분명 제국의 수배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제국의 청부 마법사들이 두렵지도 않은가?”
그들의 명성은 그레나스의 시장 프레데릭도 알고 있었다.
시장이 직접 광장에 나와 일곱 남작을 보러 왔다.
“아니, 당신들이 왜 여기에?”
시장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헨드릭 빌렘을 응시했다.
“우리는 당신들을 고용한 적이 없는데……. 고용할 돈도 없고.”
이에 헨드릭 빌렘이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이 도시가 함락당하기를 원치 않는 어떤 귀인께서 우리의 품삯을 지급했습니다. 고로, 이 성벽 위에 백기가 내걸릴 때까지, 우리 일곱 남작은 도시와 운명을 함께하겠습니다.”
무너질 운명의 도시에 일곱 남작이 가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