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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69화 (169/225)

169화 39. 일곱 남작 (4)

그레나스가 함락됐다.

석 달을 버티든, 반년을 버티든 도시의 함락은 결과적으로 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다.

레벤호스트가 전처럼 지지자를 끌어모았고 제국은 내전의 위기에 봉착했다.

저지대 연방의 지도자, 야스퍼는 그레나스가 포위를 당하는 동안 그레나스를 구원하는 대신, 카스무어 왕국이 차지하고 있는 요충지인 하아스를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하아스에 대한 본격적인 공세를 펼치려고 하는 동안 그레나스가 떨어졌기 때문이다.

황제의 집무실엔 새로운 인물들이 나타났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한 울피아나 외에 선제후 골트문트 그리고 그의 장군이 함께 동석한 것이다.

루페르트의 시선은 울피아나와 골트문트보다 그들이 데리고 온 고어문트의 장군을 의식하고 있었다.

‘이 사람인가. 이렇게 한자리에서 마주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군.’

흔히 검은 장군이라고 알려진 발자크 체르클라에스 폰 휘텔 백작은 현재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군인 중 하나일 것이다.

골트문트의 챔피언인 그는 골트문트의 군대를 거느리고 제국 전역을 누비며 무수한 전투에서 무수한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사람들은 입 모아 말했다.

휘텔이 없었다면 제국의 멸망이 5년은 앞당겨졌을 거라고.

끝없는 전투 속에서 부대가 마멸되고 그의 건강을 앗아가지 않았다면 그는 좀 더 오래 살아남아 어쩌면 제국의 역사를 바꿨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장군의 시대인가. 하드리아멘디쿠스도 그렇고 휘텔도 그렇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명장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는군.’

그 휘텔이 그에게 검은 장군이라는 이름을 준 검은색으로 치장된 장식용 갑옷과 예복을 입은 채 차분한 목소리로 현황을 설명했다.

“트라이아 선제후는 3만 명의 군대를 일으킬 예정입니다. 숫자는 많지 않으나 자국 영토에서 훈련하고 조율한 충성심이 높은 군대지요. 앙쥬 왕국의 용병이 섞여 있다지만 처가 쪽에서 보내온 군대인만큼 수준이 높고 마찬가지로 충성스러울 것입니다. 선제후와 동조한 신교도 군주들이 저마다의 영지에서 크고 작은 군대를 일으켜 선제후에게 합세할 겁니다.”

그의 설명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곧 벌어질 내전의 규모와 크기가 결코 작지 않으리라는 걸 체감했다.

작은 불로는 그치지 않을 것이다.

고어문트 쪽에서도 군대를 일으킬 준비를 하고 있지만, 이미 전부터 한 번 반역의 징조를 드러낸 바 있는 레벤호스트는 언제라도 군대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미 그는 자신의 군대를 완성했고, 나머지 동조하는 군주의 군대를 기다리고 있다.

동쪽에서 함께 전쟁에 가담했다는 드라쿨레아 공국의 위치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이미 렌타이어마르크 일대의 변경을 약탈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렌타이어마르크는 일대의 작은 공국조차 막을 힘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거의 모든 재력과 여력을 내전에 쏟아부었기 때문이다.

“그 드라쿨레아 공국의 지도자인 비스투라는 기민하고 잔혹한 지도자입니다. 그와 그의 군대는 동방 제국과의 독립전쟁에서 15년 동안 싸운 역전의 용사입니다. 우습게 볼 사람은 아닐 겁니다. 동방 제국의 군대가 우스꽝스럽다고 해도 여전히 제국과 견주는 강국이고 그 군대를 상대로 그 작고 빈약한 나라의 전력만으로 그 오랜 시간을 싸웠다는 건 그 자체로 그들이 범상치 않다는 군대라는 걸 알려 주는 징표니까요.”

비스투라만이 아니다.

레벤호스트와 그에 동조하는 신교 군주의 연합군은 세 갈래로 슈발츠마인을 향해 침공할 의사를 내비치고 있고, 그 기세와 전력은 황제마저 일거에 폐위시킬 기세다.

고어문트가 도와줬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루페르트의 치세는 순식간에 위기를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어문트가 돕는다고 해서 루페르트는 이 내전을 지금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황제가 휘텔에게 물었다.

“그레나스가 늦게 함락이 된다면 내전이 일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가?”

이에 휘텔이 대답했다.

“야스퍼 의장이 하아스를 공략한다면 균형은 지켜지겠지요.”

“하아스 공략까지는 어느 정도는 예상하나?”

“보수적인 관점에서 1년은 있어야 할 겁니다.”

“1년이라…….”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한없이 긴 시간.

특히 그레나스의 병사들에겐 영원과 같은 시간이리라.

‘1년을 버틸 수 있을까. 그레나스가, 그 하드리아멘디쿠스를 상대로?’

순간 호기심이 일었다.

루페르트가 다시 휘텔에게 물었다.

“혹, 그대와 하드리아멘디쿠스가 전장에서 맞붙는다면 누구의 승리를 점치는가?”

“야전에서는 제가 이길 수도 있습니다.”

휘텔이 답했다.

“허나, 공성전에 들어간다면 글쎄요. 저는 그의 상대가 안 되겠지요.”

솔직하게 말하는 노장의 얼굴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역시, 자신감이 넘치는군. 이 사람은.’

아까운 사람이다.

가급적이면 이쪽의 장군으로 두고 싶다.

허나 그는 이미 골트문트와 오랜 인연으로 묶인 몸.

죽을 때까지 그 인연은 노장군의 몸을 놓지 않을 것이다.

루페르트가 나머지 사람들과 전황을 논의하고 있을 때 시종 하나가 안절부절못한 얼굴로 황제 앞에 나타났다.

울피아나가 그 모습을 발견했다.

“어머, 무슨 일인가요?”

루페르트에겐 악마와도 같지만, 타인에겐 자애로운 천사라는 이미지가 있는 그녀는 시종의 난감한 얼굴에 한 줄기 희망을 가져왔다.

“우, 울피아나 님! 대단히 황송하오나, 바깥에 베르크 란이라는…….”

“아. 전에 그 폐하를 찾으셨다는 도펠죌트너요? 빨간 명찰도 안 단?”

“네.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왜…….”

순간 총성이 울려 퍼졌다.

다급한 외침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도펠죌트너다!”

“놈이 황궁으로 향한다!”

날선 외침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마법사가 당했어! 마법사가 당했다!”

그 외침은 점점 커지고 공포스러운 내용으로 변해 갔다.

“놈이 황제 폐하의 집무실로 향한다! 막아!”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역시, 이렇게 되는 건가.’

창문이 깨지고 피투성이가 된 노병이 검을 든 채 황제 앞에 나타났다.

“……할 말이 있소.”

베르크 란이다.

시간의 균열을 넘어 그가 다시금 황제 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이번엔 그에게 찔릴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유리창을 깨고 나타나기 전부터 황제는 소라고둥을 손에 쥐고 있었으니까.

“다음에 합시다.”

조금은 지친 얼굴로 루페르트가 말하며 소라고둥을 불었다.

또 다른 파도가 모든 걸 덮어 버렸다.

울피아나와 골트문트도, 피투성이가 된 베르크 란도, 그리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그레나스의 전장조차.

* * *

“…….”

정적이 흐르는 방안에 루페르트는 홀로 앉아 있었다.

그 옆에 뭔가 꾸물거리는 게 보인다.

문어다.

루페르트의 시선이 문어를 향했다.

“뭐야? 너는 왜 여기에 있냐? 지금 시점이면 널 얻기 직전인데?”

이에 문어가 촉수로 루페르트의 소라고둥을 쓰다듬으며 쓸데없이 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너의 아티팩트라는 걸 잊었나. 이 세상엔 회귀의 흐름에 무관한 존재가 몇 있지.”

“……이번에도 울피아나를 들일 건가?”

“그게 최상의 결과라는 걸 너도 보지 않았나?”

문어가 능청스럽게 대답하며 루페르트 쪽으로 꾸물거리며 기어 왔다.

루페르트는 문어가 자신의 다리를 타고 올라 책상에 오르는 걸 잠자코 지켜보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상상도 못 했다.

겨우 울피아나 하나를 집무실에 갖다 놓았을 뿐인데, 저 골트문트가 예전처럼 최상의 동맹으로 들어온다는 건.

대체 뭐가 그를 움직인 것일까?

루페르트는 알 수도 없었고 이해할 수도 없었다.

문어가 그런 루페르트를 보며 능청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골트문트는 말이야. 낭떠러지에 서 있던 사람이지.”

문어가 촉수로 루페르트의 깃털펜 하나를 들어 올려 사람처럼 생긴 눈앞에 갖다 댔다.

“……그 친구도 제국이 내전으로 파괴되는 걸 알고 있었어. 구교라는 종파 속에서 손을 잡을 만한 사람이 황제밖에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레벤호스트가 대권을 잡았을 때 자신에게 올 피해도 정확히 계산하고 있었어. 아마 이쪽에 가장 많은 생각을 할애했겠지? 하지만 선제가 가져다준 의심과 염려가 그를 주저하게 한 거지.”

“……그래?”

“아주 잠깐 떠민 것만으로 그 친구를 우리 편에 끌어들일 수 있지.”

“그게 울피아나라는 건가?”

“아내와 사별하고 재혼도 하지 않는 그 친구가 딸을 지극히 아끼는 건 그대도 알고 있지 않나?”

“하아…….”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었다.

문어의 말이 맞다.

그가 최상의 결과를 가지고 왔다.

옆에 울피아나가 있는 게 심적으로 부담되지만, 골트문트와 같은 깃발에 서는 것보다 중요한 문제일까?

전혀 다르다.

골트문트가 있다는 건 그 자체로 내전의 완벽한 승리를 보장하는 것이니.

내전이 일어나지 않든, 일어나든 골트문트는 필요하다.

‘골트문트는 필요하다. 그가 내게 요구한 게 거슬리긴 하지만, 이게 맞아.’

“무지렁뱅이 촌놈이라고 들었는데 제법 머리는 돌아가는군.”

문어가 귀를 파는 시늉을 하며 루페르트를 고깝게 응시했다.

‘탕에 집어넣고 싶어.’

루페르트는 충동을 참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제 또 갈 건가? 그 희망 없는 전장에?”

“가야지.”

“울피아나는?”

문어가 펜을 내려놓으며 책상 아래로 떨어지듯 몸을 날렸다.

그 촉수가 땅에 닿기도 전에 문어는 황제와 똑같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루페르트가 힘없는 얼굴로 그를 보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알아서 해.”

“그 여자의 장점을 알아줬으면 좋겠군.”

“……그랬으면 좋겠네.”

루페르트가 손에서 흐릿한 가면 같은 걸 만들어 냈다.

아티팩트 안개 가면.

섭리를 초월한 여신의 기적이다.

“결과를 바꿀 자신은 있나?”

이에 루페르트는 가면을 뒤집어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단서를 들었어.”

“호오. 그게 뭐지?”

“일곱 남작.”

“남작 일곱이 모인다고 뭘 바꿀 수 있을까?”

문어가 코웃음을 쳤다.

루페르트도 비슷한 생각이다.

하지만 이제는 걸 수 있는 모든 것에 걸어 봐야 한다.

“놈들은 그냥 남작이 아니라, 저지대에서 활동하는 용병단이다. 그 용병단, 일곱 남작에 대한 수배령을 거두고 사면령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들이 사면을 받을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소문을 내. 무슨 뜻인지 똑똑한 너는 잘 알겠지?”

문어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

루페르트가 어두운 침실을 나섰다.

문어가 손을 흔들었다.

“다녀오게, 황제.”

* * *

다시금 루페르트 앞에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섰다.

전처럼 건강하고 깨끗하고 증오 없는 모습으로.

루페르트의 시선이 베르크 란을 향했다.

‘이 사람. 참. 위험해. 정말이지 통찰의 만화경으로 들여다보고 싶은 기분인걸?’

그 베르크 란은 지금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레나스라. 좋지요. 원하던 바입니다.”

회귀 직전에 피투성이가 된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그의 기분과 반대로 마를로네의 표정은 어둡고 또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

“무슨 일이지? 두렵나?”

“아니요. 류크 님.”

마를로네가 창백한 얼굴로 몸을 가볍게 떨었다.

“그냥 느낌이 안 좋아요.”

“느낌?”

“네. 어쩐지 거기서 죽을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든다니까요?”

그녀의 손은 목걸이에 가 있었다.

루페르트의 시선이 그녀의 목걸이에 향했다.

그 목걸이는 루페르트가 목에 걸고 있는 소라고둥과 비슷한 색감을 담은 파편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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