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39. 일곱 남작 (3)
하드리아멘디쿠스의 전술엔 특별한 새로움이나 기발한 건 없었다.
그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도시를 포위했고 주둔군을 위축시켰다.
강을 막아 버린 것 또한 새로운 전술은 아니었다.
제방을 터뜨려 주변을 물바다로 만드는, 물을 사용하는 전술은 저지대인들이 즐겨 쓰던 전술이었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그 반대로 했을 뿐이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물량의 힘을 잘 이해하고 그것을 잘 사용하는 사람이다.
8만 명이나 되는 거대한 군대를 움직이면서도 군화 한 켤레조차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치밀하게 짜인 병참 계획을 수립했고, 그것을 운용해 가는 과정에서도 특별한 잡음 없이 거대한 군조직을 정교한 태엽 시계처럼 움직이게 만들었다.
선두 공병이 끊임없이 지그재그로 참호를 파며 도시에 접근하는 동안 뒤편에서는 도시를 마주 보는 평행호가 이중삼중의 포위망을 구축해 갔고 그것이 완성되면 야음을 틈타 전열에 배치된 대포들이 도시의 방어벽을 향해 직접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 수많은 작업이 어떠한 균열도 없이 차곡차곡 진행되는 동안 수비군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느껴야 했다.
가장 충격을 받은 건 여러 차례 공성전을 경험한 적이 있던 베테랑 병사였다.
“어떻게 저렇게 대군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설마 사람 단위로 계획표라도 짜 놓은 건가.”
“저 많은 제대가 하나의 지휘 계통에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저렇게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니. 그 흔한 연대 간의 텃세조차 보이지 않는다.”
“난 저들이 벌통 안의 벌처럼 보여. 사람 같지 않단 이야기야. 인간미가 없어. 인간미가.”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던 마를로네가 참호에 기댄 채 별빛에 의지하여 적진을 노려보고 있는 베르크 란에게 나지막한 어조로 물었다.
“그 카스무어 장군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대단해?”
베르크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장군이라기보다는 행정가에 가까워 보이는군.”
“행정가?”
“공성전에선 장군보다는 행정가가 더 잘할 거라는 농담은 내가 젊던 시절에도 있었는데, 진짜 행정가를 데려올 줄이야.”
“어떤 의미에서?”
“모든 물자를 사전에 준비하고 필요로 하는 소모품을 끊임없이 조달하고 공급하는 능력, 각 부대에 정확하고 가능한 임무를 하달하는 능력, 그 부대가 전과 아니, 할당량이 더 여기선 맞는 표현이겠지. 할당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즉각 다른 대체 부대를 투입하는 융통성,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엮어 하나의 커다란 목적을 향해 경주하게 하는 안목. 그런 것들이 있는 거지.”
“머리가 좋아야겠네?”
“머리가 좋아야지. 애당초 공성은 공학과 기하학이라는 학문을 요구하니. 하드리멘디 공작이라고 했나. 그 인간이 공학자라는 소문도 파다하다. 저기 대포를 옮기는 게 보이지?”
“응. 평행호? 라는 곳으로 옮기고 있네?”
“평행호 쪽에 설치한 포루를 봐라. 어디를 향하는 것처럼 보이냐?”
“어……. 능보 쪽?”
“적진을 향해 돌출된 삼각형을 이루는 능보의 한 변과 정확히 수평을 이루는 지점이다. 저기서 포격을 시작하면 능보의 한 변이 고스란히 쓸려 나가겠지.”
“그, 그렇구나.”
마를로네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제대로 씻지 못해 두피에 이가 생겼다.
‘윽.’
펑! 펑! 펑!
머리 위에선 성벽에서 설치한 포대가 밤의 어둠을 몰아내며 불을 뿜었다.
포탄은 도시에 접근하는 참호를 강타했다.
비명과 아우성이 있었고 뒤이어 정적이 찾아왔지만, 그 정적은 이내 카스무어 쪽에서 울려 퍼진 총성이 깨뜨렸다.
타타타탕!
“죽어라! 배교자들아!”
탄환은 헛되이 허공을 지나치는 데 그쳤지만, 그 뒤를 따르듯 어둠 속에 울려 퍼진 호탕한 웃음소리와 조롱은 공격자의 높은 사기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듯했다.
그러한 사기는 으레 병사 자신이 뛰어난 장군의 지휘를 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을 때 드러나는 법이다.
베르크 란은 패전의 원인을 어렴풋이 파악했다.
‘처음부터 진 싸움이다. 상대방이 너무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노리고 준비했어. 요충지에 최상급의 요새만 짓는다면 1년 넘게 버티고 늘어질 수 있다는 통념 그 자체를 공격했군. 카스무어 왕국이 칼을 갈고 온 거지.’
더는 볼 것 없다.
“슬슬, 여기를 떠나야 할 것 같군.”
“정말?”
마를로네가 눈을 반짝였다.
손녀의 기대에 찬 시선을 받으며 베르크 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는 볼 것도 없고 할 것도 없다.”
베르크 란이 먼저 참호를 지나 능보를 향했다.
“어디에 가시는지?”
능보의 입구에서는 어둠 속에서도 훤히 보이는 장신의 사내가 입구를 막은 채 베르크 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시내에.”
“지금은 대기하시오.”
낙센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하듯 말했다.
“급한 용무가 있는데.”
“이쪽이 더 급하오.”
낙센이 그만이 볼 수 있는 시야에 펼쳐진 어둠 속의 전장을 응시했다.
“포대를 공격할 거요. 도펠죌트너의 힘이 필요하오.”
“……공격이 끝나면 시내에 가도 될는지?”
베르크 란의 물음에 낙센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마를로네는 이 광경을 꿈에서 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심장 쪽에 아린 듯한 미세한 통증이 느껴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파편이 온몸에 박히는 듯한 악몽 같은 광경도 함께.
하지만 그 숨통을 끊은 건 뱀처럼 휘어지는 긴 할버드의 참격이리라.
‘뭐지? 이 장면은?’
자기도 모르게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마를로네는 낙센을 올려다보았다.
낙센의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은 어느새 그녀를 적의를 담아 노려보고 있었다.
* * *
자리에 복귀한 후 루페르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대역의 일 처리였다.
그가 그레나스에 있던 동안 문어의 모든 행적을 원점에서 재검토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흠잡을 곳이 없다.
결재한 서류, 주재한 회의, 교단 관계자와의 회동, 선제후를 비롯한 제국 군주와의 관계.
문어는 완벽에 가깝게 황제의 업무를 수행했다.
처음 문어에게 황제직을 맡겼을 때 봤던 건 헛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재주는 있어. 뭐 하다 온 놈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지만.’
문어는 울피아나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그 녀석은 루페르트가 꾸짖자 문어로 변해 버리더니 찾고 있을 때 언제나 불러 달라는 말을 남긴 후 허공 속으로 잠겨 들듯 사라졌다.
제국인은 문어를 먹지 않지만, 순간 루페르트는 그 문어를 탕으로 삶아 먹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문어가 가지고 온 재앙은 즉각적이었다.
“폐하. 안녕하세요?”
황제의 집무실에 울피아나가 와 있다.
무슨 직함인지, 무슨 자격으로 왔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냥 그녀가 거기에 있었고 문어가 허락했다.
“……좋은 아침이군요.”
울피아나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루페르트는 황제의 업무를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다. 문어를 쓴 대가가 이런 것이겠지. 하지만 곧 결과가 나올 것이야.’
곧 도시가 함락될 것이다.
그래도 전보다는 오래 버텼다.
공성을 시작한 지 석 달도 안 되어 무너진 과거와 달리 이번에는 벌써 5개월을 버티고 반년을 바라보고 있다.
과연 그 정도 시간을 도시가 벌어다 줬을 때 세상엔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가.
그것도 옆에 있는 울피아나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루페르트가 나름 신선하게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이유이리라.
다행스럽게도 울피아나는 집무실 구석을 차지한 채 직접 접근하거나 말을 걸어오는 경우는 없었다.
가끔 자기 하녀를 불러 낮은 목소리로 두런거린다거나, 집무실에 있는 책을 본다거나 가끔 이유 없이 배회하는 걸 빼면 직접적인 피해는 주지 않았다.
그 모습은 과거 위버하임 장원에 있을 때 루페르트의 방에 종종 침범해 오던 검은 고양이를 연상케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긴장의 끈을 놓을 순 없다.
루페르트는 그 어떤 상황에서라도 울피아나에 대한 경계를 잊지 않고 자신의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났다.
뜻하지 않은 만남이 루페르트를 기다리고 있었다.
* * *
“폐하. 오랜만입니다.”
골트문트가 찾아왔다.
그의 표정은 루페르트로 하여금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한 익숙함을 머금고 있었다.
꼭두각시 시절, 둘도 없는 충신이었던 그 시절의 표정이다.
마치 깐깐한 상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거래를 할 때 본심을 내비치는 얼굴이라고 할까.
“……아시다시피, 현재 제국의 정세는 극도로 불안합니다. 겉으로는 평화가 유지되고 있지만, 선제의 치세에 반발심을 가진 자들이 도처에 반역의 씨앗을 심고 있고 실제로 어떤 선제후는 공공연하게 그 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지요.”
처음 그가 본론에 들어섰을 때부터 루페르트는 변화를 감지했다.
그레나스의 함락, 그 이상으로 중대한 변화를.
“그레나스가 함락 직전이라고 하더군요. 신교도들이 극도로 분노하고 불안에 떠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 불안을 먹고 자라는 괴물이 이제 제국에 이빨을 들이대려 하고 있지요.”
침중한 선제후의 얼굴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역시, 이 사람은 다 알고 있었군. 그레나스의 함락으로 벌어질 일을.’
이전에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제국의 적들이 손을 잡고 제국을 집어삼키려는 걸 그저 중립이라는 미온적인 가면을 쓰고 좌시하기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골트문트, 본인 스스로가 손을 내밀었다.
“오히려 잘됐다고 봅니다. 선제후로 할 말은 아니지만, 제국은 한 번 부서질 필요가 있습니다. 너무나 많은 병폐와 악습이 지병처럼 제국의 몸을 썩게 만들었죠. 환부를 도려내는 것은 무서운 일입니다. 그 과정에서 환자들이 죽기 일쑤니까요. 하지만, 날카롭고 잘 드는 칼을 든 의사에게 환부를 도려낼 각오가 있어야만 살아남는 환자가 있겠지요.”
골트문트가 정중하게 루페르트에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이제는 구시대의 유물로 평가받는 기사의 서약이다.
“고어문트의 선제후이자 뤼백, 울리히, 하우프츠베르크의 공작, 데님손과 야우틀츠의 백작이자 맨발 속죄회의 회원이며 호라신의 시종인 에를라흐 골트문트 하겐 폰 고어문트는 이 시간부로 황제 폐하에게 순수한 충성을 맹세하며 호라교와 제국을 위해 남은 영혼의 잔불을 태울 것을 다짐합니다.”
“…….”
갑작스러운 서약에 루페르트는 당혹함을 금치 못했다.
‘왜, 갑자기 이 사람이? 이런 행동을…….’
아니, 알고는 있다.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다.
골트문트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서약이라는 건, 얽매일 필요가 없습니다. 반역자와 배교자를 제국에서 일소한다면.”
“…….”
“그때 가서 서약을 스스로 파기하시고 배필을 찾으셔도 무방하겠지요. 모든 사람이 비난한다고 해도 이 골트문트는 폐하를 지지할 겁니다.”
그가 말하는 바는 명확하다.
그의 딸, 울피아나와 결혼을 하라는 것이다.
“폐하도 제 딸에게 마음이 있으시지 않습니까?”
그 물음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필사적으로 그의 떨어지는 고개를 받치려 하지만, 단련되고 훈련된 이성이 그의 고개를 의지와 상관없이 떨어지게 했다.
골트문트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제 딸을 잘 부탁합니다.”
이튿날, 황궁에 한 사내가 찾아왔다.
지치고 상처 입고 누더기가 된 사내는 황제를 찾았다.
그는 홀로 왔고 그는 자신이 이름이 베르크 란이라고 말하며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