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39. 일곱 남작 (2)
지금까진 실패를 하면 바로 회귀를 했다.
마치 종을 두들기면 종소리가 나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 실패 중엔 루페르트가 제국 성인에게 죽임당하기 일보 직전이라는 어쩔 수 없는 상황도 있었지만 작은 실패만을 보고도 즉각 회귀한 적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를테면 마를로네의 죽음이라든지, 한스 징펠만의 죽음, 최근엔 피리스를 살리기 위한 시도에서 그러한 성향을 보였다.
뭐든 진득하게 끌고 간 적은 없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러한 조급함은 루페르트의 비참한 인생역정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
실패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기에 실패 그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확실히 있었다.
‘패배를 하더라도 왜 패배를 했는지, 확실히 봐야지. 일곱 남작을 끌어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일곱 남작이 실패한다면? 적어도 이번 세상에서만 볼 수 있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루페르트의 선택지는 두 가지로 좁혀진다.
도시 안에서 도시의 최후를 보거나, 아니면 도시 밖에서 도시의 최후를 듣느냐.
루페르트의 생각은 점차 전자로 기울어져 갔다.
멸망해 가는 도시 안에서는 사망 확률이 대단히 높다.
카를슈타인의 보고서에 의하면 포위선을 좁혀온 카스무어 왕국군은 공성 박격포와 야포를 동원해 도시의 건물을 공격했다고 한다.
그 파멸의 세례 속에 무수한 사람이 죽었다.
어쩌면 루페르트도 그 눈먼 포탄에 맞아 죽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여기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있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은 건강했고 특별한 문제는 없었다.
도시가 함락된다고 해도 그들은 거뜬히 살아남을 것이다.
“만약에.”
확실히 하기 위해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에게 직접 물었다.
“이 도시가 함락당한다고 했을 때, 당신과 손녀는 살아남을 수 있나?”
베르크 란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도시가 불바다가 된다고 한들, 살아 나갈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나? 마를로네?”
“뭐, 도망은 우리 특기니까. 이미 탈출로를 확보하기도 했고.”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특히 마를로네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응? 뭐죠? 저에게 할 말씀이라도 있으세요?”
“같이 가지 않겠나?”
“네?”
마를로네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알다시피 내겐 카스무어 왕국 측에도 통하는 신분증이 있다. 카스무어 왕국의 병사를 만나러 갈 때까지 호위가 필요하기도 하고.”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함께 탈주를 제안한 건 그녀를 걱정하는 것도 있겠지만, 과거의 경험이 더 큰 지분을 차지했다.
‘전처럼 베르크 란이 심각한 얼굴로 내 앞에 서는 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란 말이지.’
또 그에게 잡혀 창밖으로 던져지고 싶진 않다.
이번엔 그를 직접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가 분노한 채로 황궁에 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마를로네는 이미 이 전장에서 한 차례 죽은 적이 있으니까.
당연히 따라올 거라 생각했다.
그녀는 처음부터 이 전장을 싫어했고, 빠져나가고 싶어 하는 모습을 몇 번이나 노골적으로 보였으니까.
그런데 의외의 결과가 나타났다.
“여기 남을래요.”
마를로네가 눈을 깜빡였다.
“여기 남아서 할아버지 옆에 있어야죠. 보기엔 무서운 사람이지만 사실은 칠칠치 못한 노인이죠.”
“노인은 아니다.”
“아무튼, 할아버지가 간다면 저도 갈 것이고 할아버지가 남는다면 저도 남을 거예요. 그쪽이 제 고용주라고 하더라도 말이죠.”
깃털처럼 가볍고 자유로운 느낌이 있는 그녀가 차분한 표정으로 눈을 내리깐 채 쓸쓸히 덧붙였다.
“……혹 우리가 죽는다면 폐하에게 말씀이나 전해 주세요. 폐하를 위해 묵묵히 죽어 간 이름 없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다고.”
“…….”
“아, 하나가 더 있네요.”
“뭐지?”
“공 좀 그만 차라고 하세요. 진짜 사내아이도 아니고. 위르벨도 이제 공은 안찬대요.”
“이제 안 차는데?”
조금은 억울한 마음을 담아 루페르트가 말했다.
“응? 그걸 어떻게 아시죠?”
“그야, 폐하의 측근이니까.”
적당히 얼버무린 후 루페르트는 돌아섰다.
조금 위험한 순간도 있었지만, 베르크 란 조손의 모습을 보니 믿음이 간다.
그들은 멸망해 가는 도시 안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지키고 있었다.
‘아마 이전에 마를로네가 죽은 건, 우연한 사고겠지.’
루페르트는 탈출 계획을 잡았다.
탈출로는 이미 베르크 란이 알아본 상태였다.
“악취가 나지만, 지키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오래된 도시엔 도시의 관리자도 모르는 수로가 즐비하게 있다.
모종의 이유로 폐쇄됐거나, 버려진 채로 관리자가 바뀌면서 인수인계가 안 되어 잊힌 것들이다.
첩자 성격을 띤 임무에서 탈출로 물색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카스무어 왕국군이 참호를 파기 전부터 베르크 란은 도시의 각 영역을 살피며 탈출로를 준비했다.
“여기가 지키는 사람도 없고 안전해 보이더군요.”
베르크 란의 호위를 받으며 루페르트는 문제의 수로로 향했고, 수로의 입구에서 베르크 란에게 손을 흔들었다.
“여기서부터는 혼자서 가겠습니다.”
“출구까지 호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괜찮아요.”
이제부터 여간한 일은 혼자서 해결해 보고 싶다.
황제라고 모든 걸 잘할 필요는 없겠지만 적어도 자신의 일은 자기가 해결하는 게 맞다고 루페르트는 어느 순간부터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아마 티그리트와 만난 직후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자신의 편이 아무도 없다는 걸 느꼈을 때.
루페르트는 완벽히는 아니겠지만, 어지간한 일은 홀로 서겠다고 다짐했다.
‘이 정도 수로도 혼자서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겠지.’
이번 그레나스 공성은 시작일 뿐이다.
얽히고 얽힌 제국의 위기를 해결하려면 이보다 더하고 어려운 위기도 극복해야 한다.
‘나는 평범한 황제가 아니다. 왕좌에 앉아 사람들에게 명령이나 내리고 보고를 받아서는 나의 치세를 안전하게 마무리 지을 수가 없다.’
직접 움직여야 한다.
어쩌면 그곳이 총탄이 빗발치는 전장일지도 모른다.
횃불 하나에 의지한 채 루페르트는 수백 년 동안 버려진 수로를 홀로 걸었다.
벽면엔 잊힌 시대의 흔적이 더러운 물때와 이끼가 낀 채 을씨년스럽게 나타나 있었다.
룸 시대의 것인지, 아니면 룸어에 능통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구역에선 룸어로 가득 찬 낙서를 볼 수 있었다.
거기엔 루페르트도 잘 아는 고대 시인의 아름다운 시구는 물론이고,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저열한 음담패설이 구분 없이 적혀 있었다.
그 수많은 낙서 중 하나의 글귀가 루페르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 신도 기도를 할까? ]
“…….”
루페르트는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신인 전지전능하기에 신이다.
기도라는 건 미약한 존재가 기복을 위해 기원하는 행위.
신적인 관점에서 보면 일종의 구걸이다.
신도 구걸을 할까?
루페르트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전지전능한 자가 왜 그런 짓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 신이 신 같지 않다면?
루페르트는 언제부터인가 자신의 일부가 된 것 같은 소라고둥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우리 여신님은 그래, 신 같지가 않지…….’
칭얼거리는 여자아이.
수많은 일이 있었지만 변하지 않은 여신의 심상이다.
어둠 너머에서 밝은 빛이 비친다.
잔뜩 녹이 슨 채 휘어진 창살 또한 보인다.
출구다.
출구를 나서는 순간 루페르트 앞에 날카로운 것들이 찌를 듯이 쇄도했다.
익숙지 않은, 과할 정도로 많은 단어를 가진 말소리가 들려왔다.
뾰족한 철모를 쓴 카스무어인들이 루페르트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그들을 응시하며 품속에서 서찰 하나를 꺼내 그들에게 내밀었다.
“나는 제국 시민이다. 카를슈타인 대령에게 날 안내해라.”
* * *
“아, 당신이 폐하께서 말한 슈톨비히 남작이시군요.”
카를슈타인 대령은 당연한 일이지만 루페르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안개 가면의 권능으로 보호받는 루페르트를 알아볼 수 있는 건 리프니에를 제외하면 아무도 없으니까.
“어떻습니까? 도시의 상태는?”
“음. 솔직히 말해서.”
루페르트는 찌푸린 얼굴로 저 너머에 그림처럼 자리 잡은 요새 도시를 바라보았다.
“오래는 못 버틸 것 같더군요.”
“하드리아멘디쿠스 장군은 대단한 사람입니다. 육로로 연결되지도 않은 이국에 8만 명이나 동원할 수 있는 카스무어 왕국의 국력이 더 대단해 보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카스무어 왕국의 부는 역시 신대륙에서 나오는 건가요?”
“폐허와 역병밖에 없다고 떠들고 있지만 카스무어인들은 뻔질나게 그들의 범선을 신대륙으로 보냅니다. 우리 제국 탐험가들은 폐허와 역병밖에 찾지 못했지만 카스무어인들은 우리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보물을 찾은 게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요. 아무튼, 본국으로 돌아가 봐야겠습니다.”
“하드리아멘디쿠스 장군을 만나 보지 않겠습니까?”
카를슈타인이 깜짝 제안을 했다.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동맹국의 가장 유능한 장군이자, 현재 그레나스를 지켜야 하는 입장에선 최대의 적수를 직접 만난다는 것이.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내면에서 강한 저항감을 느꼈다.
뭐랄까.
그 사람을 만남으로 그 사람의 이미지가 굳어지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를 만나는 것만으로 하드리아멘디쿠스라는 거대한 존재가 피상적으로 굳어 버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을 느꼈다.
‘아니, 그 사람은 계속 내 안에서 모호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 사람을 넘기 전까진 말이지.’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 이후는 안락하고 호화스러운 여행의 연속이었다.
저지대를 지나 트라이아를 지나 몇 개의 공작령과 백작령, 독립 제국도시를 지나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에 돌아왔다.
“잘하고 있었냐?”
황제의 별궁-미궁에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대역을 충직하게 수행한 문어와 재회했다.
“별거 아니지. 이런 하찮고 원시적인 소국의 일 정도야 내겐 아무것도 아니다.”
여전히 문어는 오만하고 거만했다.
진짜 황제인 루페르트보다 수십 배는 말이다.
그 모습에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넌지시 물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어?”
“어떤? 암살? 독살?”
“아니, 그런 무시무시한 거 말고 개인적인 문제.”
“여자?”
루페르트는 여자가 자신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가 있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런 거.”
이에 문어는 피식 웃으며 지나가듯 한마디를 던졌다.
“울피아나라는 여자가 찾아왔더군.”
“뭐……?”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내와서 그렇게 하라고 명했다.”
“아니, 왜?”
“그렇게 해야 할 거 같으니.”
문어가 손톱을 다듬다가 갑자기 손을 역방향으로 꺾었다.
그 순간 거짓말처럼 문어의 촉수처럼 변하며 책상 가장자리에 있는 사과 하나를 휘감았다.
와그작.
문어가 루페르트의 얼굴로 사과를 깨물었다.
‘무, 문어도 사과를 먹는 건가?’
루페르트는 순간 떠오른 의문을 흩어 버리고 정색한 얼굴로 되물었다.
“그 여자는 위험한 여자다.”
“위험하지 않아.”
문어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그렇게 고까운 표정을 지을 수 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이내 은은한 분노가 담긴 얼굴로 언쟁을 이어 나갔다.
“아니, 그 여자는 안 돼. 난 그 여자가…….”
“왜? 그 여자가 두렵나?”
“그, 그래. 두려워. 생각만 해도 미칠 듯이 두렵다고! 그 여자가 나한테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그 여자가 과거의 너에게 무슨 짓을 했건 간에 현재의 그녀는 너를 사모하는 수많은 여성 중 하나일 뿐인데.”
촉수가 루페르트를 닮은 얼굴의 입에서 사과의 씨앗을 빨판에 붙인 채 끄집어냈다.
“……그래서, 그 여자는 어떻게 하기로 했지?”
“어떻게 하냐니. 황제 옆에서 황제의 일을 돕고 있지. 뭐, 머리는 나쁘지만 열심히 하려는 의지는 있더군. 내가 싫어하는 시종을 용케 알아내고 내가 안 보이는 곳에서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혼내 주는 눈치도 있고.”
“뭐, 뭐라고?”
“왜? 그것조차 용납 못 할 정도로 속이 좁은가?”
문어는 루페르트의 창백하게 질려 가는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순수하고 착한 아름다운 여성 하나 포용 못 하는 자가 제국을 포용하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