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39. 일곱 남작 (1)
하드리아멘디쿠스가 그레나스를 침공할 때 데리고 온 8만 명이 전부 병사는 아니다.
이 중 3만 명은 군대와 행동을 함께 하나 오로지 노역에만 종사하는 노무자다.
흔하게 볼 수 있는 형태는 아니다.
대규모 비전투원은 유사시 군대 그 자체의 발목을 잡는 아킬레스건이 되고도 남으니까.
하지만 카스무어 왕국이 이를 강행할 수 있었던 건 절대적이라는 최상급의 표현을 써도 될 정도의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저지대 연방이 카스무어 왕국의 군대와 야전을 벌이지 않으리라는.
지난 30년간, 저지대 연방이 카스무어 왕국 상대로 야전을 펼쳐 승리한 건 1번에 불과했다.
나머지 8번은 처절한 참패로 끝났고 연방의 존립마저 흔들리게 할 정도였다.
애당초 야전에서 이길 자신이 없기에 국토로 요새로 도배한 게 저지대 연방의 현실이다.
하드리아멘디쿠스는 그 사실을 알기에 3만 명이나 되는 전문 노무자를 데리고 와 노역을 종사케 한 것이다.
전투력도 충성심도 의심스럽지만, 급료가 지급되는 한에서 노무자들은 분주히 움직이며 제 역할을 다한다.
포위를 시작한 지 단 70일 만에 카스무어 왕국은 두 개의 거대한 공사를 완성했다.
하나는 도시를 둘러싸는 포위망의 완성이다.
총연장 40km에 달하는 방어선이 만들어졌다.
그 대부분은 얕게 찬 참호로 이루어졌지만, 일부 중요 길목엔 돌과 나무로 만든 요새가 작은 거인처럼 아래를 내려다보며 요충지를 든든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물길의 폐쇄다.
메르와 얄타라는 이름을 가진 두 개의 개천이 중간에서 막혀 버렸다.
무지막지한 공사였다.
성벽 위에 연방 병사는 3만 명의 노무자들이 마치 끝이 없는 뱀처럼 늘어선 채 자재를 나르고 개천을 막는 광경을 보아야 했다.
개천을 막는 작업은 단, 한 달 만에 끝났다.
다만 그 결과가 나타난 건 공사가 끝나고 40일경이 지난 뒤였다.
주변의 환경 자체가 변했다.
두 개천에서 흐르지 못한 물은 인근으로 번져 안 그래도 질척한 겨울의 대지를 늪처럼 만들었다.
물줄기가 막혀 버린 도시 주변은 처음엔 과거의 수량을 머금고 있었지만, 흘러가는 시간 앞에서 서서히 마른 땅을 드러냈다.
메르와 얄타가 이루어져 하나를 이루는 아르망 강은 수심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 여전히 물줄기가 남았지만, 안타깝게도 그 물줄기는 간신히 도시에 닿는 정도에 그쳤고 그마저도 카스무어 왕국의 병사들이 일전에 포위할 때 만든 부교 너머에 나무와 돌, 물줄기를 막을 만한 것들을 마구잡이로 던져 넣었다.
포위가 시작된 지 91일째, 도시 전체는 말 그대로 마른 땅에 둘러싸인 형국이 됐다.
도시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럴 수가. 아르망이 마르는 건 처음 봐.”
“대체 우리 군은 뭘 하는 건가? 카스무어 놈들이 물줄기를 세 개나 막을 동안!”
시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포격이나 물가 통제, 함락에 대한 두려움은 담담하게 떨쳐 버릴 수 있었지만 당장 마시고 씻을 물이라는 생활에 직접적인 것이 박탈당하자 바로 두려움과 걱정을 드러낸 것이다.
이에 대해 도시의 수비 사령관 얀한데는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소요가 강해지면 기마병들을 동원해 몽둥이와 채찍으로 군중들을 해산시킨 게 그가 한 유일한 군정이었다.
“카를슈타인의 보고서와 내용이 크게 달라졌어.”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루페르트 본인이었다.
역사를 바꿨다.
그 결과는 지켜봐야 할 일이겠지만 적어도 공성의 구도를 크게 바꾼 건 사실이다.
“그 괴물을 죽인 것이 조건이 되어, 하드리아멘디쿠스로 하여금 물줄기를 막는 작전을 구사하게 한 건가.”
물줄기가 말라 버리자 자연스레 능보와 보루 사이의 해자도 마른 땅으로 변해 버렸다.
능보가 함락됐을 때 보루의 안전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하드리아멘디쿠스는 다시 한번 다섯 방향에서 동시에 참호를 파고 접근하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성 때와 같은 움직임이었지만 이를 바라보는 병사들의 마음은 전보다 훨씬 더 암담하고 무력했다.
물줄기의 차단은 병사보다 시민에게 더 큰 영향을 미쳤다.
“마실 물이 없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드리아멘디쿠스가 8만 명이나 끌고 왔을 때부터 도시의 운명은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야.”
“이렇게 된 이상, 치욕스럽지만 항복을 고려해야 해. 지금이라도 항복을 하면 관대한 처분을 받을 수 있을 거야.”
“맞아. 병사들도 군기와 무기를 지닌 채 나갈 수 있을 거야. 이번의 실패를 거울로 삼아 다음 요새에서 더 잘 지키면 그만이야.”
먹구름 같은 패배주의가 시민들의 얼굴에 드리워졌다.
생활의 불편이 그대로 사기에 영향을 미치고 만 것이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테타우 공성 당시, 루페르트는 황궁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던 시민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항복을 요구하지 않았다.
제국의 적 융커스 베샤문트와 그 병사들이 어떤 인간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함락하는 도시의 시민을 살려 두지 않는다.
모조리 죽이고 불태우고 시체와 재만을 남긴다.
그들이 황궁 앞에 아우성친 건, 그들도 어찌할 바 모르는 마음을 진정하기 위해서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제가 뭐라도 한마디 해 주길 바랐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얀한데도 마찬가지다.
그 심정은 이해한다.
간절한 대중 앞에서 할 말이 거짓말 혹은 헛된 위안밖에 없다는 걸 알고서도 그 앞에 그러한 말들을 쏟아 낸다는 건 자신마저 속이는 게 자연스러운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묘기니까.
“…….”
루페르트는 패배를 직감했다.
하지만 패배 그 자체는 루페르트의 관심사가 아니다.
황제인 그가 여기에 직접 온 이유는 패배의 원인을 밝히고자 함이다.
‘이미 이 싸움은 이길 수 없어. 처음부터 이길 수 없는 싸움이긴 했지. 하지만 물줄기를 막는다는 작전을 예상하지 못했던 건가. 얀한데라는 자는?’
처음 봤을 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직업군인으로 보였다.
아마 귀족의 아들일 것이고 젊은 시절 기병대에서 복무해 경험을 쌓고 그 경험과 가문의 재산으로 장교직을 사고 그 장교직을 간판 삼아 곳곳에서 활동했을 것이다.
휘하의 연대를 만들 정도로 큰 군인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연대를 만드는 위험을 부담하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어느 쪽이든 그레나스의 얀한데는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하드리아멘디쿠스가 물줄기를 막는 동안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사실 뭐, 어떻게 할 방도가 없긴 했지만 적어도 도시 내적으로는 수자원 고갈에 대한 방안을 강구해야 했는데 얀한데가 쓴 방법은 도시 안에 흐르는 운하의 물을 길어 소량을 비축한 게 전부였다.
‘내가 볼 땐 얀한데는 범용한 장수다. 하드리아멘디쿠스에 맞서기엔 지나치게 평범해.’
이 의심이야말로 루페르트가 원한 것이다.
‘얀한데라는 조각을 바꿔 끼우면 달라질까?’
루페르트는 주변에서 은밀하게 얀한데의 평가를 확인했다.
가장 먼저 질문을 던진 건 다름 아닌 베르크 란이었다.
“……글쎄요.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공성전에서 수성하는 입장이 늘 수동적으로 대처할 수밖에 없다지만, 얀한데라는 사람은 약간 지나칠 정도로 수동적이더군요.”
마를로네에겐 의견을 묻지 않았지만, 그녀도 상당히 비판적인 반응을 자진해서 보였다.
“하는 일 없이 술만 마신다고 하네요. 이미 시내엔 사령관이 제국의 첩자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깔려 있어요.”
“첩자는 아니겠지.”
베르크 란이 옆에서 한마디 했다.
“이런 5성급 요새를 이렇게 쉽게 내준 패장이 되면 누가 그를 다시 써 주겠나? 그걸로 그 인간의 군사 경력이 그대로 끝나 버리는데.”
이름 없는 연방 병사는 중립적인 반응이었다.
“사령관의 초동 대처는 정석적이고 훌륭했습니다. 하지만 상대방은 하드리아멘디쿠스입니다. 상대가 나빴던 것이겠죠. 대포도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강을 막아 버리는데, 사령관이 신도 아니고 어떻게 그걸 요새 안에서 막을 수 있겠습니까?”
낙센의 평가는 짧았다.
“무능한 지휘관이오.”
그리고 직설적이었다.
그 텅 비어 버린 것 같은 푸른 눈은 물 대신 절망에 잠겨 가는 도시의 풍경을 보고 있었다.
“곧 역병이 돌겠지.”
“역병? 아직 죽은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도시의 물이 마른다는 건, 하수도의 물도 마른다는 이야기입니다. 악취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아. 그러고 보니.”
도시 하부엔 인간의 배설물과 쓰레기가 풍기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악취가 스멀스멀 기어올라 안 그래도 사기가 떨어진 시민의 마음마저 할퀴고 있었다.
“시체만이 역병의 근원은 아니지요. 더러운 것에서도 역병은 발생합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거인병의 나이는 백 살이 훌쩍 넘는다고 했었지? 겉보기엔 많아 봐야 서른 정도의 얼굴인데. 이 거인의 경험은 무시할 수 없어. 잔혹한 성격이지만 능력은 확실하다.’
루페르트가 낙센에게 물었다.
“얀한데 말고 물망에 오른 사령관이 있었습니까?”
“얀한데가 아닌 다른 누가 오더라도 결과는 같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요청한 사람들이 왔다면 결과는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르겠지요.”
“어떤 사람들이죠?”
루페르트가 이채를 드러내며 물었다.
낙센은 잠시 뜸을 들이며 생각을 하다 곧 루페르트를 내려다보며 불쑥 말했다.
“일곱 남작이라고 아십니까?”
“일곱 남작?”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의문부호가 떠올랐다.
‘그 녀석들?!’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룸 방문을 마치고 붉은 산맥에서 제국으로 돌아갈 때 무려 황제를 공격한 무리다.
그 실력은 확실했다.
무려 한스 징펠만과 솜씨를 겨루던 총사가 있었고 그 술수 또한 여신의 권능이 없었다면 몇 번이고 목숨을 잃었을 정도로 치밀하고 교활했다.
그 일곱 남작은 현재, 제국에서 수배가 떨어진 몸이다.
루페르트 본인이 직접 황제에 오르자 제국의 적까진 아니지만, 그 아래 단계의 범죄자로 선포했다.
“제국 황제가 수배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일곱 남작이 숨을 일도 없었겠지요. 연방과 제국이 별개의 나라라고 하나, 연방이 제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니까요.”
“그 일곱 남작이 뭔가를 해낼 수 있습니까?”
루페르트의 물음에 낙센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그가 다시 한번 자신을 가리켰다.
“……나 또한 일곱 남작의 구성원 중 하나였으니.”
* * *
낙센의 말대로 도시에 역병이 퍼지기 시작했다.
곳곳에 빗물을 받아 술을 섞어 마시는 것으로 시민들은 물 부족에 대응했지만, 야속하게도 줄곧 내리던 겨울비는 정작 그 은혜를 이용하려 하자 매정하게 발길을 끊어 버렸다.
곳곳에서 기침 소리와 고통에 찬 신음이 울려 퍼졌다.
도시 전체가 죽어 가는 것처럼 보였다.
쿵! 쿵! 쿵!
성벽 위에서는 대포가 불을 뿜는다.
도시를 향해 파고들어 오는 참호의 진격을 막기 위해서다.
어떤 포탄은 참호에 꽂히기도 했고 어떤 포탄은 아무도 없는 벌판을 무의미하게 두들기기도 했다.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공병들은 갖은 포격을 두들겨 맞으면서도 끈질기고 치열하게 도시를 향해 숨통을 조여 왔다.
도시의 함락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어떻게 할까. 회귀를 해야 하나.’
파멸을 앞둔 도시 안에서 루페르트는 자신의 행동을 정하고 있었다.
“아니.”
황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전쟁의 끝을 봐야겠어.”
작지만 거대한 진보가 루페르트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