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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63화 (163/225)

163화 38. 더러운 전쟁 (3)

땅굴에 대처하는 건 땅굴이다.

포위된 입장이라고 해도 땅굴 안에서는 숫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곧 무너질 운명의 굴 안에서는 양방 모두 많은 병사를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소수의 용감하거나 무모한, 혹은 절박한 사람들이 다른 쪽의 비슷한 사람들과 대치한다.

낙센은 이 굴속에서 가장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지나칠 칠 정도로 키가 큰 그에게 낮고 비좁은 땅굴은 상극과도 같으니.

그러나 그 거인병은 뱀처럼 유연했다.

허리를 거의 90도로 굽힌 상태에서도 허리를 편 것처럼 기민하게 움직였고, 장기간 그런 자세를 취해도 별다른 피로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안 불편하신가?”

보다 못한 베르크 란이 물을 정도였다.

그 무뚝뚝한 사내가 물을 정도니, 낙센의 작업 모습이 얼마나 기괴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에 낙센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순수하게 땅굴 안에서 보낸 시간만 10년이 넘을 거요.”

“……몇 년이나 전쟁이 있었던 거요?”

베르크 란이 평소보다 더 굳은 얼굴로 물었다.

푹!

낙센이 땅을 파헤쳐 한 움큼의 흙을 퍼내고는 대답했다.

“100년 전에도 전장에 있었지.”

“……역시 당신들은.”

“오래 사는 게 축복만은 아니야.”

낙센이 다시 삽을 놀렸다.

푹!

“어차피 우리 같은 사람들은 영원히 전장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낙센이 재차 땅을 파헤치고는 베르크 란을 향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커다란 돌덩이가 있다.

푹!

이번엔 베르크 란이 삽을 놀렸다.

잠시 멈췄던 삽은 이내 무시무시한 힘을 받아 자루가 거의 꺾어질 기세로 휘더니 이윽고 사람 몸통만 한 돌을 빼냈다.

순간 굴 전체가 흔들렸지만 자리에 있던 병사들 중 놀라거나 두려움을 드러내는 병사는 한 명도 없었다.

단지 씨익 웃을 뿐이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얼굴에서 용기보다는 초연함이라는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무뎌진 것이다.

수많은 생명의 위험 속에서 죽는다는 공포를.

그 안에서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이 저 병사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는 확인했다.

그토록 말이 없던 사내가 낙센에게 먼저 말을 걸며 누구보다 부지런히 삽을 놀리고 흙을 퍼내는 건 단순히 정보를 캐거나 루페르트의 계획에 동참하려는 의지보다는 이 상황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마치 오랫동안 어항에 갇혔던 물고기가 연못이나 바다에 풀려 조심스럽게 지느러미를 놀리는 대신 마음껏 헤엄치는 걸 만끽하는 것처럼 말이다.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호탕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지지대! 지지대를 가지고 와!”

병사들은 신속하고 기민했다.

한쪽에서는 땅을 파고 한쪽에서는 그 흙은 수레에 담아 바깥으로 나르고 다른 한편에서는 침목을 가진 병사들이 토굴을 떠받치는 공사를 수행했다.

그것은 총과 검을 휘두르지 않을 뿐이지 또 하나의 치열한 격전을 방불케 했다.

‘이것이 전쟁인가.’

낙센은 이 지하 전쟁의 전문가였다.

뱀처럼 비스듬히 허리를 구부린 채 그는 카스무어식 철모를 쓴 얼굴을 벽면에 갖다 대고 소리를 들었다.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

베르크 란이 그에게 물었다.

“그 괴물을 상대한 적이 있소?”

“놈은 눈이 멀었지만, 코가 아주 밝아 흙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귀신같이 찾아내 땅을 파 그걸 쟁취한다오.”

낙센이 부하 하나를 불러 넌지시 지시했다.

“시체가 필요한데.”

“시체 말입니까?”

“그래. 시체. 썩기 시작하거나 이미 썩어 버린 것도 좋고. 사형수나 무연고자의 시체 같은 건 없나?”

“아니오. 포위 전에 모조리 쫓아냈을 겁니다.”

“그럼 구교도의 묘라도 파헤쳐야겠군.”

낙센이 작업을 멈추고 길쭉한 몸뚱이를 유연하게 놀려 뒤로 돌더니 삽을 던져 놓고 땅굴 밖으로 나갔다.

“바이들링과 부겔은 나를 따르고 나머지는 작업을 계속해. 되도록 멀리 땅을 파도록 해. 잠시 대령에게 갔다 오지. 아, 그리고 여기 토박이 하나 있으면 붙여 달라고 해. 민병대가 좋겠군.”

베르크 란은 자리에 남았다.

그는 묵묵히 다른 병사와 함께 흙더미와 먼지투성이가 된 채 삽을 놀렸다.

루페르트는 낙센의 뒤를 따랐다.

땅굴도 좋지만 상황의 변화를 읽으려면 성벽 밖의 전투를 지휘하는 이 사내의 움직임에 주안점을 두는 게 현명한 선택으로 보였다.

능보 쪽으로 돌아오자 병사들이 경의에 찬 눈으로 길쭉한 거인병을 올려다보았다.

능보 너머엔 강과 연결된 해자가 있었다.

위태로울 정도로 좁은 부교가 능보와 해자를 연결하고 있었다.

낙센과 그 일행, 그리고 루페르트는 부교를 건너 높이 솟고 별처럼 삐쭉삐쭉 각진 모서리를 여럿 가진 보루에 도착했고 보루 너머에 있는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성벽 너머엔 오밀조밀한 저지대식 주택이 동화 속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시민 몇 명이 광장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포성이 들리고 포탄이 주변에서 떨어지지만 그들의 얼굴에선 별다른 두려움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전부터 느끼고 있었지만, 내부의 원인으로 이 도시가 함락된 건 아니다.’

슬슬 이해가 가지만 여전히 알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은 카를슈타인의 보고서를 떠올리며 루페르트는 낙센과 함께 이 요새의 수비대를 지휘하는 얀한데 대령의 지휘소를 방문했다.

얀한데는 쫓겨난 호라 교단 목회자가 쓰던 교회 건물을 지휘소로 쓰고 있었다.

호라에게 바칠 성찬을 올리던 제단 위엔 총과 검이 놓였고 신자들이 앉아 있던 벤치는 조각조각이 나 땔감으로 전락했다.

얀한데는 도시 전체와 인근 지형을 그린 거대한 지도 앞에서 참모들과 함께 치열한 논쟁을 펼치고 있었다.

낙센이 특별한 사람인 건 확실하다.

큰 키의 거인병이 나타나자마자 모두가 말을 멈추고 기이할 정도로 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낙센 대장. 무슨 일이오?”

대령이 대하는 태도만 봐도 일반 병사나 하사관을 대하는 태도가 아니다.

정중하진 않지만, 예의를 잃지 않는 모습만 봐도 확실하다.

“시체가 필요합니다. 사령관.”

“시체요?”

“뒤편에 묘지에 있는 거 전부 구교도의 시체 맞지요?”

“그럴 겁니다.”

“몇 개 꺼내 쓰겠습니다.”

이에 대령은 불쾌감을 내비쳤다.

그는 구교도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또한 직업군인이며 용병이다.

용병들은 돈을 받고 싸우는 용병이라는 지위를 최상의 가치에 놓는다.

고향도 민족도 종교조차 용병의 의무보단 아래에 있는 것이다.

대령이 이유를 물었다.

“어디에 쓰려고 시체를 파헤친단 말입니까?”

“놈들이 시체를 먹는 괴물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 녀석을 끝장내려면 시체가 필요합니다. 어차피 그 괴물도 신교도의 시체를 먹고 여기까지 오고 있을 테니, 녀석에게도 구교도의 시체 살점 정도는 먹여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낙센의 말은 느릿하면서도 발음이 정확했고 높낮이가 일정했지만, 거인 특유의 중저음이 그의 조곤조곤 말에 상당한 압력을 부여했다.

대령은 일말의 저항감을 느꼈음에도 낙센의 청을 수락했다.

“……성벽 밖의 일은 그 쪽에게 일임했으니 그렇게 하세요.”

낙센이 고개를 까딱이고 그 아래 굳은 표정의 부하들을 이끌고 돌아섰다.

“대령께서 허락하셨다.”

교회 밖엔 루페르트가 아주 잘 아는 여성이 낭패한 표정을 지은 채 비를 맞으며 서 있었다.

마를로네다.

“어머, 류크 님.”

그녀는 루페르트를 발견하자 어색한 미소를 머금으며 아는 체를 했다.

그 모습을 본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녀석, 땡땡이를 친 건가. 하여간.’

낙센은 마를로네에게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의 병적으로 푸른 눈이 향한 곳은 마를로네 옆에 서 있는 소년이었다.

“위르벨이라고 했나.”

“네. 그렇습니다.”

소년이 힘차게 대답했다.

낙센이 소년에게 물었다.

“여기 있는 묘지의 주인들을 잘 아나.”

“네. 대장님.”

“최근 한 달 이내에 묻힌 것, 적어도 반년 안에 묻힌 것들을 알려 주게.”

위르벨이 기억을 더듬으며 낙센에게 자신이 아는 정보를 알려 줬다.

낙센이 위르벨에게 예를 표했다.

“고맙네.”

그가 삽을 들었다.

그 삽은 일말의 망설임도, 망자에 대한 존중도 없이 비석을 부수고 땅을 파고 들어갔다.

위르벨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땅을 파는 병사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곧 관이 드러났고 그들은 아무렇지 않게 관을 열어젖혔다.

위르벨은 그 대목에서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곁에 있던 마를로네가 소년의 눈을 손으로 가려 주었다.

손바닥으로 가린 소년의 눈에서 따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눈물이다.

마를로네는 항의감이 있는 시선을 낙센에게 던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 이상한 거인이.

그는 아직 형태가 온전한 여성의 시체 한 구를 비롯해 십여 구의 악취 나는 것들을 수레에 실었다.

지저분한 모포가 시체들을 덮었다.

낙센이 마를로네를 지나치며 한마디 했다.

“도펠죌트너 여자. 구교를 믿나?”

마를로네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낙센은 코웃음을 치고 그녀를 지나 다시 거리로 향했다.

거리의 시민들이 수레에 실린 물건을 짐작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모포 너머로 삐져나온 건 누가 봐도 인간의 수족이니.

웅성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졌다.

낙센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아니, 그의 눈에 평범한 시민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는 것이 타당한 표현이리라.

루페르트는 이 모든, 가려져 있던 전장의 일거수일투족을 흐릿한 안개 가면 너머에 놓인 빛나는 눈동자에 담았다.

뭔가 잡힐 듯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간질간질한, 가려움이 루페르트의 의식 깊숙한 곳에서 느껴졌다.

* * *

망자의 시체들이 토굴 속에 쓰레기처럼 던져졌다.

끔찍한 악취가 좁은 땅굴 안에 퍼졌다.

병사들은 젖은 천을 입과 코 주변에 두르고 묵묵히 끔찍하면서도 비참한 작업을 수행했다.

일부는 웃음소리까지 냈다.

“쓰레기 같은 놈들. 생전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되더니 죽으니까 약간의 쓸모는 있어졌구만.”

루페르트는 낙센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낙센은 작업이 얼추 마무리된 즈음에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동방 제국이 그 괴물로 땅을 팠을 때 우리는 사람의 인력으로 그 괴물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걸 알았지요. 하지만 그 괴물이 뭘 좋아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시체들로 그걸 유인해서.”

낙센이 눈동자를 돌렸다.

거기엔 화약통을 든 병사들이 조심스럽게 통이 물에 젖지 않게끔 세심하게 포장을 뜯으며 불을 붙일 준비를 했다.

“놈이 이쪽으로 파고들게 해서 터뜨렸죠.”

잠자코 그 말을 듣고 있던 베르크 란이 낙센에게 물었다.

“동방 제국과의 전쟁에도 있었단 말입니까?”

그는 어느새 낙센을 자신의 연장자로 여기고 있었다.

낙센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러운 전쟁이었소. 제국인들이 포장하는 이상으로.”

“호오.”

베르크 란이 흥미를 드러내며 질문을 하고 루페르트가 그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하는 동안 참호 밖에서는 한 소년이 울음을 애써 참고 있었다.

마를로네가 그 소년, 위르벨의 옆에 서서 다정하게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유를 물었다.

“무서운 거니?”

위르벨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럼?”

위르벨이 땅굴 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응.”

소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엄마가 있어…….”

그제야 마를로네는 소년이 왜 무덤을 파헤쳤을 때 그토록 충격을 받았는지 알 것 같았다.

“……너, 구교도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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