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38. 더러운 전쟁 (2)
글만을 보고 어떤 사물의 성질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흔히 말하는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이 여기에 속한다.
대부분은 실제 눈앞에서 현상이 일어나고 몸으로 호되게 경험해야 그 사물의 성질을 이해하는 시늉이라도 한다.
루페르트는 후자였다.
좋은 말로도 머리가 좋은 편은 아니었다.
특히 전쟁이라는 행위는 루페르트의 이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영역이었다.
그러나 여기는 전장이다.
루페르트는 카를슈타인의 무미건조한 문장에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이 조금씩 눈앞에 보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런 것이었나. 그 사람이 말하는 게.’
루페르트는 최근의 기록을 보았다.
<1월 6일>
다섯 방향으로 접근호를 파가며 요새에 접근, 적군은 포격으로 대응.
괴이한 짐승이 한 번에 능보의 절반에 이르는 땅굴을 완성.
32명이 죽거나 다침.
<1월 7일>
한 무리의 기마 무리가 북쪽 외벽 작업 방면을 습격.
아군 기병대가 출동하자 황급히 도주.
간밤에 내린 비로 땅굴이 무너지고 보강 작업을 하던 12명의 병사가 매몰.
오후에 구출했으나 다섯 명이 죽었고 두 명이 불구가 됨.
제국 출신 병사들이 급료 문제로 항의.
정확한 피해 상황은 확인할 수 없었음.
<1월 8일>
짐승을 다른 곳으로 보내자 적들의 외부 정찰조가 짐승을 따라감.
갱도가 재차 무너짐. 간밤에 무너진 갱도를 참호로 전용. 수십 대의 수레가 쉴 새 없이 오감.
포격과 총격 등으로 100여 명의 사상자 발생.
<1월 9일>
적 요새 방면에 직선으로 향하는 접근호 완성.
2차 평행호 건설에 착수.
연대장 알데바란이 급체로 사망.
...
...
예전엔 그저 추상적으로, 마치 빠르게 흐르는 구름처럼 잡히지 않던 것들이 이 진창으로 가득 찬 전장 위에서 서니 명료하게 보이는 기분이다.
‘이런 느낌이었나.’
뭔가 큰 그림이 보인다.
이 전투가 어떻게 흘러가고 진행되는지.
어쩌면 루페르트의 무흥미가 자료의 해석을 필사적으로 막았을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만큼 전쟁 그 자체를 싫어하는 군주는 제국 내에서 보기 드무니까.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아는 미래의 기록을 토대로 저 나이를 추정할 수 없는 거인병에게 자신의 생각을 느릿하지만 논리정연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그 짐승이 핵심입니다. 한 번에 여기까지 관통하는 땅굴을 파, 땅을 무르게 하고 이를 접근호로 전용하는 것이지요. 물론 수많은 기만책이 있을 겁니다. 우리가 그 짐승을 경계하기 시작하면 그 짐승을 다른 방면으로 보내는 식으로 말입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낙센은 별 어려움 없이 루페르트가 뭘 말하려는지 이해했다.
“땅굴을 참호로 전용한다니. 상당히 급진적인 발상이군요. 얼마나 걸릴까요? 그 방법은?”
“3일이면 여기까지 닿는 접근호를 만들지 않을까요?”
“3일이라…….”
“상당히 빠른 시간이죠?”
“빠른 정도가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정입니다. 보통은 참호가 능보에 닿기 전까지 빨라야 2달, 저항이 심하거나 토질이 좋지 않으면 3달을 소요합니다. 그 과정에 하루에 수십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건 기본이고요.”
“하루에 수십 명이라. 상당한 손실이군요.”
“공성전이라는 건 지금 내리는 가랑비와 비슷하니까요.”
낙센이 높은 곳에 있는 입에서 하얀 입김을 내뿜곤 듬성듬성 지저분하게 수염이 자라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지며 씨익 웃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흠뻑 젖어 있죠.”
낙센이 부하들을 모았다.
그는 루페르트의 계획을 완전히 신뢰하는 건 아니었지만 땅굴을 파는 소리가 워낙에 가파르게 접근하고 있어 특단의 대책을 요구했다.
그가 선택한 술수는 결국 삽이었다.
“우리도 땅굴을 판다.”
지켜보던 마를로네가 푹 뒤집어쓴 챙 넓은 모자에 고인 물을 털어 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도 가야 해?”
그녀가 조부에게 물었다.
베르크 란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삽을 들었다.
“넌 류크 님이나 지키고 있거라.”
그 말을 들은 마를로네는 그녀답지 않게 방긋 웃으며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라고 말씀하시는데요. 류크 님?”
“아, 그게.”
마를로네에겐 안타까운 일이지만 지금 루페르트는 진심이다.
루페르트가 삽을 들며 빙그레 웃었다.
“나도 참가하려고.”
마를로네의 표정이 진창 속의 색깔처럼 변했다.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지나 작업조에 합류했다.
마를로네는 자신을 지나치는 류크라는 사내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는데 순간 그녀의 눈빛이 묘하게 변했다.
‘뭐지?’
뭔가 이상하다.
저 류크라는 사내에게서 익숙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이를테면 제국의 황제라든가.
하지만 곧 그녀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흔들어 그 생각을 털어 버렸다.
“황제가 여기에 왜 있겠어?”
그녀가 뒤로 돌아섰다.
뒤편엔 그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는 병사들이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저지대인 병사가 제국어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느낌의 언어로 물었다.
“거, 당신 정말 도펠죌트너인가?”
눈빛들을 보니 여자라서 우습게 보는 모양이다.
그래서 남장을 했지만, 지금은 딱히 남장을 할 생각이 없다.
그 저주받은 표식인 붉은 명찰을 뗐다.
지긋지긋한 차별의 표식을 뗀 것만으로 그녀는 늘 자신이 당당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받은 차별의 서러움이 조금이라도 상쇄될 거 같으니.
마를로네는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녀는 바닥에 놓인 삽을 보았다.
곧 마를로네는 그 삽을 들더니 삽을 지면에 꽂았다.
순간 불경한 힘이 그녀의 몸에 깃들며 그녀에게 평범한 사람이 낼 수 없는 괴력을 주었다.
푹!
삽은 자루까지 박혔다.
병사들이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오오.”
“어, 어떻게 한 거야?!”
“나, 낙센 대장에 뒤지지 않는 힘이다!”
마를로네는 그 삽을 그대로 휘저어 흙을 퍼냈다.
그녀가 판 구멍과 파낸 토사의 양은 병사들의 말마따나 저 거인병 낙센에 뒤지지 않았다.
마를로네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병사들을 향해 퉁명스럽게 한마디 했다.
“자, 그럼 일해요. 일.”
잔뜩 힘자랑을 한 그녀는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땡땡이다.
그런데 그녀가 곧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다지 키가 크다고 할 수 없는 마를로네보다 머리 하나가 작을 법한 소년이었다.
“너, 여기서 뭐 하니? 이런 꼬마가.”
그녀의 물음에 소년은 잠시 놀란 듯한 얼굴로 마를로네를 보다 이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힘차게 답했다.
“나도 병사야!”
소년이 뒤편에 당당하게 솟은 요새 도시를 가리켰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 도시를 지킬 거야!”
* * *
제국의 수도 테타우에서 깨끗한 물은 구하기가 어렵다.
사람이 많이 사는 곳은 물이 부족하고 더러워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타우에서 지위는 사용하는 물로 구분한다는 말이 나왔다.
냄새나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하류, 냄새나지 않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중류, 깨끗한 물을 마시는 사람은 상류.
그리고 그 깨끗한 물로 몸을 씻는 사람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제1열에 서 있는 사람이리라.
울피아나의 하루는 정결하게 몸을 씻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가 사용하는 물은 테타우에서 나는 물이 아니다.
15km나 떨어진 산간 마을의 계곡에서 나른 물이다.
최근 건강을 회복한 그녀는 자신에게 문병 온 황제를 만날 생각이다.
갑작스러운 만남이지만 황제는 흔쾌히 그녀의 알현을 승낙했다.
‘드디어 황제 폐하를 마주 할 수 있겠어.’
그의 명성은 그녀의 노곤한 가슴에 불을 지폈다.
메헨부르그의 야수가 선량한 백성과 아이를 해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팠지만, 황제 후보였던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사내가 멋지게 그 괴수를 토벌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녀는 운명을 떠올렸다.
실제로 만난 루페르트 가우저는 의외로 괜찮은 용모와 기품이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남성상과는 조금 달랐다.
뭐랄까, 영웅적이고 운명적인 끌림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이상할 정도로 자신을 피하려고 들었다.
고양잇과 동물이 도망치는 걸 본능적으로 쫓듯 그녀 또한 자신에게 달아나려는 루페르트에게 큰 흥미를 느꼈다.
평범했던 황제의 승승장구가 연이어 들려왔다.
학문과는 거리를 두었던 울피아나는 고리타분한 옛 고전과 학자들이 쓴 사상서보다는 인쇄소에서 찍어 낸, 테타우의 하층민이나 보는 한 장짜리 팸플릿을 읽는 걸 더욱 즐겼다.
그러한 팸플릿은 무식한 대중도 이해하기 쉽게 판화로 찍은 삽화가 있어 더욱 읽는 재미가 있었다.
그런 팸플릿에 황제 후보 루페르트가 주인공에 종종 등장했다.
거기에 묘사된 루페르트의 여정은 지나칠 정도로 자극적이고, 극적이고, 그리고 허무맹랑했다.
하지만 그러한 천박한 영웅담이 울피아나의 구미를 잡아당겼다.
자신을 피하려는 영웅에 대한 사냥 심리와 더불어 망상 속에서 키운 연모는 그녀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충동을 착실히 채워 나갔다.
그가 구혼했을 때 그녀가 한 번 거절을 한 건 의례적인 일이다.
모든 기품 있는 제국의 여성은 아무리 상대방이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이 구혼을 했을 때 거절을 하는 관습이 있다.
의례적인 거절이지만 상대방에 너무 끌려다니지 않겠다는 집단화된 자존심의 표현이기도 했다.
어차피 남자들도 그 사실을 알고 좀 더 준비되고 정식 구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흐름이니까.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 의례적인 재구혼을 하지 않았다.
그는 옛 황제의 모범을 따랐다.
세습을 내려놓은 것이다.
황제가 영원히 자신을 떠났다.
정신병적인 망상이 울피아나를 악령처럼 따라붙었다.
어릴 때부터 갖고 싶었던 건 무조건 가져야 했고 실제로 그걸 이뤄 냈던 울피아나에겐 일생일대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이 여기까지 그녀를 이르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황후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 그런 허상 같은 지위는.”
루페르트가 수도회의 목자라면, 그녀는 그 목자 옆을 지키는 시동이 되겠다.
호라교의 신부가 수녀의 도움을 받아 교회를 꾸리는 것처럼, 그녀 또한 황제 곁에서 그를 보조하는 영혼의 파트너가 되겠다.
오히려 육체관계와 세습이라는 세속적인 가치가 결여된 그 관계는 울피아나의 눈에 더욱 신선하고 새로운 영적인 관계로 보였다.
이제 담판을 지을 때다.
하녀들이 그녀가 입을 옷을 가지고 왔다.
검고 수수하고 질박한 소재의 그 옷은 그녀의 바람대로 수녀의 옷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거울 속의 자신을 보며 울피아나는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하녀가 다과와 차를 내왔다.
안락한 의자에서 잘 꾸며진 화사한 정원을 보며 울피아나는 향긋한 차와 다과를 우아하게 즐기다 옆에 서 있는 하녀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오늘 차가 참 맛있네요. 잉에.”
“과찬의 말씀입니다. 울피아나 님.”
“날씨가 좋아요.”
흐뭇한 눈으로 그녀는 화사한 정원 위로 빠르게 흘러가는 구름과 푸른 하늘을 보았다.
오늘도 나른한 오후가 될 것 같다.
황제와의 만남까지 일주일이나 남았다.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며 축난 몸을 치유하리라.
* * *
부스럭부스럭!
그 괴물은 땅을 파는 것만이 아니다.
그 괴물 앞엔 토막 내고 변색 된 누군가의 팔다리가 있었다.
괴물을 그 시체를 파먹으면서 동시에 땅을 파헤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 괴물은 시체와 땅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것이다.
그 악취 나는 거대한 괴물 뒤엔 가득 찬 수레와 함께 한 무리의 음침한 사람들이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들은 병사라기보다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그늘진 곳에 사는 인간들과 닮아 있었다.
수레에 실린 화물을 보면 누구나 이해를 할 것이다.
그 수레에 수북이 담긴 건 누군가의 시체였으니.
그 수레엔 신교도라는 휘갈겨 쓴 글자가 적혀 있었다.
시체를 닮은 무표정의 사내가 누군가의 토막 낸 다리 하나를 두더지 앞에 집어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