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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61화 (161/225)

161화 38. 더러운 전쟁 (1)

도시의 외부는 능보-보루-주성벽이라는 삼중의 방어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보루는 능보보다 높게 지어져 능보가 장악당하더라도 능보 전체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으며, 보루도 마찬가지로 성벽보다 낮게 지어져 있어 주성벽의 병사들이 적에게 보루가 장악당하더라도 보루의 적을 오리사 냥을 하듯 손쉽게 사냥할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적이 하위 성벽을 장악하고 대포를 배치해도 큰 의미가 없다.

하위 성벽에 아무리 대포를 잘 배치한다고 해도 대포가 쏠 수 있는 사각(射角)은 성벽이 아닌, 성벽을 감싼 흙더미를 두들기도록 사전에 세심하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최외곽을 이루는 능보는 쉽게 공략당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보루와 성벽에 배치한 대포가 눈에 불을 켜고 아래를 지켜 보고 있고, 혹 능보가 장악당하더라도 능보와 보루 사이에 있는 해자가 침략자의 발길을 무겁게 잡아당긴다.

이러한 요새에 인해 전술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오히려 시체의 벽이 동료 병사들의 전진을 막아서는 방파제 역할을 할 뿐이다.

그나마 거둘 수 있는 유의미한 효과는 그 시체들이 썩어 돌림병을 적 요새에 퍼뜨리는 것 정도겠지만 돌림병이라는 게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는다.

특히, 가뜩이나 돈을 잔뜩 들인 공성자 쪽의 진영에 역병이 돌면 장군은 물론이고 그 뒤의 군주마저도 목덜미를 잡게 될 것이다.

이런 요새를 공략하는 방법은 오직 하나.

삽이다.

반대로 그 요새를 지키는 방법도 삽이다.

푹-

거인병 로이테르의 괴력은 무시무시했다.

그는 타인이 삽질 여러 차례를 해야 간신히 퍼낸 분량의 흙을 단지 커다란 삽을 꽂아 넣고 길쭉한 팔다리를 놀리는 것만으로 움푹 팬 구멍을 만들어 냈다.

참호가 무의미할 정도로 키가 커서 늘 저격의 위협에 처해 있지만, 거인병은 일말의 걱정도 하지 않았다.

“이 거리에서 총알이 닿진 않아. 맞는다고 해도 내 투구를 뚫지 못하겠지.”

거인병 낙센은 의외로 평범한 사람이 쓰는 크기의 투구를 쓰고 있었다.

맞배지붕처럼 투구 중심을 위가 치솟은 형태로 마감한 카스무어 왕국식 투구다.

머리가 크다고 하지만 위아래로 길지, 둘레가 커진 건 아닌지라 그도 평범한 투구를 쓸 수 있었다.

낙센은 이른바 소티조의 대장으로 능보 밖에서 외부 활동을 하는 죽을 각오를 한 병사들을 지휘한다.

그가 루페르트 일행에게 다가왔다.

“참관도 좋지만, 여긴 매우 위험한 곳입니다.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요.”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자초한 일입니다. 무슨 일이 생겨도 전부 다 제 책임이겠지요.”

루페르트는 낙센의 의도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리고 이에 대응하는 말을 해 주었다.

낙센은 피식 웃고는 큰 몸을 돌렸다.

“참호 안에서는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지요.”

“모든 일요?”

“네. 웅크리고 있는데 총알이 마치 눈이 달린 것처럼 탄도가 꺾이는 일도 있고, 지하에 사는 망령이 나타나 산 자의 발을 끌어당기는 일도 있습니다. 철혈대제 시절엔 강령술사를 이용한 공격도 종종 벌어졌지요.”

“강령술사요?”

“네. 시체들이 움직여 봐야 뭘 할 수 있겠냐마는, 철혈대제 아래에 배치됐던 강령술사는 온몸에 불을 붙인 시체들을 줄지어 전진시켜 그 연기로 이동하는 연막을 만들어 내 참호를 파는 병사들을 보호했지요. 참호의 선두는 집중 포격과 사격을 받기 마련이니.”

쿵!

마침 포성이 울렸다.

포격이 향하는 곳은 낙센의 말대로 참호의 선두 쪽이었다.

큰 키로 참호 너머 벌어지는 광경을 푸른 두 눈동자에 담으며 낙센이 쓴웃음을 머금었다.

“돈도 돈이지만 공성전은 야전, 그 이상으로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는 곳입니다. 야금야금 하나씩 하나씩 죽음의 신이 병사들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지요.”

“병사들의 영혼은 지옥으로 갑니까?”

루페르트의 물음에 낙센은 1초도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신을 믿건, 어떤 종파를 믿건 병사들은 모두 지옥으로 갑니다. 그 운명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땅을 팠다.

그가 삽을 놀린 자리엔 지옥의 입구처럼 보이는 시커멓고 큰 구멍이 나 있었다.

그는 병사들을 동원해 과할 정도로 깊은 참호를 팠다.

낙센의 그 큰 키를 전부 넣고도 한참이나 남을 정도로 깊은 참호를 말이다.

단지 땅을 파헤치는 것만이 참호의 끝은 아니다.

뒤에서 수시로 침목과 판자를 실은 수레가 오가며 삽으로 파헤친 참호의 가장자리를 보강했다.

그렇지 않으면 기껏 힘들게 판 참호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겨울비가 주룩주룩 흐르며 땅을 무디게 하는데 이런 보강이 없다면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참호는 무너져 내릴 것처럼 보였다.

어느 정도 완성된 참호 안에서 낙센이 허리를 기울이고 벽면에 귀를 댔다.

그는 루페르트의 신분을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지 자신이 뭔가 새로운 행동을 할 때마다 설명을 곁들였다.

“땅굴을 팔 수도 있어서요.”

“땅굴요?”

“동방 제국이 즐겨 쓰던 전술이죠. 참호를 파면서 동시에 땅굴도 함께 파 들어가 성벽 아래 폭약을 깔고 성벽을 무너뜨리는 방법은.”

한동안 벽에 대고 소리를 듣던 낙센이 벽에서 귀를 뗐다.

“땅굴은 아닌데, 기괴한 소리가 나는군요.”

그의 인상이 무서우리만치 섬뜩하게 굳었다.

“……시체를 먹는 자를 데리고 왔군요.”

“시체를 먹는 자?”

“불경한 이교도의 짐승이죠. 이름 대로 땅을 파헤치고 사람의 관을 부수고 들어가 시체를 먹는 놈들입니다. 동방 제국에서 쓰던 괴물인데 그걸 카스무어 왕국 놈들이 데리고 온 모양입니다.”

루페르트는 이 낙센이라는 자를 다시 보았다.

단지 키만 큰 게 아니다.

그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큰 키와 작대기 같은 팔다리 너머엔 외모보다 훨씬 많은 나이로부터 우러나오는 경험이 있다.

“아마, 그 친구는 저보다 나이가 많을지도 모릅니다.”

베르크 란이 낙센을 보고 한 말이다.

“로이테르의 수명은 100살 전후라는데 제가 듣기로는 200살이 넘은 로이테르도 존재한다고 들었습니다. 침묵제 시절에 장창을 들고 싸웠던 자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지요.”

낙센의 나이가 몇이든 간에 그가 추측한 것은 루페르트가 가진 미래의 기록에 나오는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카를슈타인은 커다란 두더지를 봤다고 했었지.’

루페르트가 낙센에게 말했다.

“그 시체를 먹는 자라는 거, 두더지를 닮지 않았습니까?”

지금까지 루페르트를 단 한 번도 쳐다보지 않은 채 묵묵히 할 일을 하면서 이야기를 하던 낙센이 그 말을 듣고 루페르트를 향해 처음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십니까?”

“엄청난 악취가 나고 이상한 걸 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놈들은 시체를 먹습니다. 짐승의 사체는 뭐든 먹지만, 특히 땅속에서 적절하게 썩은 인간의 시체를 환장하고 먹지요.”

“그렇다는 이야기는?”

루페르트의 물음에 낙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카스무어령 저지대 쪽의 묘지를 파헤쳐 시체를 대량으로 확보해 그걸 먹이고 있을 겁니다. 동방 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타인의 묘지를 파헤쳐 그 시신을 먹인다니. 남쪽 사람들은 그런 짓을 보고도 가만있습니까?”

“그게 그들의 어리석음이지요. 그들은 같은 피가 흐르는,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의 지배를 거부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다른 피가 흐르는 군주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같은 종교를 믿더라도 그들은 저지대인이고 그들의 군주는 카스무어인인데.”

낙센의 얼음처럼 차가운 푸른 눈이 루페르트를 동공에 담았다.

“제국에서 오셨다고 들었는데.”

“네.”

“제국 어디서 오셨습니까?”

“트라이아입니다.”

“트라이아라.”

낙센의 입가에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트라이아건 슈발츠마인이건 외국 촌놈에겐 다 같은 제국이지요.”

가볍게 던진 너스레로 보였다.

그러나 루페르트는 그 가벼워 보이는 한마디 안에 간단히 넘길 수 없는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곧 루페르트는 그 날카로움의 정체를 파악했다.

적대감이다.

‘이 인간. 제국을 증오하고 있군.’

저지대인이 제국을 증오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베르크 란의 말대로 그보다 나이가 많다면 제국을 증오하는 마음도 깊을 것이다.

현재 저지대를 두 개로 토막 내고 전쟁의 불씨를 일으킨 건 다름 아닌 철혈대제라 불리는 클라우데 2세였으니.

아마 그때 당시로는 그게 최선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모든 게 이런 식이 아닐까?’

루페르트는 소위 “명군”의 손길이 드리운 곳을 몇 군데나 보았다.

그러나 그 명군의 손길은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았다.

모든 게 임시방편이다.

그때의 위기를 간신히 넘기는 어정쩡한 설계로 일을 마쳤다.

가는 곳마다 갈등의 불씨가 넘쳐흘렀고 그 불씨는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화약고로 숙성되어 갔다.

그 불씨가 터진 곳이 렌타이어마르크다.

어쩌면 레벤호스트도 철혈대제가 남긴 불씨일지도 모른다.

이 저지대 분쟁도 마찬가지.

모든 것이 철혈대제가 남긴 악덕의 결과다.

‘회귀를 믿었기 때문이겠지. 회귀의 권능을 믿고 아무렇게나 대충, 황제답지 않게 매사를 처리한 거다.’

낙센이 병사들에게 명했다.

“여기는 이만하면 됐고, 다음은 북쪽이다. 빠르게 움직이자고. 놈들에게 땅 파는 괴물이 있으니 이쪽도 속도를 늦출 순 없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루페르트가 물었다.

“놈들이 다섯 방향으로 공격해 옵니다. 당연히 이쪽도 모든 방위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은은한 불쾌감을 드러내며 낙센이 말했다.

“주공은 어차피 한 군데 아니겠습니까? 나머지는 위장이고.”

“그렇겠지요.”

“이쪽, 동쪽 방면, 그러니까 이쪽이 주공일 것 같습니다.”

루페르트가 말했다.

“근거는?”

낙센이 선명한 비웃음을 드러내며 조롱하듯 물었다.

근거는 그의 품속에 있는 미래의 기록이다.

하지만 그 근거를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

“……성벽 위에서 보니 배후의 움직임이 어수선하더군요. 필경, 보다 많은 물자를 실어 나르기 위함이 아닐까요?”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여기가 주공이라면 다른 곳에도 그 두더지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겠습니까?”

기억에 남길 날카로움을 잊지 않는다.

낙센은 루페르트를 빤히 내려다보다 말없이 다른 곳으로 향했다.

“성으로 돌아가 주세요. 여기는 제 관할입니다. 솔직하게 방해가 되는군요.”

거절 통보.

더 이상 루페르트에게 이 참호 안에 들어오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였다.

베르크 란은 은근한 분노를 드러냈지만 마를로네는 활짝 웃었다.

하루가 지난 후, 낙센이 루페르트를 찾아왔다.

그가 큰 키를 굽혀 루페르트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 들어오더니 전과는 다른, 공손함이 엿보이는 어조로 물었다.

“어떻게 판단했습니까?”

이에 루페르트는 책상 위에 올린 카를슈타인의 보고서를 덮으며 능청스레 말했다.

“제가 실전 경험은 없지만, 전쟁에 관한 책을 좀 읽었습니다.”

루페르트가 빙그레 웃으며 덧붙였다.

“적이 동쪽에서 오던가요?”

낙센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아무래도 이 키 큰 사내의 신뢰를 조금이나마 얻은 건 확실하다.

“원하신다면 언제든 참관하셔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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