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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56화 (156/225)

156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3)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마를로네는 여러 전장을 전전했지만, 실제로 전장 위에서 전투를 벌인 적은 없었다.

그녀가 본 풍경은 전쟁 시작 전에 양군이 집결하거나 각 군의 뒤편에서 장사하는 종군 상인들의 불결한 캠프를 구경한 것, 그리고 전쟁 후에 까마귀가 나는 시체의 밭을 본 게 고작이다.

기껏해야 황제의 호위로 전장에 따라갔다는 정도도 포함한다면 말이다.

실제로 한 명의 병사로 직접 전장에 서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일단, 장교에게 우리가 도펠죌트너라는 걸 밝혀야지.”

“누가?”

“당연히 네가 말해야지. 나보다는 네가 더 말을 잘하지 않느냐?”

“구실이야 떠오르긴 하는데. 그다음은?”

“판세를 지켜봐야지. 성안보다는 성벽 위가 더 잘 보일 게다.”

“엄청난 마법사나 괴물을 끌고 오는 거 아니야?”

“그런 일은 흔하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베르크 란은 손녀의 걱정을 일축했다.

“이상할 정도로 네가 있는 곳에 괴이가 많았던 것뿐이다. 전장은 병사들의 것이다.”

베르크 란은 즉시 여관을 나서 마를로네와 함께 장교를 찾았다.

원래라면 그가 더듬거리며 장교를 설득해야겠지만, 이제 그에겐 말 잘하는 손녀가 있다.

“……제국에서 받은 박해를 갚아 주고 싶어요. 전장의 말석이라도 주신다면 기꺼이 신교의 대의를 위해 싸우겠어요.”

장교는 난감한 표정이지만 두 눈에서 은은한 빛을 발하는 거구의 사내가 웃으면서 나타나 장교를 안심시켰다.

“도펠죌트너라. 오랜만이군.”

베르크 란은 자신보다 머리 두 개는 큰 거인 병사를 올려다보았다.

“로이테르인가.”

제국에 도펠죌트너가 있다면 저지대 연방엔 로이테르라는 초인 병사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나무에 비견될 정도로 키가 크고 그 덩치에 걸맞은 힘과 체력을 가지고 있다.

장창끼리 싸우던 과거의 전장에서 로이테르는 장창으로 겨누던 제국의 병사를 장창째로 번쩍 들어 집어 던지며 제국의 방진을 붕괴했다고 한다.

도펠죌트너가 일견 평범한 인간의 몸을 하고 있지만, 폭발적인 괴력을 내는 것과 달리 로이테르는 외관부터 평범함과는 확연히 다르며 그 다름을 유감없이 뿜어내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베르크 란이 경험한 바에 의하면 로이테르는 도펠죌트너에 뒤지지 않는 강력한 전사들이다.

“낙센이다.”

거인병이 마를로네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여자?”

“사정이 있지.”

“어떤 사정이지?”

낙센은 털털해 보였지만 그리 헐렁한 사람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베르크 란은 주저 없이 답했다.

“어릴 때 중병을 앓았다.”

“중병?”

“전장에 있었다면 도펠죌트너의 정수가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 수 있었을 터인데.”

“약 대신 쓴 건가?”

낙센이 피식 웃었다.

“……그 약은 극약이겠지.”

베르크 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낙센이 비로소 돌아섰다.

“경고하건대 나는 눈치가 빠르다.”

멀어져가는 그를 보며 마를로네가 조부에게 다가가 중얼거렸다.

“장대 같네요.”

“무시하지 마라. 저런 몸을 하고도 우리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는 괴력을 뿜어내니. 뿐만 아니라 그들은 우리와 달리 젊음을 오래 유지하고 장수한다고 한다.”

“그래요? 그건 흥미가 가네요.”

“저렇게 길쭉해지고 싶냐?”

“다시 생각해 봐야겠네요.”

“듣자 하니 저들은 바다의 신의 정수를 들이켰다고 하더군.”

“……흐음.”

마를로네는 게슴츠레 뜬 눈으로 낙센이라는 사내를 살폈다.

시커먼, 살인자의 얼룩.

항상 보지만 적응되지 않는 흔적이다.

가볍게 몸을 떠는 손녀를 향해 베르크 란이 담담하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이 요새를 구원하기 위해 온 거니. 책잡힐 일도 없겠지.”

“그랬으면 좋겠네요.”

멀리 수많은 마필이 땅을 구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카스무어 왕국의 군대가 도시를 포위하는 소리다.

* * *

“도펠죌트너 하나를 보낸 것만으로 요새를 구원할 수 있을까요?”

요하네스가 서재 앞에 외로이 앉은 무표정한 황제를 보며 넌지시 물었다.

방 안엔 시종을 제외하면 루페르트와 요하네스 두 명이 전부였다.

다른 총신은 부르지 않았다.

느낌상 그들은 이런 일에 적합하지 않은 인재로 보았기 때문이다.

세 명의 총신 중 요하네스가 가장 위험하지만 가장 생각이 맞는 것도 루페르트가 그를 따로 부른 이유이기도 했다.

“베르크 란은 대단히 강한 자다. 경험도 풍부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페르트도 베르크 란이 혼자서 도시를 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나 과한 기대다.

그가 아무리 강한들, 총포로 무장하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직업군인 수만 명을 상대할 수 있을까?

바로 옆의 전우가 총탄에 맞고 혹은 포탄에 맞아 머리가 날아가도 자리를 지키는 자들을 상대로?

카스무어 보병대는 제국 다음으로, 사람에 따라서는 제국 보병대에 조금도 꿀리지 않는 급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시는 함락될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들의 증언을 듣는다.

듣고 취약점을 분석한다.

그것이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과 그 조손을 보낸 이유다.

게다가 루페르트가 파견한 건 그들만이 아니다.

하드리아멘디쿠스 장군 바로 옆엔 고문 자격으로 노련한 제국 대령 하나를 붙여 전투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게 했다.

수비자는 물론 공격자의 입장에서 전쟁의 모든 양상을 한꺼번에 취득할 수 있다는 소리다.

루페르트가 보고 있는 건 그 너머다.

즉,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공성이 실패한 이후 일어날 정국의 변화다.

황제의 시선은 이제 미래보다는 과거를 향하지만, 사람이 발밑만을 보고 걸어갈 수는 없는 법. 가끔은 시야를 돌려 먼 곳도 봐야 한다.

“공성이 실패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 거 같나.”

“당분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요하네스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모두에게 시간이 필요한 시기지요. 레벤호스트 선제후에게도 폐하에게도.”

“그가 전쟁을 벌일 거라 믿나?”

“그는 반드시 전쟁을 일으킬 겁니다.”

루페르트는 그 말을 기억에 새겼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났다.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공격군이 그레나스를 함락했다는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심어 놓은 첩자들을 모으라고 지시했다.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고문 자격으로 전장을 참관했던 카를슈타인 남작-대령이 먼저 도착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수비자 측에 배치했던 첩자는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설마 죽은 건가. 그럴 리가.’

죽었을 가능성은 없다.

카를슈타인 대령의 보고서에 의하면 하드리아멘디쿠스의 공성군과 그레나스의 수비군은 “예의 바른” 전투를 했으니까.

즉, 성벽이 무너졌을 때 하드리아멘디쿠스는 공세를 멈추고 수비군에게 항복을 타진했고, 그레나스의 시장이 성문을 열어 성문의 커다란 열쇠를 들고 맨발로 걸어 나와 항복했다.

약탈도 없었고 파괴도 없었다.

온건한 전투였고 온건한 항복이었다.

그 전투를 참관한 카를슈타인 대령이 말했다.

“그 전투는 총과 창보다는 삽으로 벌인 전투였죠. 삽이 모든 걸 끝냈습니다.”

아울러 대령은 전했다.

“하드리아멘디쿠스 장군의 공성 능력은 일찍이 본 적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 그 앞에서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보고서를 보시면 알 겁니다. 그 어떤 단단한 요새도 그 앞에서는 간단한 퍼즐에 불과합니다. 백 번을 싸운다고 해도, 그레나스는 모두 석 달 안에 함락될 겁니다. 제 모든 경력을 걸고 말할 수 있습니다.”

루페르트는 심드렁한 얼굴로 그가 그다지 읽고 싶지 않은 전투 보고서를 눈으로 훑어 나갔다.

과정은 단순했다.

정찰을 하고 포위를 하며 참호를 파고 들어가 성벽을 둘러싸는 평행호를 파고, 다시 참호를 파고 접근해서 평행호를 판다. 대포를 1차 평행호에 배치해 상대방의 능보를 타격하면서 다시 참호를 파고, 평행호를 파고.

‘이게 뭘 어쨌다는 건지.’

루페르트는 중간에 보고서를 덮고 말았다.

아무리 익숙해지려고 해도 전쟁은 그의 취향이 아니다.

그는 한 사내와 여성을 기다렸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다.

공성을 당하는 그들의 눈에서 본 기록이 있어야 하드리아멘디쿠스라는 괴물을 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귀를 했다고 해도 큰 조건이 변하지 않은 이상 그 흐름이 원래대로 흐르는 건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레벤호스트가 다시 새로운 신교 동맹을 결성했다.

노르드마르크가 빠진 건 의외였지만, 디터팔츠가 동맹에 참석한 건 더 큰 의외였다.

그 외에 제국의 잡다한 군주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들고 신교도 동맹에 참석했다.

루페르트는 그 하나하나의 군주의 이름을 기억하면서 외국의 조력자에게도 시선을 옮겼다.

저지대는 당연하게도 새로운 신교 동맹에 참가했다.

부르봉 왕국은 중립적인 태도였지만 그들을 이끄는 뱅상페리에는 은밀하게 신교 동맹을 지원하는 뜻을 내비쳤다.

스베아 왕국은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서쪽의 동족을 탄압하는 데 진심을 쏟고 있었다.

동쪽에서 드라쿨레아 공국이라는 생소한 나라가 참가했다는 건 루페르트의 눈엔 그다지 들어오지 않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어렴풋이 떠오르는 게 있다.

나라의 이름보다는 동쪽에서 온 악마의 기병에 관한 소름 끼치는 소문이.

지나가는 모든 마을을 불태우고 가축을 죽이고 사람을 죽인다는 악마와 같은 기마병이 동쪽에서 왔다고 들었다.

‘설마 드라쿨레아 공국이라는 게, 그 악마의 기병들은 아니겠지?’

살펴볼 일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일은 아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이 동맹의 결성을 늦추는 것이다.

당장은 면면만 봐도 충분하다.

동맹의 결성에 필수적인 조건-그레나스의 함락을 막기 위해서는 또 한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

“베르크 란은 어디에 있는가. 그를 찾아라.”

결국 황제가 참지 못하고 사람들을 보냈다.

그러나 사라진 노병의 행방은 묘연했다.

결국 제국 마법 대학이 사람을 보내 줬고, 그들이 베르크 란을 찾아내 황제에게 데리고 왔다.

“…….”

베르크 란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수척해져 있었다.

급속도로 늙어 죽기 직전의 노인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처참한 몰골이었다.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루페르트는 강철로 도금한 심장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는 걸 느끼며 그와 함께 있어야 할 여성을 찾았다.

“마를로네는 어디에 있나?”

이에 베르크 란이 답했다.

“죽었습니다.”

무미건조한 어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차마 두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네. 폐하도 보셨으면 좋았을 겁니다…….”

베르크 란의 이어지는 진술에 루페르트 옆을 지키던 장교들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말을 삼가라. 도펠죌트너.”

베르크 란은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죽음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을 초췌한 몰골, 그러나 그 안에 끝없이 이글거리는 분노를 담은 채 황제를 노려보며 똑똑히 가슴 그 너머에서 울려 퍼지는 음성으로 말했다.

“내게 장군 자리를 주시오. 약속했잖소.”

“도펠죌트너!”

장교와 병사들이 총을 들었다.

루페르트가 손을 저어 그들을 제지한 후 베르크 란을 보았다.

“거절한다면?”

베르크 란이 고개를 숙였다.

그 직후 섬광 같은 게 번득였다.

찰나의 흐름 속에서 루페르트는 어느새 죽어 가는 노인이 자신의 목을 움켜잡고 있는 걸 발견했다.

“참을 만큼 참았다. 슈발츠마인 놈.”

타타타타탕!

총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흩어지는 총성 속에서 황제는 창문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고 지면으로 추락했다.

공교롭게도 황제가 떨어진 자리엔 뾰족하게 솟은 첨탑형의 장식물이 있었다.

그 날카로운 쇳조각은 떨어지는 황제의 몸을 꿰뚫고, 반대쪽 몸을 뚫고 튀어나왔다.

“커억!”

끔찍한 고통.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베르크 란의 행동일 것이다.

‘설마하니 그자가 나를…….’

동시에 나른한 죽음이 엄습한다.

기이하게도 그 죽음은 오히려 루페르트에게 묘한 안도감을 주었다.

‘이 정도면.’

죽어 가는 황제는 금발의 여성을 떠올렸다.

‘여신님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지…….’

최후의 힘을 다해 황제는 나팔을 입에 갖다 댔다.

부우우우우-----

회귀의 물살이 다시금 모든 걸 덮었다.

아무런 이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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