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37. 진창과 도랑 속에서 (2)
전쟁의 기억이 희미해진다.
그건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사람에겐 알지 못하고 그러므로 두려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근원이다.
베르크 란은 여전히 황궁에 있었다.
지긋지긋한 병마는 물러갔고 육체는 예전의 완전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야속한 시간은 하루가 다르게 초로의 노인에게서 전성기의 힘참을 서서히 앗아 가고 있었다.
“…….”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베르크 란은 자신의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걸 느꼈다.
흰머리가 부쩍 많아졌고 주름도 깊어졌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눈빛이다.
자신조차 두려워하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빛이 농장에서 일하는 농마 비슷한 서글서글함을 띠어 간다.
이건 그가 원하는 게 아니다.
정확히는 마음의 일부분이 원하고는 있다.
늘그막에 햇볕이 드는 안락한 집에서 가족들의 축복을 받으며 영면에 드는 건, 모든 늙어 가는 사람들이 원하는 이상적인 최후니까.
하지만 그에겐 할 일이 있다.
그처럼 늙어 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자들이 있다.
여전히 명예를 박탈당한 채 구걸만을 해야 하는 동료들의 기대를 짊어진 그는 이런 평온한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를 지내는 것에 억지로라도 죄책감을 만들어 내야 했다.
“할아버지.”
손녀의 눈치가 빠른 건 그가 싫어하는 특징이다.
며느리를 닮았다.
‘그 빌어먹을 년.’
아들은 그처럼 우둔했다.
앞만 보았다.
하지만 그 교활한 며느리가 모든 걸 망쳐 버렸다.
헛바람을 넣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에 뛰어들게 만들었다.
끔찍하게도 손녀는 나이가 차면서 며느리의 모습을 놀랄 정도로 닮아 가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
“요즘 우리 황제 폐하 좀 이상한 거 같지 않나요?”
“어디가?”
“멀리서 본 적이 있는데 시선이 뭐랄까, 꼭 그런 거 같아요. 아, 뭐라고 해야 하지?”
궁정 생활도 1년 넘게 하다 보니 마를로네도 슬슬 자신도 궁정 사람 같은 기품 있는 행동과 언어를 써야 한다는 강박감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시적이고 교양이 느껴지는 표현을 생각하려 했는데 생각하는 것마다 비참한 농촌의 풍경이며 기억하는 것마다 끔찍한 지옥의 현장이다.
베르크 란이 고개를 돌리는 걸 보며 마를로네는 얕은 한숨을 내쉬며 생각나는 대로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이야기했다.
“카스무어에서 봤던 새장에 갇혀 죽어 가는 사람 눈빛 같았어요.”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라.”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죠. 아, 맞다. 공허하다.”
“공허?”
“네. 공허한 눈빛이었어요. 듣자 하니 요즘은 그 좋아하는 공놀이도 안 한다고 하시던데.”
“황제가 할 유희는 아니지.”
베르크 란은 자신의 손을 오므렸다 펴는 걸 지켜보다 갑자기 마를로네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 숲에서 봤다는 거. 진실이냐?”
마를로네는 주위를 둘러보며 낮은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그 숲에서 본 건 루돌프라 알려진 미지의 노인, 그리고 그와 짝을 이룬 자신을 제국 성인이라 칭하던 신비로운 여인 둘이었다.
황제와 루돌프가 무슨 이야기를 한 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때부터 루페르트의 얼굴은 어딘가 전과 달라 보였다.
“아무래도 슈발츠마인 사람들과 제국 성인은 모종의 연관이 있나 봐요.”
“목소리를 낮춰라.”
“괜찮아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거 아시잖아요. 그나저나.”
마를로네는 최근 들어 이상한 현상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꿈에서 봤던 장면이 눈앞에서 벌어지거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풍경과 상황이 꿈처럼 떠올랐다.
그 꿈은 지나칠 정도로 생생해서 여간해서 주눅 들지 않는 그녀의 심장을 무겁게 짓누를 정도였다.
“그 루돌프란 사람 말이죠. 전에 저한테 이상한 짓을 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그 노인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아니. 분명 눈에 뭔가 시퍼런 불같은 걸 번들거리면서 저를 본 것 같은 장면을 본 것 같은 …….”
“사람이 밤에 잠을 자야지. 너처럼 뻔질나게 돌아다니면 개꿈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법이다.”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가 동시에 입구를 노려보았다.
사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제국의 관리였다.
“베르크 란. 폐하의 호출이다. 즉각 출두하라.”
마를로네의 얼굴엔 걱정이,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기대가 떠올랐다.
드디어 출진이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전쟁이 마침내 손짓하고 있다.
* * *
황제의 호출이라고 해서 갔더니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마를로네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이는 젊은 청년이었다.
베르크 란이 무골이라 하나 정치에 아주 둔감한 건 아니다.
이 재기발랄하면서도 짓궂은 소년 같은 금발 남자의 이름 정도는 알고 있다.
‘제국 기사 요하네스라고 했던가.’
그가 루페르트의 총신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일개 제국 기사는 제국 회의에도 들어갈 수 없는 신분이지만 황제의 총애를 얻어 황제 곁에서 갖가지 조언을 한다는 이 젊은 천재는 베르크 란과 비할 바 없이 높은 신분의 인간이다.
내키진 않지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요하네스는 고개를 까딱거려 인사를 받은 후 밤하늘의 별처럼 수많은 생각으로 반짝이는 눈동자로 베르크 란을 보며 자신의 용건을 말했다.
“전쟁 경험이 풍부하다 들었는데.”
“그렇습니다만.”
“공성전에도 참가한 적이 있나?”
“당연히.”
“역시 폐하의 안목은 정확하군.”
“폐하께서 저를 부른 겁니까?”
“그대를 콕 집어 지목했네.”
“그렇군요.”
요하네스가 베르크 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처음부터 기분 나빴던 오만한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걸 보며 베르크 란은 강한 반감을 느꼈지만, 자신의 어깨에 걸린 무게를 느끼고 무표정한 얼굴로 오만하고 작은 젊은이가 무례하게 다가오게 내버려 두었다.
“동맹국이 그레나스를 공성 중인데, 그 장군이 유능한 모양이야. 그런데 그레나스는 빠르게 무너지면 안 돼. 시간을 벌어 줘야 해.”
“……신교도를 도우라는 겁니까?”
“그대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제국을 위해서라는 것 정도는 알아 뒀으면 하는군.”
“제가 원하는 보상은 하나입니다.”
“임무를 완수하면 폐하가 직접 그대를 찾을 것이야.”
“…….”
베르크 란은 잠시 고민했다.
지금까지 숱하게 겪었던 거짓들의 또 다른 재현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거짓 약속을 하는 자들은 대리인을 세우는 걸 좋아한다는 게 지금까지 살면서 느낀 경험이니까.
하지만 다른 방법이 있을까?
협상이란 걸 해 본 기억이 없다.
협상이라는 단어 자체를 꺼낼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높은 사람이었다.
늘 그래 왔다.
‘어쩔 수 없다. 하라면 하는 수밖에.’
하지만 베르크 란은 알고 있다.
그 일조차 없어졌을 때 전쟁에서 살아가는 자들에게 진정한 종말이 찾아온다는 걸.
수많은 병사의 삶들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전쟁에서 죽은 것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전우들의 말년은 비참했다.
일부가 고향에 돌아가 부농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대부분은 구빈원의 싸늘하고 더러운 침상 위에서 외롭고 시끄럽게 죽었다.
칼을 쥐었던 자가 쟁기를 다시 쥐는 건 극히 어려운 일.
“어디로 가면 됩니까?”
전쟁이 부르면 병사는 그곳으로 가야 한다.
승패는 그다음이다.
병사는 전쟁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니까.
* * *
그레나스.
각각 부르봉 왕국과 트라리아 선제후령을 흐르는 두 개의 지류가 합쳐지는 곳에 저지대 연방이 심혈을 기울여 세운 최신식의 요새다.
별처럼 생긴 요새의 형태는 거의 모든 방향의 공격에 대해서 방비할 수 있으며 높이는 낮다. 3개의 순차적인 능보와 방벽은 한 곳이 장악당하더라도, 상위의 능보 혹은 성벽 위에서 장악한 적을 일제히 소탕할 수 있게끔 세심하게 설계됐다.
방벽은 제국의 마법사가 마력을 불어 넣은 막강한 석재를 써 여간한 포격은 물론이고 잡스러운 마법의 힘마저 빨아들인다는 효과를 가졌다고 한다.
이 요새를 카스무어 왕국이 공격한다는 소문이 퍼졌을 때 저지대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카스무어 돼지들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고 전한다.
실제로 공성전을 지휘하는 카스무어의 장군, 하드리아멘디쿠스는 성벽 너머에 모습을 드러내고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것도 무려 2개월이나.
요새의 단단함을 믿고 있지만, 목숨이 달린 일답게 나름 긴장하던 수비군들은 카스무어군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고 사기를 얻었다.
그들이 시간을 주는 동안 더 신선하고 많은 식량과 탄환을 요새 안에 잔뜩 쟁여 놓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좋은 소식만은 들려오지 않았다.
해상에서 카스무어 왕국의 해군이 저지대 연방의 상선을 마구잡이로 나포하고 있고 일부는 야밤에 항구에 접근해 포격을 퍼뜨리기도 했다.
그 충격에 궁전에 머무르던 저지대 연방의 수장 야스퍼의 아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복도에 나뒹굴어 주변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유산의 우려를 안겨 줬다는 불길한 소식이 퍼지기도 했다.
가장 좋지 않은 소식은 공격군을 지휘하는 하드리아멘디쿠스의 평판이다.
그는 공성의 달인이라고 한다.
저지대에서 장군으로 활동한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지난 전쟁에서 저지대를 공격한 곤잘로 공작의 참모로 여러 공성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고.
물론 그가 성공만 한 게 아니라 실패도 다수 거듭했지만 저지대 전장에 정통한, 보다 젊고 뛰어난 장군이 나타난 건 좋지 않은 징조다.
예전부터 카스무어 왕국의 저력은 장군의 우수함보다 군대의 근간을 이루는 보병대의 인내심과 노련함에 있다는 설이 파다했는데, 이제는 그 막강한 보병대가 우수한 장군의 지휘를 받게 됐으니 당하는 입장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 폭풍전야의 성채에 베르크 란은 손녀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느낌이 안 좋은데.”
마를로네는 전장 주변에 흐르는 귀기 어린 기운에 가볍게 몸을 떨었다.
때는 초겨울이었다.
하늘은 항상 흐리고 진저리나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며 대지를 병들게 했다.
“적군을 도우라니, 대체 무슨 생각일까.”
“……이유가 있겠지.”
베르크 란은 음산한 대지 위에 우뚝 선 성채를 보며 천천히 손녀와 함께 요새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의 첩자들이 꾸며 준 서류 덕에 둘은 어렵지 않게 들어갈 수 있었다.
부르봉어를 둘 다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도 요새를 지키던 수비병의 경계심을 허무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베르크 란은 천천히 요새 도시 전체를 한 바퀴 돈 후 속으로 생각했다.
‘대단히 강력한 요새다. 수만 명이 와도 쉽게 뚫리지 않을 정도로. 수비병의 사기도 높고 장비도 좋아. 군화도 튼튼하고. 굳이 우리를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이 정도로 강력한 요새는 쉬이 뚫리지 않는다.
적어도 베르크 란이 경험한 전장은 그래 왔다.
요새는 공격의 대상이 아니다.
포위하고 굶겨서 상대방을 끌어내야 한다.
외국과의 전쟁에서 마법사들이 활약하는 걸 본 적이 있지만, 여기엔 마법사들이 개입하는 전장은 아니다.
외국과 외국의 전장이다.
외국의 마법사들끼리 충돌할 수 있겠지만, 제국의 마법사에 비하면 외국의 마법사는 확연히 질이 떨어진다.
결국은 사람 대 사람, 병사 대 병사의 싸움이다.
‘이 요새는 쉽게 공략할 수 없다.’
그때 경비병의 맑고 고아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카스무어 놈들이 온다!”
그 말을 들은 베르크 란은 자기도 모르게 만족스러운 웃음을 머금었다.
그는 자신의 심장에 흐르는 피를 생각하고 있었다.
“너는 전쟁이다.”
그에게 권능을 주었단 미지의 사내가 한 말이 꿈에서 본 것처럼 노병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