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36. 대경기장 (6)
“아아아악!”
푹!
“커억!”
곳곳에서 노예들이 쓰러지고 있다.
“이 자식!”
겉만 당당한 겁쟁이 우줄두스의 투창마저 운 없는 노예의 몸을 꿰뚫었다.
뒤늦게 노예들은 루페르트 일행과 고어인의 동맹을 알아차렸지만,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다.
“이 새끼들?! 감히 짜고 우리를 공격해?”
고어인들의 후방에 자리 잡은 어두운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투창을 들고 저항했다.
그들의 솜씨는 꽤나 날카로웠다.
고어인 하나가 죽었다.
“끄아아악!”
우줄두스가 루페르트를 향해 소리쳤다.
“뭐 하는 거야! 누로스 놈! 뒤를 지켜 준다며?”
“기다려 봐.”
루페르트가 투창 하나를 들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비달이 말했다.
“거리가 꽤 있는데. 괜찮을까?”
루페르트가 노리는 어두운 피부의 노예는 가장 먼 거리에 있다.
힘껏 던져도 평범한 사람이라면 닿지 않을 거리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눈엔 닿는 거리다.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거리다.
투창 하나를 집어 들고 루페르트는 뒤로 물러났다.
스르릉-
발목을 묶은 사슬이 팽팽하게 당겨질 때까지.
한 팔을 적을 향해 내밀어 적에 대한 가늠자로 씀과 동시에 사슬의 길이와 자신의 보폭을 순간적으로 계산하고 힘껏 앞으로 달려나갔다.
잘 조련되고 조정되고 단련된 육체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부드럽게 루페르트가 생각하는 움직임을 재현했다.
짧은 거리를 질주 후, 그 속도를 실은 투창을 화살처럼 쏘아 낸 것이다.
쉬익--!
소리가 다르다.
투창을 주고받던 노예들이 확연히 그 차이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리가 다르다는 건 속도조차 다르다는 이야기.
포물선이라기보다는 직선에 가까운 궤도로 한 줄기 투창이 어두운 피부를 가진 노예의 목을 측면에서 꿰뚫었다.
“커억?!”
그 노예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루페르트처럼 측면의 안전을 확보해 기습받을 우려는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당하다니.
와아---!!
미미하던 관중석의 환호가 들불이 일어난 것처럼 커졌다.
방금 루페르트가 보인 묘기가 살육을 질릴 정도로 즐긴 룸인에게 강하게 와닿은 것이다.
“저 에피크로티아 놈. 제법인데?”
“사니움 어부 출신답군.”
“뭔 어부야?”
“사니움 어부는 작살을 던지는 걸로 물고기를 잡지만, 그물을 던진 것보다 많은 양을 건져 올리지.”
끊임없이 다투던 관중조차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정도다.
물론 그들의 잡담을 신경 쓸 처지는 아니다.
루페르트는 치열하게 눈동자를 굴리며 경기장 안에 나뒹구는 시체와 날아가는 투창들, 자신과 비달, 고어인들의 상황을 실시간으로 파악하며 머리를 굴렸다.
‘남은 건, 둘. 고어인들이 견제받고 있다.’
“비달.”
“어.”
“저쪽에 있는 놈들 잡아 줄 수 있나?”
“나한테는 먼 거린데.”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해 보지.”
“신호하면 동시에 던지자고. 놈들이 눈치채기 전에.”
루페르트와 비달, 두 노예가 동시에 투창을 들었다.
강인한 등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걸 느끼며 두 사내는 동시에 먼 곳을 향해 투창을 조준하고 하나가 된 것처럼 두 개의 투창을 동시에 날렸다.
슈육-
포물선을 그린 두 개의 투창이 고어인을 노리는 노예들의 몸에 나란히 박혔다.
“커억!”
“크으으으윽!”
두 명이 더 쓰러졌다.
이걸로 마지막이다.
‘열다섯 명째.’
루페르트는 속으로 세던 숫자를 되새기며 주위를 보았다.
감독관과 병사들이 움직이는 게 보인다.
곧 이 살육극은 종막을 고하리라.
루페르트에게 내일이 온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
주위를 위협하는 적은 없지만 루페르트는 사방을 주시하며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며 감독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다.
부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울렸다.
“무슨 소리지?”
확실히 하기 위해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물었다.
비달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드디어 끝이야.”
그가 웃었다.
“살아남았어! 누로스인!”
루페르트의 그의 이가 유난히 희고 그것이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크윽!’
몸이 흥분 상태였다는 걸 깜빡 잊었다.
깜찍한 고통이 고간을 찌르르 울리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덧없이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살아남은 건가.”
“대단하더군. 역시 누로스의 챔피언다운 솜씨였어! 대체 얼마나 죽이고 다닌 거지?”
“글쎄.”
루페르트는 모른다.
이 육체의 원주인이 어떤 사람이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왔는지.
이 대경기장까지 끌려온 걸 보면 순탄한 팔자는 아닌 것 확실하리라.
게다가 루페르트에게 중요한 건 이 인물의 정체는 아니다.
그의 문제는 처음부터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이놈의 얼굴도 보고 싶긴 하지만, 대체 언제쯤 이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거지? 여신님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경기장에서 승리를 거두었건만 악몽은 끝나지 않는다.
그건 그렇고 북소리와 나팔 소리, 함성 소리가 더 높아지는 까닭은 왜일까?
고어인들이 웅성거렸다.
우줄두스가 루페르트에게 소리쳤다.
“어이!”
루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았다.
“뭔가 낌새가 수상하지 않냐?”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고어인 하나가 문을 가리켰다.
정면에 있는 황동으로 사자의 모습을 표현한 크고 화려한 문.
저 문은 루페르트가 아는 문이다.
노예들이 서로를 죽이기를 주저하고 있을 때 저 문이 열리고 사신이 나타났다.
“룸인들이 저 문을 보고 있어!”
루페르트는 관중들에게 시선을 옮겼다.
고어인의 지적은 정확했다.
그들은 이 경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기대하고 있다.
더 잔인하고 더 화려한 살육을.
‘설마, 아직 안 끝났단 말인가.’
루페르트는 고어인들을 응시했다.
‘저들을 죽여야 하나.’
아니다.
그것만으로 저 잔혹한 민족이 만족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심심하고 단조롭지 않을까.
평범한 노예들의 살육전은.
룸인들이 저토록 흥분하는 건, 이 뒤에 있을 쇼의 화려함이 이전에 있던 것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이리라.
무엇보다 이 환호의 뜨거운 온도는 전에 느낀 적이 있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불길한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군중들은 연호하고 있다.
루페르트를 비롯한 노예들에게 죽음을 안겨다 줄 최악의 전사를.
우뢰와 같은 환호 속에서 문 너머에서 하얀 증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군중들의 환호가 더욱 거세졌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그 터질 것 같은 연호 속에서 경기장 위의 노예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죽어야 사명을 다하는 장기 말에 불과했다.
문이 열렸다.
문 너머엔 저 큰 문마저 압도할 정도로 위압적인 체구를 지닌 전사가 우뚝 서 있었다.
그가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인간의 얼굴을 모사한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쓰고 늑대의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근육질의 전사가 한 손엔 검, 한 손엔 방패를 들고 나타났다.
“……티그리트.”
루페르트의 입가에 비릿한 냉소가 떠올랐다.
왜 여신이 이 악몽을 끝내지 않았는지 이제는 알 것 같다.
아직 이야기도 시작하지 않은 모양이다.
여신이 보여 주려는 건 아무래도 저 가증스러운 챔피언으로 보이니까.
가벼운 짜증을 느끼며 루페르트는 주변을 돌아보았다.
같은 장면을 보는데도 느끼는 감정이 이렇게 다를 줄이야.
한쪽은 죽음과 절망을 보고 좌절하는데, 다른 한쪽은 다가올 살육극에 흥분을 금치 못하고 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룸인들은 절반의 목숨을 원했던 건 아닌 모양이다.
그들은 30인의 노예 전원이 죽기를 원했다.
그 부름에 응해 티그리트가 나왔다.
감독관이 방패를 든 병사들을 좌우에 세우며 노예들을 진정시켰다.
“가만히 있어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싶지 않다면.”
그들은 노예들이 손에 들린 투창을 내려놓으라 고함을 질렀고, 이에 응하지 않는 노예들에게 채찍을 휘둘렀다.
노예들이 흥분을 가라앉히는 동안 단상엔 화려하게 차려입은 사회자가 나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연설을 시작했다.
“준비한 희극은 잘 보셨습니까? 뭐, 재밌는 장면도 있었지만 지루하고 조잡한 장면도 없다고는 못할 겁니다. 저 위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시는 집정관 포르피리우스 님께서는 이 경기가 그분의 이름을 걸고 하는 것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조야하고 졸렬하기에 좀 더 새롭고 흥미를 돋울 수 있는 무대를 만들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사내가 황동 문 아래 우뚝 선 거구의 전사를 가리켰다.
“티그리트. 대경기장의 무패의 챔피언. 그러나 그는 동시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배교자이기도 하지요.”
연설자가 게슴츠레 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제야 티그리트에게 환호를 던지던 관중들이 티그리트에게 야유를 퍼부었다.
우우----
경기장 전체를 음산하게 울리는 야유 속에서 루페르트는 비달에게 물었다.
“티그리트라는 놈에 대해 잘 아나?”
“룸 제국에서 저자를 모르는 자는 아무도 없지. 황제조차 그를 아는데.”
“저자가 배교자라고 하던데.”
“그래. 이교의 신을 모신다고 들었다. 원래라면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검투사답게 최고의 경기에만 나오게 되지만, 배교를 했기에 이런 잡스러운 경기에마저 출현하게 된 것이지.”
“그가 믿는 신의 이름을 알고 있나?”
확인해 보고 싶다.
티그리트가 믿는다는 신을.
그 이름은 루페르트도 잘 알고 있다.
‘리프니에.’
“아니, 그는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어. 단지 호라가 아닌 다른 신을 믿는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지.”
“그래?”
“혹독한 고문이 있었지만,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하더군.”
“……왜 이름을 말하지 않는 거지?”
“그가 말하더군.”
비달이 비릿한 냉소를 머금으며 찬사와 야유를 한 몸에 받는 전사를 그늘이 진 눈으로 응시했다.
“자신의 신은 아직 이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져서는 아니 된다고.”
이제 그 챔피언이 노예들 앞에 다가왔다.
병사들이 그의 손에 들린 방패와 검을 수거하고, 대신 그를 위해 준비한 청동으로 만든 우아하고 미려한 투창을 그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 투창은 어째서인지 루페르트가 현재 깃든 육체의 영혼 깊숙한 곳을 꿈틀거리게 만들었다.
뭐랄까,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저 투창은 이 육체의 주인이 살던 고향의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우리끼리 죽이든, 죽이지 않든 결국 티그리트의 등장은 예정되어 있었던 것이군.’
그렇다면 지금이 전보다 훨씬 불리한 상황이다.
전에는 30 대 1의 싸움이었다.
숫자가 이제는 반으로 줄어들었고, 투창의 수도 별로 없다.
루페르트의 투창 통에 담긴 투창은 이제 2개뿐.
나머지 노예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숫자도, 투창도 전보다 훨씬 부족하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전보다는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세라고 할까.
여전히 살육이 가져다준 성적인 흥분은 고간 쪽에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만이 아닐 것이다.
누군가를 죽이고 피를 본 남자들의 몸에 흐르는 피는 이쪽이 30명이 있을 때 몸에 흐르는 것보다 더욱 뜨거울 것이라는 사실을.
무엇보다 루페르트는 저자를 증오한다.
‘티그리트.’
여신의 총애를 차지한 자.
그렇게 비열하고 못난 배신을 하고도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
그가 싫다.
그를 죽이고 싶다.
그 분노와 현재의 육체에 남긴 삐뚤어진 인격이 루페르트의 내면에서 그조차 상상하지 못했던 격렬한 화학반응을 일으켰다.
그 결과물은 기이하게도 놀이에 가까웠다.
‘죽여 보자. 저놈을.’
재밌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고간에 팽배한 성적인 흥분이 더욱 강렬해지는 걸 느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변태의 심장은 적어도 겁쟁이의 심장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