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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148화 (148/225)

148화 36. 대경기장 (2)

일전에 룸에 왔을 때 무너진 잔해를 본 적이 있다.

무너진 잔해만으로도 충분히 크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대경기장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다.

대리석과 아치만으로 이렇게 크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을 지을 수 있는 룸제국인의 기술력

은 가히 명불허전이었다.

실제로 본 대경기장은 눈으로 보이는 것보다 크고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거인을 벽돌로 삼아 쌓은 성을 보는듯한 기분이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 님께서 이번 경기를 준비하셨다. 경기만이 아니다. 뒤를 볼지어다. 룸의 시민들이여!”

커다란 바구니를 인 노예들을 거느린 사람들이 바구니에 담긴 빵과 소시지, 말린 생선 따위를 보이는 대로 던졌다.

군중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일부는 포르필리우스라는 이름을 연호했지만, 일부는 야유를 보냈다.

“비첸자드보다 못한데? 왜 검은 빵이냐고. 비첸자드는 하얀 빵을 줬는데!”

룸어는 지위가 높고 고도의 가정교육을 받을 수 있는 상류층의 언어라는 것이 룸 제국의 정신적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제국 전반에 깔린 생각이다.

그러나 실제로 본 룸 사람들의 말은 더럽고 천박했고 잔망스러웠다.

수많은 사람이 떠들고 있지만, 진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세련되고 위엄에 찬 듣기 좋은 목소리는 찾을 수 없었다.

남자들의 음정은 제국보다 훨씬 높았고, 말이 지나치게 많고 빨라 수다스러워 보였다.

마치 음표가 많은 악보처럼 말이다.

그 소란 속에서 이름을 알지 못하는 흑인이 말했다.

“내 이름 기억하나?”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달이네.”

비달이 움푹 파인 눈두덩 아래 자리 잡은 검은 눈동자가 경기장 곳곳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진행 요원들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이번 경기는 고슴도치인 모양이군.”

“고슴도치?”

“정말로 기억을 잃은 모양이군. 그 끔찍한 경기마저 잊어버린 걸 보니.”

철컥.

경기장 위에 오른 노예들의 발목엔 어김없이 쇠사슬로 묶을 수 있게 고리를 부착한 발찌가 채워져 있다.

간수들이 그 발찌에 쇠사슬을 집어넣고, 경기장 바닥에 튀어나온 고리와 연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루페르트는 고슴도치의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간수들이 투창이 가득 담긴 통을 노예 앞마다 갖다 놓는 걸 보고 루페르트는 고슴도치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었다.

‘고슴도치가 될 정도로 많은 투창이 꽂혀 죽는다는 의미인가.’

경기장 위엔 30명에 달하는 간신히 국부만을 가린 노예들이 사슬에 묶여 있었다.

그들의 배치는 제각각이었다.

멀찌감치 구석에 자리 잡은 자도 있고 거의 서로 맞닿을 정도로 밀접하게 배치된 자도 있었다.

어느 쪽이건 그들 앞에 8개의 투창이 담긴 통이 있었다.

화려한 색채를 가진 예복을 입은 사회자가 천둥 같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집정관 포르필리우스 님의 제공으로, 이제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고슴도치 경기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마음껏 즐겨 주시길.”

환호성과 함께 경기가 시작됐다.

루페르트에게 낯선 세계를 이야기해 주던 흑인도 루페르트에게 익숙한 언어를 내뱉으며 욕질을 하던 야만인도 모두 발목에 족쇄가 차인 채, 피를 갈구하는 군중의 환호성에 에워싸였다.

“멋진 경기를 펼쳐라.”

방패를 든 병사 뒤의 감독관이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이곳의 왕은 군중이다. 만약 그들이 야유를 보낸다면, 너희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럼에도 노예들은 주저했다.

갑자기 투창을 들고 상대방에게 집어 던져 죽여야 하는 상황이 바로 수긍하고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난이도가 높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군중들의 야유가 하나둘 들려오자 감독관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루페르트 일행이 나온 문과 반대쪽, 황동으로 장식되고 거대하며 누가 봐도 훨씬 더 강한 무언가가 안에 도사릴 것 같은 문이 열렸다.

그 너머에 있는 건 전사 그 자체를 육체로 빚은 듯한 사내였다.

크고 강력하다.

그 이상의 수식어는 필요 없었다.

한 가지 더 보탠다면 날래다는 표현도 쓸 수 있을 것이다.

은으로 만든 가면을 쓴 사내가 등장하자 군중들이 일제히 야유를 퍼부었다.

“배교자! 배교자!”

“신을 버린 놈!”

“역겨운 놈!”

하지만 루페르트는 그 야유 속에 자신이 받았던 것과 전혀 다른 감정이 숨겨져 있는 걸 발견했다.

그것은 기대이자 열망이다.

저 잔혹한 룸의 군중들은 저 사내를 야유하면서도 그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한 뚱뚱한 사내가 술잔에 가득 담긴 술을 배에 전부 쏟아 버릴 정도로 칠칠치 못하게 들이킨 후, 금지된 이름을 소리쳤다.

“티그리트!”

한 사내가 외치자, 다른 군중들이 덩달아 그 이름을 외쳤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티그리트!”

대경기장 전체가 하나의 이름으로 들썩거렸다.

그 안에서 경기장 곳곳을 감시하는 군인과 감독관, 문 너머에 으르렁거리는 야수, 경기장 위에 족쇄를 찬 채 죽음을 기다리는 스물아홉 명의 노예와 루페르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 이 사내가 티그리트라고?’

투구가 부착된 가면을 썼기에 얼굴은 알아볼 수 없지만, 저 몸.

저 크고 강한 야수를 닮은 육체는 루페르트의 기억에 화상처럼 새겨진 것과 정확히 일치했다.

‘틀림없어. 선제다. 철혈대제, 아니 노예제 티그리트다.’

이야기로만 듣던 검투사 시절의 노예제를 만났다.

그러나 그는 친절한 조력자도 권력을 두고 다투는 경쟁자도 아니었다.

병사가 그 앞에 투창이 담긴 통을 내려놓았고, 그가 투창을 들었다.

여기서 티그리트는 사형 집행인이다.

졸렬한 경기를 펼치는 하찮은 노예들을 벌하기 위한.

“노예들이 지나치게 소극적이기에 경기 내용을 변경하겠습니다! 오늘의 경기는 늘 하던 것. 배교자 죽이기입니다. 아니, 티그리트로부터 살아남기인가? 어느 쪽이건 좋습니다! 자, 판돈을 걸어 주십시오! 곧 속행하겠습니다!”

노예들이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늘 침착하던 비달도 온몸이 땀에 젖을 정도로 긴장하면서, 열 발자국 거리에 있는 루페르트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역시 믿을 건 자네뿐이군.”

“…….”

갑작스러운 기대.

루페르트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비달을 응시했다.

“옛 미네아의 경기장에서 원반과 투창을 던지는 경기를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갔다 하지 않았나?”

“그, 그런가?”

“기억 안 나나? 그대도 그곳의 챔피언이라고 했잖아?”

기억이 날 리 없다.

루페르트가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

“내 이름이 뭐였지?”

엉겁결에 루페르트가 물었다.

비달이 뭐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가 루페르트의 귀에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군중의 함성이 주변의 모든 하찮은 소음을 묻어 버렸으니.

“티그리트!!!!!”

군중들이 소리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경기장에 한 사내가 미간에 창이 꽂힌 채 누워 있었으니.

루페르트에게 험한 말을 쏟아 내던 야만인이다.

룸인의 언어로는 고어인.

제국의 일부 부족을 일컫는, 이제는 사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옛말이다.

티그리트는 제국을 통일하게 제국 이전의 색채를 가진 차별적인 용어를 모조리 정리했으니까.

제국이라는 이름에 어떤 수식어도 붙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룸 제국 시절에 제국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고어인, 아우리아 사람, 숲 부족, 트리에인, 마인인 등 다채로운 이름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 수많은 이름 가진 야만인 중 가장 강한 자가 투창을 들었다.

“저 마인인은 죽일 수 없어.”

비달이 투창을 들려다 내려놓았다.

다음 순간 번갯불처럼 날아온 투창이 흑인의 몸통에 정확히 박혔다.

그 투창에 담긴 힘이 얼마나 강한지 비달은 투창을 맞은 채 쇠사슬이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당겨지는 거리까지 날아간 후 숨을 거뒀다.

“…….”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루페르트는 저 멀리 서 있는 거대한 전사를 노려보았다.

‘이, 이게 노예제?’

언젠가 그와 검을 겨룬 적이 있다.

그는 말했다.

자신과 세 번 이상 합을 겨룰 수 있는 상대는 없다고.

자신이 강하다는 수사의 한 종류로 이해했다.

전혀 아니었다.

저건 괴물이다.

도펠죌트너니 마법사니 이런 이능의 힘을 더하고 뺄 것도 없다.

저 경기장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자는 존재 그 자체로 인간을 넘어서는 무언가다.

“죽여! 안 죽이면 우리가 죽어!”

노예들이 창을 들고 티그리트를 향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티그리트는 날아오는 창을 때로는 피하기도 하고 때로는 창대로 쳐 내기도 하며 때로는.

툭.

날아오는 창을 얼굴 바로 앞에서 붙잡기도 했다.

평범한 사람의 손엔 창이라고 불릴 정도의 길이를 가진 단창은, 그러나 저 가면을 쓴 전사에겐 단도처럼 작아 보였다.

핑그르르 단창을 손위에서 돌린 후 그는 그 단창을 그대로 원래의 소유자에게 돌려주었다.

푹!

“가아아아아악!!!”

또 한 명이 쓰러졌다.

열댓 개의 투창이 신경질적으로 날아갔다.

누가 봐도 티그리트가 고슴도치처럼 변할 정도의 화망이건만 티그리트는 그 안에서 무엇을 봤는지 흐느적거리는 움직임만으로 모든 투창을 피해 내고 그중 하나를 붙잡아 또 다른 노예의 몸통을 꿰뚫었다.

“어억!”

“아아아악!!”

노예들이 죽어 나간다.

30 대 1이라는 전력비도 절대적인 괴물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티그리트!”

“티그리트!”

경기장엔 그들의 신앙을 버린, 그러나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애증의 챔피언 이름만이 종교처럼 연호했다.

경기장이 떠나갈 것 같은 환호성 속에서 노예들은 순식간에 절반 이하로 줄었다.

이제 그 쓰러뜨릴 수 없는 존재는 루페르트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 살인자가 이제 루페르트를 주목하고 있다.

그가 통에 담긴 투창 하나를 가볍게 꺼내 루페르트를 겨냥했다.

꿀꺽.

루페르트는 침을 삼키며 그 끝을 노려보았다.

“…….”

머리로 생각해서 움직이는 게 아니다.

몸이, 아니 생의 의지가 그를 움직이는 것이다.

이 만연한 죽음과 피의 냄새, 지금도 온몸을 괴롭히는 갈증과 사슬에 묶인 쓰라림은 지금 상황이 꿈의 세계라기보다는 또 다른 현실이라는 걸 똑똑히 가리키고 있었으니까.

“죽여라!”

“죽여!”

“에피크로티아 놈을 죽여라!”

“사니움 놈을 죽여라!”

갑자기 관중석에서 소요가 일었다.

투기장에 만연한 살육의 흥분이 관중석에 옮겨붙었는지 두 관중이 갑자기 단검을 들고 서로를 향해 날카로운 칼날을 휘두르고 있었다.

“무식한 새끼! 저건 에피크로티아 놈이야!”

“사니움 놈이라고! 에피크로티아는 북쪽 미네아고 사니움은 남쪽 미네아야. 북쪽 미네아 놈들은 저런 금발이 나오지 않아. 우리 집 여종 하나가 에피크로티아 출신이라 잘 안다고!”

룸 제국 시민 사이의 결투는 관중석의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려나 싶었지만 루페르트에겐 해당 사항이 없는 일이었다.

이제 저 항거할 수 없는 사내가 루페르트를 창으로 노리고 있다.

어디로 향할 것인가.

늘 그랬던 것처럼 몸통인가.

순간 생각 하나가 들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이 상황이 리프니에가 자신에게 깨달음을 주기 위한 환상의 세계라면?

죽어도 되는 게 아닐까?

맞서 싸우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

푹!

창이 루페르트의 몸에 꽂혔다.

죽진 않았다.

하지만.

“아아아아아악!!!!!!!!”

그 고통은 과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온몸이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쭈뼛거리며 몸이 차가워지고, 시야가 어두워지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의식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루페르트는 사슬에 묶여 있었다.

익숙한 흑인이 그를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이. 괜찮나?”

“…….”

하얗게 질린 얼굴로 루페르트는 현실을 인지했다.

경기 전으로 돌아왔다.

회귀.

그 울림이 이토록 씁쓸하게 입 안에서 울린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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