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35. 재회 (5)
그 사내 티그리트는 인간 중에 솟은 산맥과도 같은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타고난 전사라기보다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존재라는 신호를 곳곳에서 섬뜩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무엇보다 저 크고 두꺼운 손은 인간에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루페르트는 그의 강인한 손에게서 황소와 곰을 연상했다.
‘이 사람은 진짜 티그리트인가.’
제국인이라면 노예제 티그리트의 전설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제국의 가장 권세 높은 가문의 난롯가는 물론, 짚더미 위에서 가축과 같이 뒤엉켜 자야 하는 하찮은 인간의 쓰러져 가는 움막에서까지 노예제의 이야기는 두루두루 제국 사람들의 입에 오른다.
그는 가장 비천한 신분에서 가장 고귀한 존재로 일어섰고, 당대 최강의 제국을 무너뜨리고 그보다 더 강한 제국을 만들어 냈다.
매 행적은 신화와 전설이며, 전장에서는 무패의 명장이자 무쌍의 장수다.
그 티그리트를 마주 보고 있는 것이 한 번 제국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은 망국의 황제라는 건 시간의 나선이 빚어 낸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아마 리프니에조차 예지할 수 없었을 것이다.
[ 루페르트 가우저.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해 보세요. 저는 듣고 있겠어요. ]
여신이 루페르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연못 앞에 두 황제가 마주 보았다.
각자의 수행원들은 멀찌감치 서서 각자의 주군을 지켜보았다.
티그리트의 수행원은 나무에 등을 기댄 채 두건으로 얼굴을 가렸고, 마를로네는 연못과 통하는 개울가에 쪼그려 앉아 개울의 돌멩이를 들췄다.
가재 몇 마리가 놀라 집게발을 들어 올리며 달아나는 장면을 마를로네는 쓴웃음을 머금으며 보다가 멀리 서 있는 두 황제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뭘 하려는 거지?’
이해할 수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그냥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그녀가 개입할 성질의 사건도 아니고 개입한다고 해서 유의미한 변화가 일어날 것 같지도 않으니.
하지만 조금은 걱정된다.
저 칠칠치 못한 황제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거한 앞에 굳은 얼굴로 서 있는 걸 보면.
‘지금의 내가 이 사람을 지켜 줄 수 있을까?’
사막을 닮은 색을 가진 여인이 마를로네에게 다가왔다.
“수행원은 멀찌감치 뒤로 빠지라네요.”
그 목소리는 달콤한 연기 같았다.
마를로네는 어떻게 같은 인간이고 여자인 저 여자의 목에서 저런 소리가 날 수 있는지 궁금해하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수행원들이 사라진 자리엔 이제 두 황제만이 아이를 빠뜨려 죽였다는 연못 옆에 남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두 황제의 대담은.
“두 번이나 서신을 보내게 해서 대단히 송구합니다.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했군요.”
루페르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말을 하면서 그는 티그리트의 얼굴을 살폈다.
그 무쇠 같은 얼굴에 떠오른 감정은 희미했다.
티그리트가 뒷짐을 진 채 천천히 옆으로 걸었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겐 눈치를 보고 낮은 사람에겐 모욕을 일삼는 하찮은 관료들의 행태야 익히 아는 바, 그대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내가 듣고 싶은 건 오직 하나야.”
티그리트가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루페르트는 협상이라는 실낱같은 가능성을 마음에서 깨끗이 지웠다.
‘역시, 이 사람과 대화는 성립할 수 없는 거구나. 이 사람은 티그리트지만 동시에 클라우데 2세이기도 하니.’
반쯤 신격화된 티그리트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행적 말고는 아는 바가 없지만, 클라우데 2세의 행실과 언행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철혈대제는 협상하지 않는다. 타협하지도 않는다.
그의 대화는 대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진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의 언어는 대체로 명령으로 이루어졌고 명령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는 드물게 협박이나 회유로 살짝 변화할 뿐이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 제국을 돌려받겠다.”
그는 지금 루페르트에게 명령하고 있다.
과거의 황제가 현재의 황제에게 명령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루페르트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누구도 내 제위를 요구할 권리는 없소.”
티그리트의 눈동자가 가라앉았다.
“설령 당신이 이 제국을 세운 자라고 할지언정.”
잠시 후, 티그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어리석은 건 알고 있었지만, 끝까지 어리석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건 날 선 조롱이었다.
루페르트는 그 행동이 대단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적어도 나는 당신처럼 은혜를 모르는 금수처럼 행동하지는 않아.”
예의와 허울을 지키려던 루페르트도 어느샌가 선제처럼 날카로운 말로 응수하기 시작했다.
“은혜라.”
티그리트가 코웃음을 쳤다.
잠시 씁쓸하게 입맛을 다시던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옆으로 거닐면서 자조적인 음성으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은혜를 입었지. 비할 바 없는 은혜를 입었지. 하지만 말이야.”
“듣지 않겠소.”
루페르트가 싸늘하게 말했다.
“당신이 뭐라 하건 나는 당신을 배은망덕한 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루페르트가 선제에 맞서는 논리다.
그 완강한 태도에 티그리트는 살짝 놀라는 눈치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협상은 결렬이군.”
그는 빠르게 포기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나?”
루페르트의 물음에 티그리트는 두 눈을 감았다 천천히 떴다.
다시 치켜뜬 눈동자에 서린 건 확신이었다.
“지켜보면 알겠지.”
“여신님 또한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그 여신은 너의 편이 아니다.”
“이간질이라는 게 철혈대제의 술수인가?”
“글쎄.”
티그리트가 돌아섰다.
성벽처럼 드넓은 등을 보인 채 최초의 황제가 물었다.
“평범한 자가 제국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나?”
강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 질문은 루페르트의 가슴 위에 무거운 돌을 괴는 듯한 압력으로 다가왔다.
“…….”
이미 몇 번이고 주고받은 문답이다.
티그리트가 루돌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할 때 루페르트에게 수시로 말했다.
평범함이라는 악덕에 관하여.
루페르트는 어떻게 보면 그 악덕으로부터 빚은 도자기와 같은 존재.
행동도 사고도 판단도 평범하기 짝이 없다.
그가 잘하는 건 축구와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괴이 앞에서도 잘 버틸 수 있다는 정도?
리프니에가 없었다면, 다음 기회가 없었다면, 루페르트가 이 자리에 설 일은 영원히 없었을지도 모른다.
티그리트는 그 루페르트의 약점을 정확하게 찔러 왔다.
“그대는 평범하다. 식견은 좁고 아둔하고 사람을 잘 골라서 사귀는 것도 아니며, 주체적으로 자신이 나서서 뭔가를 만들어 내기보다는 다른 사람이 만든 사건에 휘말려 호되게 두들겨 맞은 뒤에야 행동에 나서지. 그런 군주는 자신뿐만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만드는 법이다.”
티그리트가 냉소를 머금었다.
“착한 황제는 미친 황제만큼이나 제국을 병들게 하지.”
루페르트는 이 사내가 황제가 되기 전에 룸 제국의 검투사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약점을 잘 찾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는 점에서 확실히 검투사답다.
신랄한 말투는 상대방의 살점과 심장을 갈라놓던 칼날처럼 날카롭다.
하지만, 이쪽도 각오라는 걸 했다.
잠시 주춤했지만,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매만지며 담담한 눈으로 티그리트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입을 열었다.
“평범한 자도 제국을 지킬 수 있다.”
“어떻게?”
“왜 뛰어난 자만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 당신이 입고 있는 옷, 매일 신에게 감사하고 먹는 곡식, 당신이 허리에 찬 검조차 평범한 사람의 손에서 빚은 것이다.”
“양이 양 떼를 인솔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사람은 자신과 비슷한 사람에게 인도받는 걸 꺼리는 법이지.”
“당신의 치세를 많은 사람이 비난하고 저주하는 걸 보았다.”
“클라우데 2세 시절의 이야기인가?”
선제가 미소 지었다.
그가 룸어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 뜻은.
“너라면 더 잘할 수 있겠는가?”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가 티그리트에게 마지막에 했다는 그 말을 티그리트 본인의 입에서 재연하고 있다.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룸어로 대답을 할까 고민했지만, 대답하지 않는 쪽이 낫다고 판단했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치세의 결말을 지금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허무한 메아리 같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티그리트가 연못을 응시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너의 여신은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잔혹한 존재다.”
루페르트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신의 눈치를 본다기보다는 대꾸할 가치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티그리트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마치 사악한 어린아이 같지. 순진무구한 손으로 벌레의 날개를 잡아 뜯고, 움직이지 못하는 짐승을 끝없이 나뭇가지로 찔러 결국엔 죽음에 이르게 하는.”
“…….”
루페르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이 대목에서는 약간의 공감대를 느꼈다.
‘우리 여신님이 아이 같은 구석이 없잖아 있긴 하지.’
“그대에게도 장점은 있더군.”
연못을 보고 있던 루페르트가 턱을 들어 선제와 눈을 마주쳤다.
시선이 닿자, 티그리트가 냉소를 머금었다.
“사람이 무디다는 거지.”
“…….”
그것도 사실인 거 같다.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을 보고 멀쩡한 건 자신과 마를로네 둘밖에 없는 거 같으니.
“하지만 말이야. 루페르트 가우저. 시간이 갈수록 너는 여신님의 행동에 실망하게 되겠지. 너도 알고 있지 않나?”
“신과 인간이 같을 수는 없지.”
긴 침묵을 깨고 루페르트가 대꾸였다.
굳이 대답을 한 이유는 이대로 놔두면 티그리트가 끝도 없이 떠들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다.
“너로서는 여신님의 변덕을 견딜 수 없다. 나 정도나 되니 천 년 동안 견딘 것이겠지만. 하지만 어떤 사람은 우리의 여신님을 악마라고도 부르더구나.”
“내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게 악마라면, 나는 기꺼이 그걸 신이라 부르겠다.”
“멍청한!”
티그리트가 고함을 내질렀다.
“너처럼 평범한 자가 제위에 있으면 그 자체로 이 제국엔 미래가 없단 말이다!”
아무리 흔들어 봐야 흔들리지 않는 루페르트의 태도에 분노한 것이다.
루페르트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고 위축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의아함을 느끼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였나.’
제국의 건국자, 위기를 이겨 낸 구국의 황제.
역사에 새겨진 문구만 보면 망국의 황제인 루페르트와는 비할 바 없는 위대한 존재다.
하지만 막상 그 위대한 존재 앞에 대치하고 있자니 뭔가 생각한 것과 다르다.
그 위대한 존재도 지극히 개인적이었다.
그러니까, 적어도 루페르트의 눈엔 평범해 보였다.
“당신이 뭐라고 하건, 나는 듣지 않겠다. 나는 여신님의 유일한 사도이고 내 마음은 영원히 변치 않을 테니까.”
“그 여신님이 네 제국을 파괴해도?”
“여신님이 만들어 낸 재앙이라면 여신님이 수습할 수 있겠지. 무엇보다 나에게는.”
루페르트는 자신의 소라고둥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시간을 돌릴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건 저주가 될 수가 있지.”
“제국을 지킬 수 있다면 기꺼이 그 저주를 뒤집어쓰겠다.”
루페르트의 굳건한 모습에 티그리트는 입을 다물었다.
“…….”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루페르트의 어리석음에 대한 실망? 분노?
아니면 자신이 지키지 못한 맹세에 대한 수치심?
어느 쪽이건 루페르트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소라고둥이 가볍게 흔들리고 있다.
[ 슬슬 지루하네요. 제가 나서도 될까요? ]
그의 여신이 직접 나서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