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35. 재회 (1)
제국의 동쪽 국경엔 잡다한 소국이 자리 잡고 있다.
공국, 공령, 백국, 에미르국, 자치도시 등 잡다한 이름을 가진 그 소국들이 대국에 흡수되지 않고 제한적이나마 독립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두 개의 강력한 제국 사이라는 지리적 여건 때문이다.
노예 반도라고도 불리는 그 땅은 제국과 동방 제국 두 강력한 나라의 완충지대로, 일부는 제국 혹은 제국 선제후의 봉신이며 또 일부는 동방 제국의 봉신이기도 하다.
노예 반도의 가장 중간 즈음, 카렐리아를 바라보는 산악을 차지한 드라쿨레아 공국도 그러한 완충지대의 봉신국 중 하나다.
달의 예언자를 믿는 동방 제국과 달리 드라쿨레아 공국은 호라교-그중에서도 신교라고도 불리는 새로운 개혁 종교-중 가장 급진적인 종파의 믿음을 따른다.
공국의 종교적 성향은 제국에서도 가장 서쪽에 자리 잡은 트라이아 선제후령과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다.
이 공국의 지배자는 드미트리에 공작은 현재 쓰는 이름보다 비스투라라는 과거의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며 더 많이 알려진 자로 공작에 오르기 전엔 동방 제국을 끈질기게 괴롭히던 민족의 영웅으로 취급받던 자였다.
중과부적으로 동방 제국에 머리를 숙이고 봉신이 되었지만, 사실상 그의 나라는 독립국과 다를 바가 없다.
후계자를 자신이 지명할 수도 있고 종교도 자신이 정하고 군대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으니까.
의례에 따라 동방 제국에 아이를 볼모로 보냈지만 그건 남의 자식이다.
물론 자기 직함으로 선전포고나 친선을 맺을 수 없지만, 동방 제국이 묵인하는 행위. 이를테면 동방 제국의 적을 마음대로 치는 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노예 반도와 동방 제국에서 비스투라는 질풍 같은 기마 무리의 지도자이며 그 자신도 뛰어난 전사라는 평가를 받지만, 서쪽 제국에선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이웃한 강대국조차 우습게 보는 제국이 다른 나라의 봉신에 불과한 소국의 인물을 눈여겨본다는 것 자체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되는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비스투라.”
레벤호스트는 식견 넓음을 자랑하고 또 칭송받는 걸 즐기는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이름 없는 나라의 군주 이름은 생전 처음 듣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뭘 할 수 있는가?”
선제후가 루돌프라는 신비로운 사내에게 질문을 던졌다.
루돌프가 답했다.
“그의 기마 무리는 솔직히 말해서 제국 군대를 이기기 어렵겠지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처럼 잘 조직된 제국군을 만나면 산산이 조각날 것입니다.”
“그런 자를 끌어들이는 게 과연 옳은 건가? 다른 나라도 아니고 이교도의 수장인 동방 제국의 하수인을.”
레벤호스트는 비스투라라는 인물이 탐탁지 않았다.
자격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저 북방의 젊고 강력한 왕이라는 스베아 왕국의 왕조차 성에 차지 않는데 왕국조차 아닌 하찮은 공국, 그것도 동방 제국의 봉신을 끌어들인다는 것이 제국 선제후이자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명문가 출신인 그에겐 지저분하고 하찮아 보였다.
무엇보다 비스투라라는 이름은 그의 스승 마르틴 보엠이 알려 주지 않은 인물이다.
마르틴 보엠은 암살당해 죽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여전히 레벤호스트의 정신에 남아 숨 쉬고 있다.
“그의 군대는 약하지만 빠르지요. 그의 군대는 사실상 약탈자 기마 무리로 이루어져 있으니까요.”
“그래서?”
레벤호스트가 불쾌감이 남은 표정을 드러내며 날카롭게 물었다.
“제국의 동쪽을 흔들 수 있겠지요.”
루돌프가 담담하게 말했다.
“흔든다라. 그게 어떤 의미지?”
레벤호스트도 알고 있었다.
루돌프라는 사내가 생각하는 게 무엇인지.
하지만 그 생각이 자기가 생각해도 너무 끔찍한 것이기에 자기 생각이 아니라는 걸 중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이다.
선제후의 질문에 루돌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즉답했다.
“교회를 불태우고 사람을 죽이며 아녀자를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아 역병을 퍼뜨리고 시체를 나무에 장식처럼 걸고 지나가는 모든 곳을 폐허로 만들겠지요.”
그 적나라한 말에 선제후의 신하들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지나칠 정도로 끔찍한 계획이다.
제국을, 제국인도 아닌 야만인과 다를 바 없는 반도인보고 약탈하고 파괴하라고 하라니.
“그런 짓을 하면서까지 이 전쟁에서 이겨야 하나?”
레벤호스트가 중신들의 시선을 느끼며 차갑게 물었다.
“그런 짓을 하지 않고도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 생각하시면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허나.”
루돌프가 창밖으로 시선을 옮겼다.
“선제후님의 적들이 이 땅을 침범할 때, 그들은 저 동방의 야만인처럼 행동하겠지요.”
선제후의 날카로운 시선이 흐릿한 안개처럼 일렁거리는 루돌프의 얼굴에 화살처럼 꽂혔다.
하지만 루돌프는 일말의 두려움도 없이 말을 이었다.
“제가 걱정인 건 선제후님이 자랑하는 마구간입니다. 대륙에서도 으뜸가는 준마를 모아 놓지 않았습니까? 아름답고 우아하고 기품 있는.”
“…….”
“선제후님이 패배하면, 적의 군주는 그 마구간부터 찾아가 말들을 빼낼 겁니다. 이건 보장할 수 있어요. 제가 그들이라도 비슷한 선택을 할 테니.”
레벤호스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어처구니없지만 마구간 이야기가 선제후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했다.
그 정도로 이 루돌프라는 신비로운 남자의 말은 불쾌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그래. 맞아. 적들의 병사가 도시를 약탈하기 전에 황제가 내 궁전에 먼저 들러 궁전을 살펴본 후 내 말들을 빼 가겠지.’
그의 마구간엔 제국과 이웃한 왕국, 심지어 사막에서 데리고 온 최상의 준마가 넘쳐난다.
그걸 빼앗긴다는 상상은 막연하게 백성이 약탈당하고 교회가 불타는 것보다 레벤호스트에게 치명적인 감정을 안겨다 주었다.
전자가 책에서 본 전형이라면 후자는 그의 현실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가 처음이었으리라.
레벤호스트라는 긍지 높은 선제후가 처음으로 패배라는 막연한 상상을 현실로 인식하는 순간이.
그 패배를 면하기 위해 선제후는 중신들이 보는 가운데 엄숙하게 말했다.
“비스투라라는 자에게 서신을 보내라. 그도 신교의 가르침을 믿는 자. 친구는 많을수록 좋겠지.”
선제후는 그 말을 하며 루돌프를 찾았다.
그러나 그 신비로운 사내는 어느 순간 그의 시야에서 사라진 상태였다.
“멍청한 놈.”
그 사내 루돌프는 궁전 바깥에 있었다.
그는 트라이아 선제후 궁전이 자랑하는 꽃과 덩굴로 가득 찬 아름다운 정원을 주름진 눈으로 보고 있었다.
그 정원은 그렇게 크지 않지만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정도로 다채롭고 아기자기하게 잘 관리되어 있었다.
하지만 루돌프의 눈에 비친 그 정원은 불에 타고 시신이 도처에 널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풍경이다.
“자신이 땔감에 불과한지도 모르고, 그 아비가 내게 개처럼 고개를 조아려 얻은 자산을 자신의 실력으로 이루어 낸 것이라 단단히 착각하고 있구나.”
미래를 아는 자는 루페르트만이 아니다.
그 또한 미래를 알고 있다.
어쩌면 루페르트보다 더 정확하고 확실하게.
최초의 황제는 그늘진 눈으로 정원을 바라보다 문득 자기도 모르게 가슴 앞을 더듬었다.
있어야 할 물건이 없다.
소라고둥이다.
조금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허공을 더듬던 최초의 황제는 두 눈을 감은 채 여신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제게 가장 힘든 일이 뭐냐고요?”
그 여신은 천진난만했다.
그토록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음~ 글쎄요? 시간을 돌리는 걸까요?”
순진무구했다.
* * *
아카이아 성직 선제후령.
슈발츠마인과 트라이아, 디터팔츠 세 선제후령과 경계를 맞댄 이 작고 아름다운 땅은 선제후령이라고 하지만, 크기도 작고 인구도 보잘것없으며 상업도 대단하지 않다.
하지만 대단히 역사가 깊은 유서 깊은 도시가 있고 제국의 신자들이 우러러보는 제국 유일의 성지가 있는 제국 정신의 고향이기도 한 상징적인 영역이다.
아 작지만 풍요로운 땅을 다스리는 아카이아 대주교-선제후는 그 직위의 특성상 선제후령보다 슈발츠마인 안에 있는 제국 수도 테타우에 머무르는 일이 잦지만, 가끔은 대주교도 자신의 영지를 찾아와 밀린 일을 처리하곤 한다.
“그런 시시콜콜한 문제는 그대들이 알아서 하게.”
신하들 입장에서 성직 선제후들은 세속 선제후보다 모시기 편한 존재다.
선제후령의 모든 걸 자신과 가문의 것으로 여기는 세속 선제후와 달리, 성직 선제후는 상속이 불가하고 그러므로 그 땅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아 잡다한 공무를 대충 토착 귀족과 유력자에게 떠넘기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카이아 선제후령은 세 유력 가문이 사실상 지배하는 땅이다.
한때 최고는 아니지만, 두 번째로 제국에서 가장 명민하다는 평가를 들었던 아카이아 대주교가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이 선제후령의 주인은 자신이지만 정작 이 땅을 좌지우지하는 건 저 기생충 같은 세속 귀족이라는걸.
‘역겨운 놈들.’
하지만 대주교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는 더 고귀하고 먼 것을 보고 있다.
그가 선제후령을 오랜만에 찾은 것도 그 고귀하고 먼 것을 위한 작업 때문이다.
그의 별궁엔 제국은 물론 대륙 각지에서 모은 고문서 해석가들이 모여 있다.
그중엔 피부색이 다르고 생김새마저 다른 동방 제국에서 온 학자조차 있을 정도였다.
그 이교도는 그러나, 어떤 해석학자보다 탁월했다.
“에.”
이교도가 일말의 존중도 담기지 않은 푸른 눈으로 대주교를 똑바로 쳐다봤다.
“이번에 새롭게 발견한 신성한 사 음절의 발음 중 하나입니다.”
“에.”
대주교가 과할 정도로 혀를 굴려 그 음절을 발음했다.
“프. 리. 에.”
대주교의 근엄한 얼굴이 장난감을 얻은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프리에. 프리에. 에리프?”
이교도가 고개를 저었다.
“리가 최초의 발음일 것입니다.”
“그, 그래?”
그 이교도에 관해 대주교가 아는 사실은 하나다.
그 이교도는 동방의 악마학을 전공했다.
동방에서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던 몇 개의 왕국과 민족을 집어삼킨 소름 끼치는 악마를 연구하는 신비스러운 학회의 일원이라고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대주교가 묻자 이교도는 두 눈을 내리깔았다.
단지 생각하는 것만으로 몸을 바들거리게 하는 끔찍한 광경을 연상해서 자신이 이교도-아카이아 대주교-에게 약해 보이는 걸 피하기 위해서다.
확연히 힘이 줄어든 목소리로 이교도가 대답했다.
“불사자의 왕국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악마의 진정한 이름을 말이지요.”
여러 개의 이름을 가진 악마가 있다.
수많은 왕국과 민족을 파멸로 몰아넣은 그 악마는 이름의 가짓수만큼이나 많은 민족을 나락으로 몰아넣었다.
그 악마가 가진 수많은 이름 중에 진정한 이름은 단 하나.
이교도는 끝끝내 그 이름을 발음하지 않았다.
* * *
같은 시각, 리프니에는 인간의 몸으로 발코니에 서서 한 사내가 공을 갖고 노는 걸 보고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여신의 눈앞이 흐려졌다.
졸음이 느껴지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잠이라는 개념을 모르던 태고의 자신이 떠올랐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멸하는 존재.
신도 예외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