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38화 (138/225)

138화 34. 족쇄 (6)

두 번째 장례식.

여전히 피리스는 관 안에 다소곳이 누운 채 생전의 아름다운 자태를 마지막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에도 파리가 꼬인다.

곧 파리들이 알을 낳을 것이고 저 모습 또한 흉측하게 썩어 문드러질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 썩기 전의 피리스를 무심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

분노가 느껴졌다.

다름 아닌 피리스 본인에 대해.

‘내가 널 위해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그렇게 어리석은 짓을 반복하는 거냐?’

또 울피아나를 만나야 한다.

이번엔 무슨 소리를 할지 모른다.

루페르트의 공포 그 자체인 그 여자는 끝없는 수렁 같았다.

아무리 한낱 여자라고 생각해 봐도 실제로 루페르트 앞에 나타난 그녀는 저항하기 어려운 펄처럼 루페르트의 마음을 심연으로 이끌고 갔다.

‘또 그 짓을 해야 한다고?’

해야만 한다.

그런 의무감이 당연하다는 듯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장악했다.

피리스는 회귀로 인한 변화의 상징 같은 존재.

그녀가 죽는다는 건, 루페르트의 제국 또한 멸망하리라는 징조로 보였으니.

피리스 개인에 대한 호감도 한몫했지만, 이제는 그 호감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너무나 어리석다.

마음은 알겠지만, 그 마음 때문에 자신에게 피해가 온다는 것 자체가 싫었다.

그 싫은 마음은 이내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에게 전가됐다.

“아, 폐하. 어둠의 힘을 막기 위한 환상의 약제 엘릭서를 복용했음에도 그녀가 본 어둠이 너무나 짙고 그녀의 마음이 너무나 연약하여 어찌할 방도가 없었습니다.”

오각의 마법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변명을 해 댔다.

화를 낼 순 없는 노릇이다.

‘이 인간한테 말해 봐야 뭘 하겠나.’

중요한 건 배경이다.

루페르트는 장례식에 모인 몇 안 되는 마법사를 눈으로 살폈다.

어린아이들이다.

겨우 열 살을 넘은 것 같은 꼬마들도 있었다.

피리스와 같은 교실에 있었던 아이라는 모양이다.

말하자면 동기라는 소리.

루페르트는 그 아이들을 불러 모았다.

황제의 부름 앞에서 아이들은 그 또래 아이들답게 신나 하면서도 자기들끼리 진정시키며 애써 황제 앞에서 예의를 지키려는 시늉을 했다.

‘진짜 꼬마들이군. 이런 아이들과 공부를 했다는 건가.’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집단을 이루는 단위 중 주로 보이는 게 연령이다.

이질적인 연령은 주된 연령집단에게 배척당한다.

아마 마음고생이 꽤 심하지 않았을까.

“이 언니. 엄청 열심히 했어요. 잠을 자는 걸 본 적이 없어요.”

“우리하고 딱히 어울리려고 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잘해 준 거 같아요. 요리도 잘하고.”

“남자아이들이 치마 안을 보겠다고 어찌나 추근거리던지. 그래도 늘 언니답게 타이르셨죠.”

“좋은 누나였어요. 그런데 너무 열심히 하더라고요. 학교에서 경고하는 빨리 죽는 마법사처럼 행동했어요.”

아이들의 증언으로 루페르트는 신입생 시절의 피리스를 재구성했다.

말 그대로 앞만 보고 달리는 맹목적인 학생이었다.

그 맹목적인 전진의 목적이 뭔지 모를 정도로 루페르트는 박정하지 않다.

‘피리스.’

아마 자신과의 약속을 위해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고, 그 노력이 벽에 부딪히자 결국 스스로 죽음의 길로 들어섰으리라.

‘마법사를 그만두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그것도 안 될 것 같다.

이미 그녀는 루페르트가 개울에 흘려보낸 종이배다.

그 종이배는 바다로 가기를 희망한다.

중간에 건져 봐야 그 종이배는 어떠한 희망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이미 피리스의 마음이 극한에 몰렸다는 건 누구보다 루페르트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자신도 비슷한 경험을 했으니까.

아무것도 없던 시절, 보다 나아지기 위해 얼마나 노력에 노력을 거듭했던가.

그녀가 옮겼던 감기의 고통은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의 뜻을 꺾게 하는 방법은 없다. 오히려 그 뜻을 꺾는다면 그녀조차 꺾이겠지.’

다른 방법이 필요하다.

루페르트는 자신이 아는 또 다른 마법사, 지겔슈타트를 찾아갔다.

여전히 병상에 누운 그는 수척한 얼굴로 자신의 황제를 맞이했다.

“폐, 폐하!”

“누워 계시게. 오늘은 편하게 몇 가지 묻고 싶어서 왔으니.”

의외의 인연이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보다 큰 도움이 된다.

루페르트는 차분하게 피리스와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울러 그녀의 멈출 수 없는 의지에 관해서도.

“아,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뭐, 흔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대학에서는.”

지겔슈타트가 신비로운 눈을 번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많이들 죽는가?”

“많이들 죽지요. 우리처럼 재능의 한계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직군도 달리 없으니까요. 그래서 많은 사람이 어둠의 힘에 손을 뻗치는 것이지요.”

“그 어둠의 힘이란, 역시 악마를 말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악마가 유혹해서 사람을 죽이는 건 아니겠지?”

“아니오. 개개인에게 관심을 둘 정도로 악마는 한가롭지도 않고 가까운 존재도 아닙니다. 어둠의 지식을 얻고 죽음에 이르는 마법사들은 고작 악마의 작은 발자취 하나만을 보고 죽는 것에 불과하지요.”

그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수척한 지겔슈타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좋은 사례가 어디 있을까.

고대의 악마를 단지 눈으로 보고 느낀 것만으로 저 고고한, 마를로네와 티격태격하던 마법사가 이 지경이 이르렀는데.

일반 병사 중엔 미쳐 버려서 전역한 사람도 부지기수라고 한다.

“그녀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 마법사를 그만두지 않는 선에서 달리 고찰할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지겔슈타트가 잠시 고민했다.

“그저 알고 싶을 뿐이네. 이것이 대학의 방침에 위배된다고 해도 우리끼리만 알면 되지 않나.”

루페르트가 간청했다.

이에 지겔슈타트는 한숨을 내쉬고 그가 알고 있는 비밀의 방법에 관해 이야기했다.

“……마녀가 있습니다.”

“마녀?”

“어둠의 지식을 오랫동안 다룬 인간들이지요. 우리 대학에도 악마학자가 있지만, 진정으로 악마를 접하고 그에 관련된 지식을 추구하는 사람은 마녀뿐입니다. 제가 알기로 여러 마법사들이 외연의 확장을 위해 은밀하게 마녀와 접촉해 그들이 알고 있는 샛길을 배우려 하지요. 제가 알기로는 피리스의 스승 헬브라이트 베틀렌도 젊은 시절 마녀와 접촉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어디까지나 낭설입니다. 그 사람의 나이는 저조차 알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우리 대학에 괜히 나도는 낭설이란 존재하지 않지요.”

마녀.

루페르트는 일전에 만난, 베르크 란을 경기에 휩싸이게 한 신비로운 마녀를 기억했다.

‘그래, 그 마녀가 있었지.’

그러고 보니 그 마녀가 한 말이 있다.

제자가 필요하다고.

그 사실을 모르는 지겔슈타트는 수척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접촉하는 것만으로 다른 마녀로 몰려 죽임을 당하기 일쑤지만, 그 마녀는 어둠의 지식에 삼켜지지 않고 그 심연을 들여다보고 나오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녀를 찾는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알고 있다.’

“마녀를 찾는다고 해도 마녀의 재주를 배우는 게 쉬운 일도 아니고요. 마녀들은 변덕이 대단히 심하거든요.”

‘그 마녀는 제자를 찾는다.’

모든 환경이 완비됐다.

회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맙네. 지겔슈타트.”

루페르트가 마법사의 두 손을 꼭 잡았다.

“폐하.”

“그대를 치유하는 방법도 마녀가 알고 있는가?”

“글쎄요. 아, 괜찮은 비약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헬브라이트 베틀렌이 만든?”

“아니오. 그건 마녀가 만든 비약의 열악한 모조품일 겁니다. 게다가 전 약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지겔슈타트가 루페르트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 신비롭고 병약한 눈빛에 서린 굳은 의지를 느끼며 루페르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좋아. 내 다녀오지.”

“폐하?”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들었다.

부우우우우우--

다시 한번 회귀가 시작됐다.

변화의 시작을 지키기 위한.

어두운 복도가 다시금 루페르트 앞에 펼쳐졌다.

이제는 아무도 없을 영원한 어둠에 잠겨 있는 복도.

루페르트는 철혈대제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어?”

루페르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사람이 있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 사람의 정체는 다름 아닌 그의 여신이었다.

“우리 솔직하게 이야기할까요?”

* * *

저지대 연방.

제국의 서북쪽을 장악한 간척민들의 뿌리는 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대륙 중앙을 차지한 전사 부족의 후예들이다.

그러나 펄과 늪, 빽빽한 삼림이 둘을 오랜 시간 갈라놓았고 그 단절이 언어의 분절과 문화의 차이를 만들어 냈다.

여전히 저지대 연방은 제국 의회에 참석할 자격이 있는 제국의 일원이지만 저지대 연방 내부에서는 이미 그들은 제국이 아니라는 조심스러운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그 저지대 연방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다.

공격자는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 왕국이다.

동료들 사이에서 하드리아멘디쿠스라 불리는 왕국의 장군 산체스 에르난 데 하드리멘디가 삼만 명에 달하는 야전군을 이끌고 남부 저지대 연방에 상륙해 공격을 시작했다.

경험 많은 군대와 노련한 장군이 이끄는 강력한 군대 앞에서 저지대 연방이 택한 건 그들이 자랑하는 강력한 성형(星型) 요새로 보호받는 수성전이었다.

그러나 하드리멘디는 공성전에 일가견이 있는 인물이었다.

오히려 야전보다 공성 경험이 많고 숱한 요새를 함락시키기도 했다.

그의 군대는 카스무어 왕국이 장악한 남부 저지대와 북부 저지대를 잇는 주요 축선을 장악하는 요새도시 그레나스를 포위했다.

그레나스는 저지대 연방에서 5성급 요새라 분류된 난공불락의 요새로 높은 사기를 지닌 3천 명의 주둔군에 의해 수비 되고 있는데, 하드리멘디의 항복 요구에 당연하다는 듯이 항전을 천명했다.

도시 주위에 공성 방벽이 세워졌고 이국적인 언어를 쓰는 병사들이 참호를 파 요새로 접근했다. 땅굴이 마치 음습한 뱀처럼 요새의 내부로 파고들려 하지만 수비군은 불에 태운 유황으로 그들을 쫓아냈다.

하드리멘디는 조바심을 내지 않았다.

북쪽 바다는 카스무어 왕국의 막강한 함대가 장악하고 있고 설령 바닷길이 막힌다고 해도 남쪽 자부아 공작령을 통한 육상 교통로도 건재하다.

카스무어 왕국은 돈이 많다.

신대륙에서 그들이 얻은 건 역병만이 아니었다.

일설에 의하면 사람이 사라진 도시에서 그들은 도시 전체를 뒤덮은 금박과 황금 구조물을 발견했고 역병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보내 그 금박을 모조리 긁어내 왕국의 보물창고에 넣었다고 한다.

그렇게 손에 넣은 금은 제국이 지닌 황금 전체보다도 많을 정도라고.

그 막대한 재원에 의해 움직이는 강력한 군대가 연방 전체를 멸하려 한다.

새로 저지대 연방 의장에 오른 야스퍼는 황제에게 전쟁을 중재하길 원하는 탄원서를 작성했다.

제국의 새로운 황제 루페르트 1세는 저지대 연방의 탄원을 일축했다.

카스무어 왕국이 제국의 동맹국이기 때문이다.

저지대 연방은 비록 외국 취급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제국 의회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제국의 일원이다.

외국이 제국을 치는데 제국은 좌시하고만 있다.

저지대 연방이 사실상 외국이며 외국 취급을 받고 그들 스스로도 제국과 분리된 정체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사람이 억울해지면 뭐든 구실을 붙이는 법이다.

저지대 연방은 전쟁을 중재하지 않은 루페르트와 제국에게 강한 배신감을 느꼈다.

그런데 제국은 하나가 아닌 여럿의 연합이다.

제국의 일부가 저지대 연방에 은밀하게 연락을 취했다.

“레벤호스트 선제후에게서 온 전갈입니다.”

저지대 연방의 지도자 야스퍼는 최근 새신부를 맞이했다.

귀족이긴 하나 봉지도 없고 재산도 없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전에 저지대 연방을 이끌던 그의 형 빌렘 1세가 유언으로 결혼을 권장했고, 서둘러 전부터 마음에 있던 여인과 결혼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새로운 의장이자 새신랑인 야스퍼는 사십을 넘긴 나이에 키가 크지만 늘 허리를 숙여 실제보다 작아 보였고 유약하고 어눌한 관상의 소유자라 타인의 오판을 사기 십상이었다.

하지만 연방의 새로운 지도자는 눈으로 보이는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다.

그 또한 형과 함께 저 끔찍한 철혈대제의 치세를 눈으로 보고 겪었던 사람이다.

그는 제국이 어떻게 하나였던 저지대 연방을 남북으로 찢어 놓았고, 그 나머지 반쪽을 카스무어라는 사냥개에게 던져 주는지 톡톡히 보았다.

이제 그 사냥개가 나머지 북쪽마저 먹어 치우려 한다.

“레벤호스트라.”

야스퍼는 코웃음을 치며 선제후에게서 온 서신을 눈으로 읽어 나갔다.

어눌한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이 선제후.”

야스퍼가 말했다.

“미쳐 버린 건가?”

“선제후가 뭐라고 했습니까?”

그의 좁은 집무실엔 스무 명에 넘는 사람들이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몰려 있었다.

그 중심에서 야스퍼가 말했다.

“그 선제후는 제국을 넘어 대륙 전체를 불태우려 하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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