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34. 족쇄 (5)
황궁의 집무실엔 여러 황제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하나 같이 제국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국을 대륙의 패권국으로 끌어올리거나 지킨 불굴의 군주들이다.
거기엔 철혈대제의 초상화도 포함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 철혈대제의 초상화를 보고 지혜와 용기를 겸비한 현명하고 강한 노인의 모습이라는 평가를 내린다.
초상화 속의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는 확실히 노인의 모습이다.
하얗게 센 수염과 주름진 얼굴을 보면.
루페르트도 처음 선제의 초상화를 봤을 때 다른 사람과 비슷한 감상을 느꼈다.
위엄 있고 자신이 닮고 싶은 모든 것을 가진 진정한 황제라고 약간의 질투와 무한한 존경을 담아 멍하니 보곤 했다.
모든 것은 변하는 법이다.
이제는 그 초상화가 다르게 보인다.
볼 때마다 초상화 속의 노인의 얼굴이 조금씩, 미묘하게, 마치 꿈에서 본 것처럼 변해 있는 것이다.
지혜롭고 현명하고 강한 노인이라는 특징을 제외하면 초상화 속의 인물은 어떤 때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예민한 사람이라면 정신병에 걸릴 정도의 변화지만, 루페르트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있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쩌면 저 초상화조차 리프니에의 권능이라는 바다 위에서 넘실거리는 한 조각 배일지도 모를 일이니까.
한때 이 초상화는 루페르트의 고민이었다.
그 초상화 속의 인물이 자신에게 도전을 선언한 이후에는 애써 외면하고 싶어, 아예 그걸 치우는 것도 고려했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제대로, 그 노인을 직시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했다.
지금 화폭에 담긴 인물은 현명하고 지혜롭고 강한 노인의 또 다른 변형이다.
모두가 생각하는 철혈대제의 개성이랄까.
그 철혈대제의 초상을 보며 루페르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입니다. 폐하.”
“알고 있다.”
울피아나의 집에 방문하는 날이다.
그 여자를 상대하는 건 정말이지 끔찍한 일이다.
과거엔 증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실제로 마주 잡은 울피아나는 또한 연약하고 가녀린 한 명의 여자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여전히 루페르트의 족쇄다.
“폐, 폐하! 폐하!”
광기를 머금은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볼 때 루페르트는 자신의 죄악감이 차오르는 걸 느껴야 했다.
그녀가 벨벳처럼 부드러운 손으로 자신의 손을 잡을 땐 가장 끔찍한 뱀에 자신의 몸을 휘감기는 감각을 느껴야 했다.
왜 그런 것일까.
언젠가 우회적으로 이 고민을 그의 총신들에게 풀어놓은 적이 있다.
“어떤 여자가 있어. 내가 보는 것만으로 두려움을 느끼는 여자가 말이야. 뭐랄까, 아무리 상대해도 익숙해지지 않고 오히려 공포심만 늘어나는데, 과연 그대들은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그의 총신 중 어느 누구도 루페르트가 말하는 여자가 울피아나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녀는 대단히 아름답고 총명하며 우아하면서도 덕행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살았고, 무엇보다 저 고어문트 선제후의 하나뿐인 딸이니까.
“놀랍군요. 듣자 하니 렌타이어마르크의 괴물을 보고도 단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는 폐하가 무서워하는 여자가 존재할 수 있다니요.”
“여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남자가 행동하면 따라오는 무언가죠. 닻줄이 닻에 끌려오지, 닻줄 자체가 닻을 움직이는 건 아니잖습니까?”
오토 브라에와 베르너는 루페르트의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
당대의 인사처럼 그들도 여자를 남자보다 열등한 존재로 여겼고, 그나마 몇몇 힘 있고 권세 있는 인물 정도만을 예외로 치켜세우는 정도였다.
그런 그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황제가 여자 하나에게 휘둘린다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단 한 명 요하네스만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세상에 진정으로 여성을 극복한 남자는 그리 많지 않다고 합니다. 그 전설 속의 수많은 군왕 중 아내에게 타박을 안 받은 사람은 드뭅니다. 그거 아십니까? 저 티그리트 황제조차 장모에게 갖은 구박을 받았다는 사실을?”
“그래? 그건 그렇고 특이하게도 장모에게 당하고 사셨군.”
루페르트가 관심을 드러내자 요하네스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찻잔에 차를 따라 모두에게 대접한 후 이야기를 시작했다.
“티그리트 폐하는 룸인과 결혼했습니다. 룸의 귀족 가문이지요. 군사를 모집할 비용과 훈련할 돈, 장비까지 모두 처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아내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은 이후에도 처가와의 관계는 계속됐죠. 그때 그 장모가 참 지독하리만치 그 노예제를 달달 볶았다고 하더군요. 검투 경기장에서 세 개의 머리가 달린 괴물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던 그분이 장모만 나타나면 그 큰 몸을 움직여 피할 정도라고요.”
“그건 흥미롭군. 어디서 나온 내용이지?”
“일종의 야사지요. 입에서 입으로 전하는.”
그 말을 들은 베르너가 한마디했다.
“누군가의 창작이겠지.”
“그럴 수도 있지요. 하지만 남자니 여자니 선을 그어도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성별이 뭐가 중요합니까? 연애할 때나 관계가 있지 사람 관계라는 건 결국 본격적으로 얽히고 얽힌 다음에야 우열과 호오가 갈라지는 게 아닐까요?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요하네스의 천연덕스러운 대꾸에 오토 브라에는 웃기만 했지만, 베르너는 여전히 하찮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대체로 아녀자라는 건 감정에 치우쳐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생물이지. 그런 여자에 휘둘린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의 자질이 부족한 게 아닐까?”
그는 요하네스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칼만 들지 않았을 뿐이지 명백한 적의가 그의 충직한 눈길에 담겨 있었다.
이에 요하네스는 은은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능글맞게 물었다.
“선제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선제라니?”
“왜, 선제께서도 대황후와 거의 한 몸처럼 움직이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예외지.”
“왜요?”
“대황후는 다른 여성과 다른 존재니까.”
“그런 예외가 있다면 또 다른 예외가 있지 않을까요?”
“아주 드문 예외야. 천 번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그런가요?”
루페르트는 총신들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보며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분위기를 달랬다.
“웃자고 한 소리인데 다들 너무 예민한 거 같군.”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그의 총신들의 마음이 하나가 아닐 수도 있다는.
황제를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기계부품이 아니라, 먹이를 두고 치열하게 서로 대가리를 들이미는 아기 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결국 모든 이는 권력을 추구하는 법이다.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총신들은 저마다의 장소에서 개성과 능력을 발휘해 자신을 보필하는 게 좋겠지만 총신들 각자의 생각은 다르리라.
저마다 누군가의 위에 서서 황제 아래서 권력을 휘어잡은 유일한 총신이 되길 원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신의 권력은 물론이고 자신이 구상하는 계획을 한껏 발휘할 수 있을 테니까.
‘결국 이들도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뜯을지도.’
아무튼 그때의 대담이 약간의 도움은 됐다.
특히 요하네스의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게 얽히고 얽힌 다음에야 비로소 시작된다고 했던가.’
울피아나와는 처음부터 이상하게 얽혔다.
그녀가 사람이 조금 이상한 것도 맞다.
루페르트가 다른 사람보다 심약하고 주눅이 든 위치에 있었던 것도 맞다.
하지만 그녀는 루페르트와 달리 모두에게 인정받았고 사랑받았다.
그녀를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평판을 만든 건 그녀의 얼굴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수많은 사람을 자신의 포로로 삼고 진정 어린 선의로 추종자로 끌어들였다.
방구석에서 플루트나 불고 공이나 차던 하찮은 황제와는 전혀 다른 빛 속의 삶을 살았고, 그 빛들이 모인 세계에서도 가장 밝은 빛이었다.
단지 루페르트에게 불행이 있다면 그 사람이 자기를 안 좋아한다는 것.
그 싫다는 표현이 지나칠 정도로 사무친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잘못 얽힌 덩굴은 쉽게 풀 수 있는 게 아니다.
“페하! 정말로 고마워요! 저 같은 하찮은 여자를 이렇게 격려하기 위해 몸소 찾아와 주시고.”
그 여자가 지금 루페르트의 품에 안겨 있다.
제멋대로.
루페르트의 손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른 채 허공에서 표류하다 시종과 하녀의 눈을 보고서야 어색하게 울피아나의 등을 쓸어내렸다.
“기운을 내세요. 울피아나 님. 지금 제국은 누란의 위기입니다. 저처럼 불안한 황제가 후사를 낼 욕심을 부리다간 제국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불찰은 이 루페르트가 비록 슈발츠마인 가계라고 하나, 하찮은 방계 출신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울피아나 님에겐 어떠한 악감정도 없습니다. 다만, 저에겐 제국이 더 소중할 뿐이지요.”
마음에도 없는 구구절절한 변명을 하며.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지껄인 변명이 적어도 울피아나의 심금을 울린 건 확실했다.
“역시, 폐하! 제국과 결혼하셨군요! 역시 폐하세요! 이 울피아나! 폐하를 보니 저의 어리석음과 식견 좁음에 정말이지 통탄을 금할 수 없네요! 폐하! 저, 다시 일어서겠어요! 일어서서 폐하의 곁에서 폐하를…….”
끝도 없이 루페르트를 붙잡고 이야기를 늘어놓는 걸 보면 말이다.
정작 황후 시절엔 1초도 있기 싫어했다는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하지만 이제 1초도 있기 싫은 건 루페르트다.
‘이야기가 끝날 거 같지 않아. 어째, 전보다 더 빨리 놔주지 않는 거지?’
뿌리치고 싶지만 옆에서 골트문트가 지켜보고 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매몰차게 뿌리치면 골트문트와 적이 될 판이고, 그렇다고 계속 있자니 마음의 한계가 시험받는 느낌이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의 상황.
루페르트는 과거의 자신에서 해법을 발견했다.
“커억!”
꼭두각시 시절 루페르트의 전매특허 하나.
꾀병이다.
울피나아의 타박을 듣던 중에 창안했다.
잔소리와 타박의 수위가 한계에 달했을 때 루페르트는 느닷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휘청거려 그녀의 입을 닫게 만들었다.
처음 몇 번은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폐, 폐하?!”
“아, 미안해요. 요즘 무리를 하느라.”
“제가 문제가 아니네요. 폐하. 어서 들어가 쉬세요. 폐하가 쓰러지시면 우리 제국은 등불을 잃게 되는 거니까요.”
루페르트는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간신히 울피아나 옆에서 떨어지는 데 성공했다.
골트문트가 다가와 걱정하는 척을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아무튼, 오늘도 끔찍한 하루였다.
‘아니, 이 여자는 왜 패턴이 바뀌는 거지? 전엔 그냥 놔줬잖아. 분명 전과 똑같은 흐름이었는데 왜 말이 많아진 거야?’
두 번 할 짓은 아니지만 두 번을 했다.
세 번은 없길 바란다.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가 황궁에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리는 건 저지대에서 벌어지는 전쟁과 관련한 무수히 많은 문서였다.
그 문서들을 보면 울피아나의 변화도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같은 문서라도 전과 미묘하게 문구가 다르거나 과정이 다르다.
결론 자체가 바뀐 건 아니지만 사람 마음이란 게 작은 부분에서 미묘한 변화를 일으킨다는 소리다.
그 변화에 루페르트는 가벼운 놀라움과 피로를 느끼며 늦은 시간까지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했다.
기분 좋게 잠이 든 다음 날. 대학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피리스가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