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32. 마녀의 비약 (4)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책사이며 나아가서는 레벤호스트의 숙주라고까지 불리는 마르틴 보엠 목사의 일과는 교회에서 사자처럼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날도 명성 높은 신교 목회자의 기도문 낭독을 듣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그를 지켜보았다.
“세상에 어쩜 저렇게 웅장하고 듬직하실 수 있을까.”
“산악 종파에서 교육을 받은 분답네요.”
“폐하도 목사님의 설교를 듣는다면 생각을 바꾸실지도 모를 텐데 안타깝네요.”
대부분의 종단이 그렇듯 신교도 하나로 뭉뚱그려 불리지만 그 안에도 수많은 종파가 있다.
마르틴 보엠은 산악파라고 불리는 붉은 산맥 일대의 신교 집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여느 신교와 달리 산악파는 구교라 불리는 호라 교단을 아예 해석을 달리 하는 신자가 아닌, 적으로 규정한다.
그렇기에 그토록 맹렬하게 황제에 대한 적의를 불태울 수 있는 것이다.
황제가 곧 케케묵은 구교의 수호자니까.
“……믿음 속에서 나는 진실을 찾노니. 장님이 되어도 진리의 빛을 볼 것이고, 귀머거리가 되어도 복음을 들을 것이다.”
기도문 낭독이 끝난 후에 마르틴 보엠 목사가 하는 일은 푸짐한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는 하루에 한 끼, 아침만을 먹었다.
점심과 저녁은 힘써서 농사를 짓지 않는 그에게 과분한 것이라 여겨졌다.
그런 것치고 아침을 너무 호화롭게 잘 먹는 편이긴 했지만, 습관으로 굳어졌고 목사 개인적으로도 꽤 합리적인 식사 방식이었다.
배부름은 그가 자랑하는 지성을 둔하게 하는데 제국의 오전은 다들 느슨하고 태만하다.
특히 레벤호스트는 잠꾸러기로 늦잠을 즐기는 편이다.
배부른 상태로 오전을 보내는 게 낫다는 이야기다.
아울러 점심 즈음부터 찾아드는 허기는 그의 야성과 도전 의식을 날카롭게 가다듬었고, 저녁 즈음에는 고통으로 다가오며 그의 신앙심과 의지를 시험하는 좋은 채찍 역할을 했다.
배가 고픈데 저녁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목사가 평생을 고뇌하던 주제다.
그를 끝없는 시험에 들게 한 건 신에 대한 믿음이라기보다는 개인적인 굴욕이었다.
마르틴 보엠은 철혈대제 시절 아카이아 대주교가 주최했던 종교 회의에서 받았던 굴욕을 지금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는 그를 향해 저 철혈대제, 클라우데 2세가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중신들에게 말했었다.
“여긴 군주들의 회합장이다. 어디 감히 내가 모르는 자가 내 허락도 없이 모습을 드러내는가? 레벤호스트. 그대가 꾸민 일인가?”
당시 절정에 이르렀던 철혈대제와 달리 레벤호스트는 이제 약관을 넘어선, 루페르트와 동년배의 나약한 젊은이였다.
문장가로는 이름이 높았지만, 군주로서의 그의 명성은 이제 막 시작되려는 찰나.
철혈대제의 일갈에 그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자신의 스승을 마치 용서를 구하는 개의 표정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가 달라는.
그때의 그 어색한 분위기와 그가 가르친 레벤호스트의 용렬한 모습, 고개를 숙인 채 쫓겨난 개처럼 회의장을 빠져나가며 보던 회의실의 낡은 바닥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이제 시간은 흘렀다.
“……클라우데 2세도 지옥에 떨어졌고, 내 주군도 과거의 주군이 아니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정신이 이상해지기까지 했지.”
복수의 순간이 왔다.
마르틴 보엠의 목적은 내전이 아니다.
신교 광신도 소리를 듣고 있지만 아무리 그라고 해도 그런 미친 짓까지 벌일 용의는 없다.
단지 그는 분위기를 조성해 의견을 관철하고 싶었을 뿐이다.
마르틴 보엠의 목적은 하나다.
종교를 통한 힘의 균형.
신교 선제후는 셋이다.
구교 선제후 또한 셋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회색분자지만 그는 사실상 죽은 사람이고, 그의 선제후령은 구교 측으로 넘어갔다고 봐야 한다.
구교 선제후 중엔 황제도 포함되어 있다.
황제는 가장 부유한 슈발츠마인 선제후이며, 황제가 되면서 슈발츠마인만큼이나 부유한 카렐리아의 왕관도 함께 손에 넣었다.
그 두 부유한 영지는 과거 철혈대제가 제국 선제후들의 반기를 제압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럼에도 마르틴 보엠은 균형이 팽팽하다고 생각했다.
아카이아 대주교의 성직 선제후령은 영토와 인구가 적고 부유한 도시도 드물다.
세속 선제후령에 비하면 반 정도의 전력이다.
물론 대주교의 진정한 힘은 땅이 아닌 교단의 힘에서 나온다고 하지만 가진 토지와 인구의 힘만 비교하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마르틴 보엠이 믿는 건 골트문트다.
그는 구교 선제후임에도 여전히 태도를 정하지 않고 있다.
그가 구교 신자이며 백성들에게도 구교를 강요하고 있지만, 골트문트는 철혈대제를 가장 싫어하는 선제후 중 하나다.
점점 철혈대제를 닮아 가는 루페르트를 보고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굳이 그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변수가 생겼다.
루페르트가 최근 왕조의 야심을 포기했다는 것이다.
그 선언이 깨진다면야 루페르트는 모든 걸 잃겠지만 선언이 유지되는 한 루페르트는 중립적인 군주는 물론 적대적인 군주의 태도마저 누그러뜨릴 것이다.
우걱우걱.
마르틴 보엠은 마치 부르봉인처럼 길게 식사를 했다.
그의 아침 식사 시간은 무려 두 시간에 달했다.
먹는 양도 양이지만 염소처럼 되새김질하며 생각에 잠겨 있는지라 그의 식사 시간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카렐리아를 흔들어야 해. 거기를 흔들어야 황제를 약화할 수 있다.”
이미 준비는 끝났다.
카렐리아의 지배자는 루페르트지만, 카렐리아를 움직이는 건 신교를 믿는 토착인들이다.
카렐리아인은 사실 제국과는 이질적인 집단이다.
쓰는 언어가 다르고 민족의 기원도 다르다.
전쟁이 아닌, 동군 연합이라는 평화적인 형태로 제국의 구성원이 되었지만 불만이 팽배했다.
그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과거의 황제들은 카렐리아의 수도 슈코브에 황궁을 짓고 황제가 기거하며 제국의 수도 역할을 하게 했다.
제국인과 기원이 다르다고 하나 명실상부한 제국 수도의 시민으로 카렐리아인들은 큰 자부심을 느끼고 기꺼이 제국을 위해 막대한 부를 제공했다.
그러나 제국의 수도가 슈발츠마인으로 옮겨 간 이후에 해묵은 문제가 터졌다.
제국의 수도였던 슈코브는 일개 지방의 수도로 전락했고 상업은 쇠퇴하고 과거의 영화를 점점 잃어 갔다.
그 반작용으로 신교가 유행했다.
반란과 심지어 독립을 부르짖는 소리마저 심심찮게 흘러나왔다.
철혈대제가 카렐리아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황제가 좋다고 판단할 때 종교의 자유에 관해 협상하겠노라는 내용의 금인칙서를 내렸다.
철혈대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었고, 다시 카렐리아의 불만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마르틴 보엠은 그들의 불만을 부채질했으며, 카렐리아의 비난의 화살이 슈발츠마인에게 향하게 했다.
“카렐리아만 떼어 놓을 수 있다면, 제국의 황제는 아무것도 못 할 것이다. 사실상 슈발츠마인 하나의 전력만으로 트라이아, 노르드마르크, 디터팔츠 세 선제후령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하녀가 차를 내왔다.
마르틴 보엠 목사는 차를 빠르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선제후 궁전에 갈 시간이다.
오늘도 할 일이 많다.
레벤호스트에게 종교적 신념을 불어넣는 것부터 시작해 그의 자식을 세뇌해야 하고 자유분방한 선제후의 아내와 신경전도 펼쳐야 하고, 제국의 운명에 관해 논해야 한다.
‘오늘은 어떤 구절을 낭독해 드릴까.’
호라 경전의 여러 경전 중 괜찮아 보이는 문구를 생각하며 그는 마차로 향했다.
그의 마차엔 검은 코트를 입은 날렵한 사내가 이미 좌석에 타고 있었다.
마르틴 보엠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도펠죌트너. 설마하니 우리가 그 안젤리나 대황후와 비슷한 방법을 쓸 줄이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시국이 워낙 불안하다.
마르틴 보엠 목사는 자신이 만에 하나 암살당할 일은 꿈에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역으로 생각해 보면 황제가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선택지는 이쪽을 죽이는 것이다.
‘내가 없으면 레벤호스트는 충동만 있는 어린애에 불과하지. 하지만 고맙군. 나를 위해서 호위까지 마련해 주고. 선제후도 알고 있는 거겠지. 내가 없으면 선제후는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리라는걸.’
선제후 주변엔 사람이 별로 없다.
라인하르트 백작이라는 자가 책사를 희망하며 선제후 주변의 가신으로 머물러 있지만, 그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사람이다.
그 인간은 멍청하게도 카렐리아를 흔드는 걸 모자라 카렐리아에 반란을 획책하려 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건 내전과 이어진다. 내전은 최후의 선택지야. 루페르트는 위험하지만 그렇기에 식견이 있는 인간이다.’
마차가 움직이자 도펠죌트너가 말했다.
“제 동료들이 수상한 사람들이 목사님의 저택 주변을 염탐하고 갔다고 합니다.”
“염탐? 나를?”
“네.”
“그대가 있지 않나?”
“그건 그렇…….”
탕!
느닷없는 총성이 먼 곳에서 울려 퍼졌다.
푹!
뭔가 박히는 소리와 함께 피가 목사의 얼굴에 튀었다.
“알, 알베르트?!”
마르틴 보엠 목사가 다급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의미한 일이다.
도펠죌트너는 즉사했다.
탕!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쉬익-
탄환이 목사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 마차 좌석에 박혔다.
말이 놀라 요동치고 마부의 고함이 들려왔다.
“마, 마차를 세워! 총격! 총격을 받고 있다!”
마차가 정지하자, 마르틴 보엠은 부리나케 총알이 날아오는 방향 뒤편으로 다급히 하차했다.
“아아아악!!”
다리를 접질렸다.
끔찍한 고통에 마르틴 보엠은 바닥에 나뒹군 채 소리를 질렀다.
“누, 누가!”
주변을 보았다.
사람 몇 명이 보이지만 전부 무지렁뱅이 촌놈들.
“누가 날 좀 도와라! 사례, 사례하겠다!”
느닷없는 구조 요청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할 뿐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촌각이 영원 같은 다급함 속에서 목사는 보았다.
꽃바구니를 든 작고 삐쩍 마른 소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걸.
“무슨 일인가요?”
“거기 너! 날 일으켜 세워라.”
“이렇게요?”
소녀가 손을 내밀었다.
마르틴 보엠은 아무 생각 없이 손을 잡아 힘껏 당기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목사는 자신의 운명을 알게 된다.
소녀의 손이 그의 손을 놔주지 않는다.
마치 거대한 게의 집게에 물린 기분.
“너, 너는?!”
탕!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목사가 쓰러졌다.
* * *
“멋진 사격이었어요. 엽사님.”
마를로네가 함께 목사를 암살한 주역인 한스 징펠만을 보며 화사하게 웃었다.
그의 도제들은 굳은 얼굴로 뒤에 선 채 언제나처럼 아무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늘 느끼지만, 이상한 아이들이야. 특히 기라는 애 키는 이미 나보다 더 크네.’
한스 징펠만이 우유 잔을 들이켰다.
하얀 우유 거품을 수염에 묻힌 채 한스 징펠만은 조금은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모험은 원치 않았습니다만.”
“전쟁을 막으신 거잖아요.”
“그렇다면 정말로 좋겠습니다만.”
그 순간 마를로네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과거의 사실을 기억해 냈다.
흐릿한 환영 같은 것이었다.
그 환영은 하나의 살인을 보여 줬다.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의 목을 단칼에 참수해 버리는.
‘뭐, 뭐지? 이건?!’
너무나도 섬뜩한 상상이라 마를로네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마를로네 님?”
한스 징펠만이 묻자 마를로네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적당히 얼버무렸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그녀는 양해를 구하고 여관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았다.
때는 밤이었다.
만월을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는 목에 이물감을 느끼고 옷 안에 손을 집어넣었다.
목걸이가 하나 걸려 있었다.
“뭐지 이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기억에 없는 목걸이다.
하지만 그것은 실재하고 있다.
그 의미를 아직 마를로네는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