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19화 (119/225)

119화 30. 루돌프 (4)

맨발의 황제가 대성당에 들어섰다.

수많은 군중이 침묵으로 황제를 환영했다.

단상에 선 아카이아 대주교가 가볍게 종을 흔들어 의식이 시작됐다는 걸 알렸다.

주르륵.

온몸에서 흘러내린 비가 몸과 옷을 타고 바닥을 적시는 걸 루페르트는 가만히 보았다.

단지 비가 몸을 통해 바닥에 묻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찰나의 시간 치열하게 회전하던 루페르트의 사고는 그의 모든 행동, 결단, 판단이 제국이라는 거인의 몸을 통해 이 세상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새삼스러운 결론으로 이어졌다.

“죄인에게 문은 열렸소. 맨발로 들어오시어 전능한 호라에게 자비를 구하시오.”

저벅.

루페르트는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한 발 그가 머금은 물기로 대성당의 바닥을 적시면서.

자리에 모인 자들은 제국을 대표하는 자들이다.

낮고 비천한 자는 여전히 바깥에서 비를 맞고 있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이런 짓까지 해야 하나.’

폭군의 길은 언제나 힘 있는 황제를 유혹하는 법이다.

이 절차의 번거로움과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라도 하나 지나칠 정도로 자신을 수축하는 선택을 한 반발심이 아이러니하게도 성공을 목전에 두고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이율배반적이게도 루페르트는 내심 크리오네가 이 순간 나타나 그를 덮쳐 줬으면 하는 생각마저 품었다.

그러나 크리오네는 나타나지 않는다.

저벅.

또 한 걸음을 옮기며 루페르트는 생각했다.

‘루돌프 님은 크리오네를 해치운 걸까. 그 검이 그렇게 잘 드는 검인가. 그 검이 있다면 굳이 루돌프 님이 아니라 다른 자를 써도 됐던 게 아닐까.’

단상이 가까워져 온다.

루페르트는 그제야 자신이 포기한 것들이 그리 가볍게 저울대에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는 걸 서서히 자각했다.

종의 사명.

자식을 남기고 후대를 이어 나가는 것.

왕의 사명.

왕조를 만들어 내고 이어 나가는 것.

아직 정해지지 않은 가상의, 그러나 따뜻하고 배려 깊고 매력적이기까지 한 여인이 안개처럼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를 닮은 영민하고 귀여운 아이의 작은 손이 그의 손가락을 만지다 사라졌다.

죽을 때의 풍경을 생각했다.

누가 그가 임종에 이를 때 진심으로 울어 준단 말인가.

그가 죽기만을 바라는 자들이 죽어 가는 자신 옆을 지킬 것인데.

‘과연 내가 옳은 선택을 한 것인가.’

돌릴 수는 있다.

그에겐 그럴 힘이 있다.

순간 루페르트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겨우 울피아나 하나 따위에 제국의 황제가 휘둘린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죽여 버리면 되는 게 아닌가.

암살자를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발되면 제국은 내전에 들어갈 것이다.

민중의 지지를 잃는 건 물론이고, 모든 선제후가 그에게 반기를 들 것이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그 옆에 남겠지만, 어쩌면 그 아래 성직자가 대주교를 몰아낼지도 모른다.

그는 위임받은 선제후지 왕조를 이룬 자가 아니니까.

기묘하게 루페르트는 이제 대주교와 가장 비슷한 길을 걸으려 한다.

늙어 가는 자식들을 보지도 못한 채 오직 자기라는 거울만 보며 살아가야 하는 삶.

그런 삶을 살고 싶진 않았다.

‘왜, 자꾸 이런 잡념이 드는 걸까. 이 중요한 시기에.’

미처 몰랐다.

자신의 내면에 이렇게 많은 욕망이 꿈틀거리고 있을 줄은.

회귀를 원할 때 그가 원했던 건 단지 제국을 구원하는 것이다.

사심 그득한 욕심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죄인 루페르트는 들어라.”

아카이아 대주교가 루페르트에게 명했다.

지금 그는 대주교가 아닌 신의 대리인으로 명하고 있다.

그 아래 맨발로 선 루페르트 또한 황제가 아닌 한 명의 죄인의 자격으로 서 있다.

“그대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그대는 아버지이길 포기하고 그대가 만들어 갈 가계의 가지를 제 손으로 쳐 버리려 한다. 그 사실이 맞는가?”

대주교가 평소와 전혀 다른, 마치 이단 심문관 시절을 연상케 하는 간담을 서늘케 하는 고성으로 물었다.

내장 전체가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 해야 하나.’

그의 손은 어째서인지 소라고둥에 가 있었다.

두 개의 덩굴이 끝없이 교차하며 그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욕망과 후회라는.

그의 답변이 지나치게 지체됐기에 대성당 안엔 작은 웅성임이 일었다.

대주교 또한 의아함을 느꼈다.

‘폐하?’

루페르트의 얼굴이 지나치게 안 좋다.

온몸을 부르르 떠는 걸 물론이고 그 얼굴, 그 눈동자엔 불온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아카이아 대주교 본인이 몇 번이고 수레바퀴에 매단 불신자와 같은.

“폐하?”

대주교가 낮은 목소리로 루페르트를 불렀다.

그제야 루페르트도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나는…….”

모든 것이 사라지려 한다.

그가 가질 수 있는, 그가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이.

특히 여자들이.

미래의 아내가.

그 안엔 피리스와 이름 모를 외국의 공주와 길에서 보았던 기이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망자의 목동, 그리고 마를로네조차 섞여 있었다.

“…….”

여전히 비가 내리는 거리.

루돌프는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고 장미가 막 꽃을 피우려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손에 쥔 건 붕대로 싼 장검.

아무도 없는 저택을 지나 그는 곧장 뒤뜰로 향했다.

아련한 추억과 함께 과거의 향기가 루돌프의 마음을 가볍게 울렸지만, 그 추억이 그의 얼굴을 변하게 하는 일은 없었다.

마치 감정 없는 기계처럼 루돌프는 기계적인 걸음으로 뒤뜰로 향해 한 묘를 지키고 서 있는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괴인을 보았다.

그가 다가오자 괴인이 반응했다.

크리오네와는 전혀 느낌이 다른, 이 세상의 존재라고 믿을 수 없는 괴이라는 감각을 먹물처럼 흩뿌리며 그것이 루돌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나를 볼 수 있는가? 여신님의 권능을 하사받은 자인가? 돌아가라. 여기는 그대가 올 곳이 아니다.”

도저히 인간의 발성 기관에서 발한 거라고 믿기 어려운 섬찟한 음성.

이에 대해 루돌프는 대답을 하는 대신 검을 감싼 붕대를 푸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수정처럼 맑고 번쩍거리는 칼날이 우울한 구름에 가려진 햇빛을 받아 희미하게 번들거렸다.

거인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에서는 마치 식물의 줄기 같은 것들이 무한히 두 개의 가지로 갈라지며 루돌프에게 폭사됐다.

과거의 황제는 두 손으로 검을 들었고 자신을 향해 뻗어 오는 무한히 증식하는 것들을 단칼에 잘라 냈다.

“타필라이!”

이제 누구도 의미 알 수 없는 고대의 호령이 루돌프의 입에서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거인이 루돌프에게 달려들었다.

루돌프는 검을 쥔 채 거인의 돌격에 대비했다.

“죄인 루페르트여. 왜 답이 없는가? 여전히 속세에 관한 미련을 품고 있는가?”

아카이아 대주교가 물었다.

루페르트는 심호흡을 했다.

섣불리 정할 수도 있다.

섣불리 대답해서 이 상황을 모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회귀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이 순간을 그냥 넘겨 버리는 건 자신의 삶이나 행동 양식을 너무나 가볍게 보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루페르트의 마음을 돌로 짓누르는 것처럼 압박한 것이다.

‘처음부터 생각하자.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지를.’

지금까지 루페르트는 움직이는 동기는 단순하다.

불타는 테타우와 융커스 베샤문트에게 살육당하던 백성의 비명을 듣는 것만으로 루페르트는 무한한 투지를 느끼고 갖은 절망에 맞설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이미지는 남용됐고, 루페르트가 지금 맞서 싸우는 건 제국의 적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이다.

여전히 그는 이 순간을 되돌리고 순결 선언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정치를 풀어 나가기를 원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내 욕망의 크기가 이렇게 크다는 게 판명이 났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루페르트는 새삼스럽게 그가 정부를 3명이나 두었던 걸 떠올렸다.

동방 제국의 황제처럼 수백 명의 후궁을 거느리는 군주도 있다.

강력한 군주치고 애인을 두지 않는 자는 드물다.

레벤호스트 같은 가정에 충실한 자도 있겠지만, 저 고결하다는 막스 게오르크조차 모친이 다른 사생아를 셋이나 두고 있지 않았던가.

당장 루페르트의 성욕은 그리 대단하지가 않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어갈수록 그는 여자를 찾을 것이다.

그때의 성욕을 감당할 수 있을까?

루페르트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을 때 맨발의 여인이 대성당에 들어왔다.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대성당에 나타난 건 울피아나였다.

“저도 회색 속죄회에 지원하겠어요.”

그녀가 기도문을 암송하며 루페르트를 향해 다가왔다.

“!”

루페르트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가 다급하게 말했다.

“내 죄를 인정합니다. 어떠한 미련도 없다는 걸 증언합니다.”

루페르트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빨리.”

울피아나가 오기 전에.

대주교는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한발 빠르게 선언했다.

“회색 속죄회의 구성을 선언합니다.”

울피아나가 다가왔다.

“저는요?”

“안타깝지만 회색 속죄회의 구성은 완료되었소.”

“그, 그런 게 어디 있나요?”

울피아나가 루페르트를 보았다.

루페르트는 그녀의 떨리는 눈빛을 받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이 여자가 내게 도움을 주는 순간도 있구나…….’

모든 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영원한 독신의 몸이 되는 순간 루페르트는 그 간단한 이치를 깨달았다.

아울러 자신 또한 미혹에 빠질 수 있는 암군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 또한.

* * *

비가 그쳐 간다.

장미의 향기가 남은 정원엔 이제 불투명한 점액질로 이루어진 이 세상의 물질이 아닌 것들의 잔해가 어지러이 널려 있다.

자리에 서 있는 건 피투성이가 된 거구의 전사였다.

두건이 벗겨진 자리엔 수염을 기른 지혜로운 노인의 얼굴 대신, 마치 투견처럼 이를 드러내고 형형한 눈빛을 번득이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 상대방을 주눅 들게 충분한 젊고 강력한 전사의 얼굴이 수더분하게 기른 금발의 머리카락 사이로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허억! 허억!”

가쁘게 숨을 몰아 내쉬면서 그는 삽도 없이 크고 투박한 손으로 묘를 파헤쳤다.

묘의 흠을 한 움큼씩 퍼낼 때마다 사내의 눈동자엔 분노와 실망이 차올랐다.

얼마나 많은 배신이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비인간적인 행위를 봐야 했던가.

그것은 모든 걸 주었지만, 동시에 모든 걸 앗아 갔다.

몇 번이고 기회를 줬지만, 그것은 반성하지 않는 아이처럼 천연덕스럽게 같은 비행을 반복했다.

그것에게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것은 신 그 자체니까.

아니 어쩌면 평범한 신을 넘어서는 존재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복수할 수 있는 수단은 있다.

그는 알고 있다.

그것이 간절하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파괴하고 황폐화하고 멸망으로 몰아넣은 그 괴물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가장 많이 죽이고 파멸한 인간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리프니에.”

파헤친 흙 너머로 석관이 무심하게 자리 잡고 있다.

결단의 시간이다.

사내는 두 손으로 관뚜껑을 잡고 그것을 열었다.

“하하…….”

메마른 웃음소리가 젖은 대지 위로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관 안에서 썩어 가는 건 여성의 시체지만 그가 원했던 여성은 아니다.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이 그것에게 준 “마지막 기회”가 어떻게 됐는지.

“하하하하…….”

슬픔과 충격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의무감에서 기묘한 웃음소리를 내며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투성이가 된 옷의 일부분이 벗겨졌다.

그 어깨에 숨겨져 있던 문신이 드러났다.

그 문신은 쇠사슬에 묶인 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지금 기억하는 이는 거의 없겠지만, 그 문신은 룸 제국에서 검투사 노예의 상징이었다.

“리프니에.”

루돌프라 불렸던 사내가 이를 갈며 파헤친 관을 노려보았다.

“……나는 너에게 여러 번 기회를 줬었다. 너의 갖은 기행을 단지 룸 제국의 마지막 황제에게 했던 맹세, 그 천 년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참고 또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내 인내도 끝을 고하는군.”

파헤친 묘를 놔둔 채 그 사내는 돌아섰다.

그의 몸은 젖어 있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모든 걸 태우고 있으니까.

그 불길은 자신만이 아니라 나 자신마저도 태울 것이다.

“내 소망을 불태워 네 소망도 함께 불태워 주마.”

그의 이름은 티그리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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