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29. 성 크리오네 (6)
황제가 공을 찬다는 소문은 빠르게 황궁에 퍼졌다.
루페르트를 좋지 않게 보던 호사가들은 즉시 이를 드러내며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다.
“역시, 출신이 불분명하다더니.”
“하켄하임에서 공을 차며 돈을 벌었다며?”
“슈발츠마인의 가계라고 하지만 오래전에 분가한 사람이지. 모친이 귀족 출신이라고 하는데 옛날에 죽어서 알 방법도 없지. 혹시 아나? 평민이나 그보다 못한 계층일지?”
“쉿! 폐하가 천한 피를 이어받았다고 말하려는 건가? 말조심하게!”
쏟아지는 비난이 위태로운 수준까지 올라왔지만 루페르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미소까지 머금으며 자신에 대한 악소문을 시종에게 되물을 정도였다.
“그래? 그들이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거지?”
과거와 똑같다.
회귀 전에도 황궁에서 공을 찼고 미궁 뒤편에 작은 경기장을 마련해 난다긴다하는 선수를 불러 모아 공놀이를 하곤 했다.
당시의 비판은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좀 더 비난의 수준이 강했고 더 원색적이었을 뿐이지.
그래서일까.
루페르트는 오히려 신선함을 느꼈다.
‘욕먹는 것도 나름의 정취가 있군.’
그가 느끼던 미묘한 만족감을 확실하게 한 건 다름 아닌 리프니에였다.
루페르트가 평소처럼 정무를 보고 미궁으로 돌아와 뒤뜰에 공을 차러 나왔을 때 그는 발견했다.
그의 공을 어색하게 갖고 노는 검은 머리의 소녀를.
‘……리프니에님.’
그 모습은 그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하지만 그토록 싫은 모습인데도 그가 좋아하는 공을, 어색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알 수 없는 친근감과 더불어 훈수를 두고 싶은 마음이 새록새록 솟아 나왔다.
“여, 여신님.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닙니다. 좀 더 발등으로 네, 가볍게 깃털을 들어 올리는 기분으로.”
리프니에가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
“네. 여신님.”
“여신님 여신님. 듣긴 좋은데 계속 그런 호칭으로 부른다면 아무리 당신의 황궁이라고 해도 위험하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제가 공을 찰 땐 개미 한 마리 얼씬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까요.”
“암살자가 두렵진 않나요?”
리프니에가 웃음기를 머금은 채 그를 또렷이 응시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알고 있었구나. 여신님도. 크리오네가 날 연거푸 죽이려 드는걸.’
모르는 게 이상하다.
회귀는 리프니에의 권능이다.
시간 축 자체가 바뀌는데 모든 시간을 관장한다는 리프니에가 모른다는 게 오히려 어불성설.
단지 궁금한 건 여러 차례의 회귀에도 여신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리프니에가 루페르트에게 어색하게 공을 차 넘겼다.
황제의 공답게 최고급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들고 갖가지 자수와 정선들인 바느질로 박음질한 공은 또그르르 굴러 루페르트의 구두코에 닿았다.
구두에 공의 느낌이 오자마자 루페르트는 가볍게 차올려 무릎으로 몇 차례 공을 튕긴 후 공을 내려놓고 실없이 웃었다.
“두렵긴 합니다.”
두려운 정도가 아니다.
무슨 일을 하건 루페르트는 크리오네를 염두에 두고 있다.
언제 그가 나타나 알량한 호위와 경계를 박살 내고 그의 팔을 부러뜨리고 몸을 구겨 버릴지 모르니까.
늘 목에 거는 소라고둥이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진즉에 다가올 공포에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불현듯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그 소녀의 형태는 안젤리나의 처참한 시체와 겹쳐 늘 악몽 같은 형태로 느껴졌는데, 이례적으로 다르게 보인 것이다.
아마 루페르트는 그것이 현재의 상황과 맞물려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왜, 소라고둥이 아니었으면 크리오네에게 몇 번이고 잡혀 종이처럼 구겨졌을 테니까.
‘늘 생각하지만 내겐 여신님이 전부다. 여신님의 권능이 없이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자만하지 말자. 루페르트 가우저. 아니, 황제 루페르트여.’
모처럼 루페르트는 존경을 담아 리프니에를 내려다보았다.
리프니에가 싱긋 웃었다.
“기분 좋은 일이 있나 봐요?”
“아, 아닙니다. 기분 좋은 일은 별로 없었죠. 처참하게 죽을 일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 표정, 예전 느낌이 나는걸요?”
“저는 언제나 여신님의 종복입니다.”
“당신은 저의 종복 같은 게 아니에요. 저의 유일한 사도지요.”
“네, 그렇습니다. 저는 여신님의 유일한 사도입니다.”
“말 나와서 하는 말인데, 루페르트 가우저.”
리프니에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순간 루페르트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감각을 느꼈다.
‘이 느낌은?!’
예전에 이런 적이 한 번 있었다.
강렬한 기시감 속에서 루페르트는 리프니에가 전과 같은 상황을 오싹할 정도로 재현하는 걸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슬슬 저를 위한 신전을 지어야 하지 않겠어요? 황제도 됐겠다.”
“시, 신전 말입니까?”
“네. 당신의 작은 별궁에 얹혀사는 것도 좋지만, 루페르트 가우저.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을 힘들게 하는 거 같아서요.”
“!”
루페르트는 깜짝 놀란 얼굴로 리프니에를 보았다.
‘여신님. 거기까지 알고 계셨던 건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셔서 아무것도 모르시는 줄 알았는데.’
2층을 장악한 리프니에는 마음의 병에 일조했다.
가장 편안해야 할 집에서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으니.
“그런 이유로!”
리프니에가 춤추는 것처럼 팔을 내저었다.
그러자 루페르트의 눈앞에 빛나는 문자가 나타났다.
[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의 퀘스트 ]
[ 그 세 번째 ]
[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은 황제가 되고 당신의 이름이 제국은 물론 이웃한 나라의 저잣거리까지 오르내리는 등 당신은 높은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가련한 여신 리프니에는 여전히 아무도 모르는 잊힌 신인 상태 그대로입니다. 리프니에의 유일한 사도인 당신이 이런 언어도단적인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아니 되겠죠? 오직 당신만을 위해 권능을 베푸는 힘들고 지친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안식처를 만들어 주세요. ]
- 가련한 균형의 여신 리프니에를 위한 신전을 지어라(대성당 이상급으로)
“…….”
역시 안 좋은 예감은 들어맞는 법이다.
‘시, 신전이라니. 그것도 테타우 대성당 이상급으로?’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아무리 황제라고 그런 거대하고 웅장한 건축물은 쉬이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최고의 건축가와 석공, 막대한 재원을 필요로 한다.
당장 루페르트에겐 들어갈 돈이 많다.
내전에 대비한 군대와 조직을 정비해야 하고, 내전이 발생할 때 군자금으로 지불할 재원을 지금부터 모아 두어야 한다.
전쟁이란 것은 인간의 목숨만이 아니라 돈을 집어삼키는 괴물이니까.
수많은 군주가 파산하는 걸 보았다.
대륙 제일의 부자라는 골트문트조차 오랜 전쟁으로 파산 직전에 내몰린 걸 똑똑히 보았다.
그런데 전쟁 비용만큼이나 돈이 드는 신전을 세운다?
그것도 호라의 수도회 하나를 맡을 루페르트가?
돈도 돈이지만 사람들의 이목을 속이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그런 이유로 주저하고 있자니 리프니에가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혹시 무리한 부탁인가요?”
“저, 저기. 그러니까 여신님. 테타우 대성당급은 너무 큰 게 아닐는지…….”
“아, 그래요? 제가 호라보다는 훨씬 뛰어난 신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허깨비와 여신님을 비교한다는 것이 여신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는 일이겠지요. 하지만 제가 본 미래에 의하면 곧 전쟁이…….”
“아, 전쟁 때문에 못 지어 주겠다. 그 말인가요?”
“최선은 다해 보겠습니다만.”
“그럼 일단 작게나마 하나 부탁드려도 될까요? 작지만 화려하게.”
리프니에가 한발 양보했다.
“좋습니다. 여신님.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테타우 대성당급 같은 거대한 구조물이 아닌 일반 교회 정도의 크기라면 크게 재정에 무리를 주지 않고 지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조차도 만만한 지출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황궁 옆에 작은 저택이 있죠? 장미가 많던.”
“…….”
어디를 이야기하는지 알 것 같다.
둘러 말하고 있지만, 안젤리나의 저택이다.
“거기를 허물고 저를 위한 신전을 지어 주세요. 음, 굳이 제 이름을 새기거나 조각상을 만들 필요는 없어요. 단지 황금과 화려한 것들로 채우면 좋을 거 같네요.”
“……그곳을 말입니까?”
“네, 혹시 내키지 않으신가요?”
“그건 아닙니다만.”
“루페르트 가우저. 저, 그 신전으로 이 몸을 옮기려고 해요.”
“그 몸, 말입니까?”
“네. 어째서인지 세상에서 저를 계시의 성녀라고 부르는 느낌인데, 그런 성녀를 위한 자리가 황궁 옆에 있다면 당신의 인기와 권위가 높아지지 않겠나요?”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했다.
리프니에의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페르트의 마음을 가장 크게 움직인 건 저 안젤리나를 닮은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별궁을 떠난다는 것이었다.
“……좋습니다.”
내키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여신의 부탁이다.
그것도 최초의 터무니없는 조건에서 크게 후퇴한 것이다.
이것마저 거부하는 건 여신의 사도로서 할 일이 아니다.
‘어쩔 수 없다. 안젤리나 님의 추억이 담긴 곳이지만, 모든 추억은 스러지기 마련이지.’
자신을 합리화하며 루페르트는 여신의 청을 받아들였다.
“그럼 부탁해요. 루페르트 가우저.”
거기까진 괜찮았다.
여력도 충분하고.
루페르트는 리히트보덴으로부터 엄청난 수입을 얻고 있었다.
주요 특산품인 일각고래의 뿔이 점점 가치가 낮아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지만, 그건 공급을 조절하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그 물건은 루페르트가 독점하고 있는 것이니까.
‘일단은 순결 선언이다. 그것부터 처리하자.’
예산을 잡고 비용을 집행하고 황궁 궁내부와 상의하고 묘를 이장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상당한 시간과 수고를 요한다.
루페르트는 먼저 처리할 수 있는 하나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호라 교단에서 날짜를 보내왔다.
다음 주 월요일 정오.
나날이 거세지는 선제후의 협잡에 치명타 날릴 루페르트의 비장 한 수는 차곡차곡 준비되고 있었다.
* * *
“폐하는 뜻을 꺾을 생각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그분은 순결 선언을 하려 합니다. 거기에 더해 황궁 옆에 새로운 성소를 짓는다고 하시더군요.”
루페르트의 행보에 가장 영향을 받는 이는 레벤호스트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촉각을 기울이고 황제의 모든 생각을 알고자 하는 자가 있다.
다름 아닌 고어문트의 선제후 골트문트다.
이번 순결 선언은 그와는 일견 관련 없는 일처럼 보이지만 세상일이 그리 단순한 게 아니다.
그가 걱정하는 건 황제도 자신도 아닌 자신의 딸이었다.
“울피아나는 어떻게 지내고 있는가?”
딸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지는 골트문트였다.
루페르트가 순결 선언을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울피아나는 방에 틀어박힌 채 음식도 물도 거부하며 도통 나오려 들지 않았다.
내심 황제의 배필이 될 거라고 기대했고 실제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었건만, 그런 식으로 결혼이 결렬될 거라고는 자신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방에 틀어박힌 날, 그녀의 방 안에서는 무언가를 집어 던지고 부수는 소리가 밤새도록 이어졌다고 한다.
오싹한 일이지만 그녀를 말릴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녀를 말려야 할 골트문트의 병사들은 오히려 고용인들을 겁주었다.
그 소문을 함부로 내면 몸이 성치 못할 거라고.
“울피아나 님은 여전히 방에 계십니다.”
가신이 참담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황제의 뜻을 알 수 없군. 불과 작년만 해도 나에게 딸을 달라고 천박하게 부탁을 해 오더니, 해가 바뀌니 언제 그랬냐는 듯 순결제의 뒤를 따르려 들질 않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일이 골트문트의 심력을 적잖이 갉아먹을 거라는 사실이다.
저 울피아나는 골트문트조차 버거워하는 존재니까.
‘어릴 때 시집을 보냈어야 했나. 아니, 어릴 때도 만만치 않았지. 누가 저걸 감당하겠냐고.’
갑자기 하녀 하나가 다급히 집무실에 나타났다.
“선제후님.”
“무슨 일이냐?”
“울피아나 님이 선제후님을 찾으십니다.”
“안 가면 안 될까?”
“그, 그게…….”
“그래. 가야만 하겠지.”
복도를 걸으면서 골트문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순결 선언을 하려는 황제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군.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아니, 알고 그러진 않았겠지…….’
울피아나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골트문트는 표정을 관리해야 했다.
방 안엔 깨진 그릇의 파편, 유리, 갈가리 찢긴 종이와 옷, 꽃잎 단위로 분쇄된 꽃 따위가 도살장의 쓰레기장 같은 처참한 형태로 뒤섞여 있었다.
그 더럽힌 바닥 위에 그의 딸이 마치 미의 여신 같은 아름다운 자태로 서 있었다.
그동안 식음을 전폐해 볼이 움푹 들어갔지만, 그조차도 그녀에게 색다른 매력을 부여해 주는 듯했다.
유리가 잔뜩 깔린 날카로운 바닥에 맨발로 선 채 울피아나가 미소 지었다.
골트문트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전율을 느꼈다.
“아버님.”
“그, 그래. 울피아나. 무슨 일이냐?”
“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무, 무슨 생각이지?”
“들어주시는 거죠? 어려운 건 아니에요.”
울피아나가 맨발을 내디뎠다.
유리로 가득 찬 바닥에 발을 내딛는 걸 본 하녀들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녀의 발엔 아무런 상처가 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걸어오지만 마치 파편이나 유리가 그녀를 피하는 듯했다.
마치 그녀의 완미를 감히 해치지 못하는 것처럼.
마술처럼 상처 하나 없이 부친 앞에 선 울피아나가 천진난만하게 말했다.
“저, 수녀가 될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