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29. 성 크리오네 (3)
후계자를 갖고 싶어도 얻지 못하는 군주는 부지기수다.
사람들은 말한다.
왜 굳이 멀쩡한 젊음과 신체를 놔두고 고독하고 돌아보지 않는 수도승의 길을 걷노라고.
슈발츠마인 가문에서 가장 강한 반발이 있었다.
루페르트는 막강한 가문 일원이 모인 자리에서 엄숙하게 말했다.
“두 개의 왕관이 머리에 씌워졌을 때 나는 제국과 호라에게 모든 걸 바치기로 맹세했다. 오히려 나는 묻고 싶다. 제국이 일개 황제의 소유물이냐고? 황제는 제국을 지배하자 제국의 소유자는 아니다. 제국은 유구한 세월을 살아온 선제들과 그의 백성들, 그리고 현재를 살아가는 자들 모두의 것이다. 그대들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제국은 위기에 처해 있다. 내 묻겠다. 폐허만 남은 제국을 물려받을지, 아니면 현재의 윤택함이 남은 선제후령을 물려받을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진 않았다.
분명 뒤에서는 같은 반감을 가진 자끼리 모여 작당을 하려 들겠지만 적어도 루페르트 앞에서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루페르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지만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명시적인 반대가 아닌, 고조되는 불만은 차차 회유와 다른 이익의 제시로 무마하면 되니까.
확실히 하기 위해서, 루페르트는 가문의 원로 일부를 불러 모아 넌지시 지시하기도 했다.
“혹 내가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면, 그 후계자는 베른하르트라는 자가 좋겠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전쟁이나 암살, 기타 여하한 사정으로 죽음을 맞이했을 경우의 이야기입니다. 미리 준비해도 나쁘지 않겠지요. 나는 상상외로 적이 많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루페르트는 당연히 죽을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눈을 감더라도 제국이 안전의 반석 위에 올라간 걸 확인한 후에 죽겠다.
그것이 루페르트의 생각이었다.
회귀 이래 루페르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사명을 잊은 적이 없다.
‘모든 것은 제국을 위한 것이다. 배우자와 후계자? 그런 건 바라지도 않았다.’
황궁을 나서면서 루페르트는 벽면에 새겨진 선제들의 조각상으로 시선을 옮겼다.
명군과 암군, 알려진 자와 잊힌 자. 저마다의 족적을 가진 황제들의 조각상이 루페르트의 지친 눈을 간지럽혔다.
‘다른 건 바라지 않는다. 무사히 퇴위해 이 선제들의 반열에 내 모습을 남길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해.’
누군가의 노호성이 앞에서 터져 나온 건 그 직후의 일이었다.
상념에 잠겨 있던 루페르트는 무심코 비명을 듣고 고개를 앞으로 돌렸고, 자신을 향해 황소처럼 돌진하는 거한을 보았다.
‘뭐, 뭐야?!’
그건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거대했다.
하지만 인간이다.
저 교차하는 팔과 다리, 수더분한 머리카락의 휘날림 속에서 빛을 발하는 눈동자는 틀림없는 인간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의미로 인간의 범주를 넘어섰다.
“물러나라!”
호위병이 할버드를 세우며 거한을 가로막았다.
거한은 속도를 멈추기는커녕 더 속도를 올려 자신을 노리는 할버드의 창대를 움켜잡더니 그대로 병사와 함께 번쩍 들어 바닥에 메다꽂았다.
쿵!
바닥이 깨질 정도의 충격과 함께 병사는 크게 한 번 튀어 오르더니 그대로 떨어져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꺄아아아아악!”
사방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루페르트는 그때까지도 무슨 상황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곧 피부를 뒤덮는 소름이 루페르트에게 현실을 뼈저리게 인식시켰다.
‘아, 암살자인가?!’
위기 감지가 뒤늦게 발동했다.
그만큼 거한의 행동은 느닷없었고, 돌발적이었다.
병사를 쓰러뜨린 거한이 루페르트를 향해 돌진했다.
챙이 넓은, 화려한 깃털을 꽂은 기병들이 루페르트와 거한 사이를 갈라놓을 듯이 쇄도해 피스톨을 빼내 전쟁에서 그러하듯 상대방의 눈의 흰자가 보일 때까지 기다려 방아쇠를 당겼다.
타탕!
두 정의 피스톨이 하얀 연기를 뿜어내며 총탄을 뿌렸다.
푸푹!
총탄은 그대로 거한의 몸에 박혔다.
그런데 그뿐이다.
총탄은 거한의 돌진을 멈춰 세울 수 없었다.
오히려 거한은 자신을 가로막는 기병들을 말째로 움켜잡아 내동댕이쳤다.
구슬픈 말의 비명과 함께 말과 기병이 동시에 하늘로 솟구쳤다가 동시에 떨어졌다.
쿵!
“히히히힝!”
말 한 필이 구슬픈 비명과 함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움직이는 가운데, 그 뒤엔 의식을 잃거나 이미 죽어 버린 병사들의 깨진 머리에서 흐르는 피가 거리를 적시고 있었다.
루페르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틀림없다.
저건 괴물이다.
이 세상에 존재해서는 아니 되고 존재해서조차 아니 되는.
비슷한 것들을 보아 왔다.
뱀을 마주친 설치류마냥 강한 전율이 자신을 휘감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가 거한을 향해 물었다.
“제국 성인인가?”
거인이 씨익 웃었다.
“크리오네.”
거한이 루페르트를 향해 손을 뻗었다.
‘빌어먹을.’
너무나 빠르고 당혹스러웠다.
손은 이미 소라고둥에 가 있지만, 거한의 큰 손이 더 가까이에 있다.
저 손에 잡힌다면 볼 것도 없다.
확정된 죽음이다.
‘어떻게든 뿌리치지 않으면!’
필사적인 마음과 달리 손은 무정하게 뻗쳐 왔다.
순간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인간의 모습을 한 형체가 움직이며 거인의 손을 피하는 장면이 불연속적으로 마치 오랜 기억을 들추어낸 것처럼 느닷없이 뇌리를 뒤덮은 것이다.
마치 춤사위와도 같은 그 움직임은 그러나 루페르트가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분명 그것은 인간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진 것이지만 작은 움직임 하나조차 인간이 끌어낼 수 있는 한계와 아슬아슬하게 맞닿아 있었다.
그리고 환각은 거인의 손이 루페르트의 팔을 붙잡자 마술처럼 사라졌다.
“죽어라. 황제.”
거인이 손에 힘을 줬다.
우드득!
“크어어어억!!”
루페르트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강골까진 아니더라도 타고난 유연함을 가졌고 오랜 단련으로 힘과 근육이 붙은 남자의 팔이 단지 악력만으로 나뭇가지처럼 부러지고 말았던 것이다.
팔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고, 박살 난 뼈가 살점을 뚫고 튀어나왔다.
그 고통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루페르트의 몸이 번쩍 들렸다.
그대로 메다꽂아 죽이려는 셈이다.
저 차가운 바닥에 두 눈을 부릅뜬 채 죽어 있는 병사들같이.
루페르트는 필사적으로 버둥거렸으나, 그의 죽음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단념이라는 단어가 고통과 섞여 절망으로 변해 갈 때였다.
루페르트는 보았다.
갑자기 그와 거인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검은 잔영을.
곧 루페르트는 그것이 자신이 아주 잘 아는, 그의 챔피언이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베르크 란!’
그는 늘 들고 다니던 정강이 길이의, 향사들이 으레 들고 다니는 뾰족한 스틱의 끝을 거인의 팔에 찔러 넣었다.
“어딜 감히!”
근육 혹은 뼈의 일부분을 제대로 건드린 것일까.
루페르트를 잡은 거한의 손이 그의 의지와 관계없이 열렸고 루페르트는 바닥에 떨어졌다.
쿵!
“크아아아아악!”
착지할 때 부러진 팔이 바닥에 채찍처럼 휘며 일그러졌고, 그것은 고스란히 루페르트의 고통과 발버둥으로 이어졌다.
“끄어어억!”
눈앞이 혼미해질 정도의 격통.
그러나 루페르트는 필사적으로 이를 악물며 온전한 팔로 소라고둥을 더듬고 있었다.
‘회귀를 해야 해. 회귀를!’
한편 거인은 자신을 공격한 베르크 란을 무심히 응시했다.
“도펠죌트너인가?”
그가 물었다.
베르크 란은 스틱을 놓은 채 맨손을 들어 올렸다.
권투의 자세.
무기가 없고 다리 하나가 불편하며 오른손 아귀에 힘이 들어가지 않음에도 그는 싸울 뜻을 내비쳤다.
거인이 허리를 똑바로 세우자, 베르크 란과 그의 격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것은 인간 사이의 대결이라기보다는 방앗간에 대적하는 인간의 무모한 고사를 연상하게 했다.
“그야말로 한 마리 불쌍한 개로구나. 주인에게 버림받고 학대당하면서도 필사적으로 먹이를 구걸하며 비정한 주인의 구두를 핥으려 드는.”
“닥쳐라.”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황제여!”
그가 소리쳤다.
“달아나시오. 그리고 기억하시오. 베르크 란이라는 황제의 병사가…….”
베르크 란의 말을 이어지지 못했다.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거인의 팔이 베르크 란을 후려쳤고, 베르크 란은 줄 끊어진 풍선처럼 날아가 마차의 짐칸에 부딪혀 바닥에 그대로 꼬라박고 말았으니.
즉사해도 무방할 충격을 받고도 그러나, 베르크 란은 두 팔을 악착같이 든 채 부들부들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크윽! 제, 제국을 위해 죽어 갔음을. 내 원하는 건 오직 단 하나!”
루페르트는 고통조차 잊은 채 베르크 란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
알고는 있었다.
그가 어떤 각오로 살아가는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덕분에 제국을 구할 수 있었다.
거인이 달려오는 모습을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보며 루페르트는 온전한 팔로 소라고둥을 든 채 힘껏 불었다.
부우우우우---
청량한 나팔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베르크 란의 다하지 못한 말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를 장군으로 복……!!”
순간 세상이 검어졌다.
루페르트는 익숙한 검은 복도에 있었다.
* * *
“…….”
두 팔은 멀쩡하다.
산산이 조각난 팔도 원래 모습 그대로고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끔찍한 고통도 이제는 없다.
하지만 당시의 고통의 잔향이 생생하게 남아 루페르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었다.
쿵! 쿵! 쿵! 쿵!
무엇보다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죽을 뻔했다.
거의 죽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그 하나만 죽으면 다행이겠지만, 제국 자체가 멸망 직전까지 왔다.
“하아.”
루페르트는 불안한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생각하기 싫었고 그저 이대로 시간이 흘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물씬 들었다.
아무도 없는 적막과 고독 속에서 루페르트는 뺨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물방울을 뒤늦게 인지했다.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려워서일까. 아마 그건 아닐 것이다.
황궁이 불에 탔을 때 루페르트에게 더 이상 두려운 건 없다.
그렇다면 고통 때문에?
그것도 아니리라.
이보다 더한 맛본 적이 있다.
단지,
“……쉬고 싶어.”
지쳤다.
여신에게 호언장담하던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눈앞에 겹쳤다.
“휴식이 필요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돌이켜보면 회귀 이후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달려왔다.
수많은 사건과 죽음이 있었고 충격이 있었지만 루페르트를 달래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때 여신이 그런 역할을 했지만, 예전처럼은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루페르트는 너무나도 잘 안다.
그도 바보는 아니다.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의 여신은 어쩌면, 그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오래되고 잔혹하며 고대의 무자비한 신들을 닮은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때는 정오였다.
세상의 모든 그림자가 사라질 때 거한이 나타났다.
어머니 앞에서 떼를 쓰며 투정을 부리던 아이가 스스로 눈물을 닦아 내고 일어서는 것처럼 루페르트는 소매로 눈물을 닦아 내고 몸을 일으켰다.
어두운 복도 너머 두 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 하나는 원래 루페르트가 가장 그리워하던 낙원이었지만, 그 낙원은 사라졌다.
두 세계, 전부 황궁과 이어졌다.
루페르트는 좀 더 앞의 시간 축에 가고 싶은 욕망을 느꼈지만, 그의 길은 정해져 있었다.
“…….”
가장 최근의 시간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도대체가 끝을 알 수 없는 정치 공작과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결재 서류와 그리고 그를 죽이려는 제국 성인이 기다리고 있다.
발걸음 하나를 옮길 때마다 루페르트는 자신의 마음이 어그러지는 감각을 느꼈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그가 선택한 길이다.
순간 루페르트는 떠올렸다.
처음 저 루돌프라는 사내를 만났을 때 그가 한 질문을.
그때 그는 루페르트를 향해 이렇게 물었다.
“문 너머에 뭐가 보이나?”
그때 루페르트는 이렇게 답했다.
“이상향으로 가는 문이 보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게 답할 것이다.
현실이라는 이름의 지옥이라고.
외면하던 회귀의 무게가 황제의 심신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아직 황위에 복귀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시점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