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111화 (111/225)

111화 29. 성 크리오네 (2)

루트비히는 200년 전의 사람으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황제다.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에 너무 이른 시기에 죽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당시 동방 제국과 부르봉 왕국의 양면 공세에 어려움을 겪던 시기, 통합되지 않던 제국을 하나로 뭉치고 제국을 정비해 두 나라의 공세에 대비할 시간을 벌고 나아가 반격의 계기를 마련한 건 역사적인 사실이다.

루페르트는 선제의 벽에 새겨진 루트비히의 조각상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다른 황제의 조각상 주변에 의례적으로 병사나 배우자, 아이들이 새겨진 것과 달리 루트비히는 경건하게 기도하는 모습으로 외로이 서 있다.

그가 어떠한 후손도 남기지 않았다는, 종교에 귀의한 독신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한 조형이다.

‘루트비히의 모범을 따른다면 굳이 울피아나와 결혼을 하지 않더라도 골트문트와 힘을 합칠 수 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다른 선제후의 견제도 받지 않겠지.’

그들이 두려워하는 건 강력한 왕조가 끝없이 이어지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동기도 선제 클라우데 2세의 학정이라고 하지만 그 내면엔 슈발츠마인에게 뺏긴 제관을 찾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황제가 독신을 선언한다면, 다른 말로 후사를 두지 않겠다는 건 제위 경쟁자인 선제후에게 기회가 돌아오는 걸 뜻한다.

슈발츠마인이 독점하던 왕관을 그들이나 후손의 머리 위에 씌울 수 있다는 이야기다.

루페르트가 빨리 죽는다면 그들에게도 기회가 주어진다는 이야기니까.

이 방법은 그러나 널리 사용되는 방법이 아니다.

어떤 황제가 후사를 두지 않으려 하겠는가.

어떤 황제가 자신의 가문이 아닌 적이 될 수도 있는 자에게 권력을 맡기겠는가.

순결제 루트비히는 예외 중의 예외다.

권력 기반이 약하기도 약했을뿐더러 수도승 황제라고 불릴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그 대단히 드문 길을 루페르트는 걸으려 하는 것이다.

“하오나, 폐하. 정말로 괜찮겠습니까?”

가장 놀란 건 순결제 이야기를 꺼낸 오토 브라에였다.

루페르트는 쾌활하게 웃으며 답했다.

“내 생의 목적은 오직 제국의 내전을 막고 제국이 선제들이 이어 온 영화 속에서 천년기를 맞는 것이다. 후사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선제후만 해도 그렇다. 그들 또한 제국인이 아니던가? 황제의 왕관은 슈발츠마인만의 것이 아니다. 혹 가문에서 염려를 한다면 황제직이 다른 가문에 넘어가지 않도록 상세한 조치를 하면 될 일이다.”

그를 바라보는 중신들의 눈동자에 다채로운 감정이 떠올랐다.

‘폐하. 진심으로 하시는 말씀인가?’

‘세상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자리를 가지고도 수도승의 길을 걷겠다니. 폐하의 속은 가끔 읽을 수가 없는 때가 있어.’

누구도 반대하지 않았지만 누가 반대하더라도 루페르트는 자신의 생각을 꺾진 않을 것이다.

“아카이아 대주교에게 말해라. 나 황제 루페르트는 호라신의 제단 앞에 영원한 신의 사도로 남겠노라고.”

내전과 레벤호스트의 반기.

두 개의 시련을 뛰어넘은 루페르트는 누구도 생각 못 한 한 수를 발견했다.

독신 선언.

수도승 황제라는 새로운 길을.

그 배경엔 울피아나라는 일생일대의 상처가 큰 지분을 차지하겠지만, 루페르트의 시선은 그 너머를 보고 있다.

* * *

루페르트가 독신 선언을 준비한다는 소식에 선제후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아니, 상상으로라도 그럴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루페르트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3번 용서했다고 하나 그 충격은 독신 선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비교를 하려면 황제직을 건 대리 결투 정도는 되어야 급이 맞을 것이다.

선제후들은 저마다의 참모와 조언자를 불러 황제의 속내를 읽으려 했지만 한 가지 사실만은 명확했다.

황제가 후사를 남기지 않겠다는 걸 선언한 이상, 그들에게도 황제의 자리가 열렸다는 소리니까.

가장 큰 충격을 받은 건 레벤호스트였다.

비록 제국 회의에서 체면을 구겼다고 하나 그는 끈질기게 루페르트의 약점을 찾아내서 다른 신교 선제후와 연대하여 루페르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획책하고 있었다.

그 시도가 한 번의 포석으로 물거품이 됐다.

이제 선제후들의 시선은 루페르트의 견제보다 루페르트 뒤에 선출된 황제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이건 속임수입니다. 황제의 속임수입니다. 황제는 썩어 빠진 호라 교단의 지원을 받고 있습니다. 이번 선언도 그중 하나겠지요. 독신을 선언해서 후사를 남기지 않을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호라 교단은 늘 그렇듯이 어처구니없는 궤변을 짜내서 황제의 독신 선언을 형해화시키려 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때 구교 황제는 선제만큼이나 강대한 권력을 휘둘러 우리 신교의 사자들을 겁박하겠지요.”

레벤호스트 옆에서 포효하듯이 설교하는 사람은 레벤호스트의 스승이자 조언자인 마르틴 보엠 목사였다.

준수한 외모와 영민함으로 영지 내외에서 인기 높은 레벤호스트의 그늘에 가렸지만 트라이아 선제후령의 실태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이야기한다.

그 똑똑한 레벤호스트는 결국 마르틴 보엠이라는 늙은 신교 목사라는 토양 위에서 배양된 보기 좋은 화초라고.

레벤호스트가 화분의 꽃처럼 보이지 않는 이유는 지속적인 교육의 결과로 레벤호스트와 마르틴 보엠 둘의 머리를 바꿔 끼워도 전혀 차이가 없을 정도로 같아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겠어.”

레벤호스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루페르트 가우저 옆엔 아카이아 대주교가 있지. 궤변의 황제라고 할 만한 그 노회한 늙은이라면 독신 선언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뿐만 아닙니다. 선제후님.”

보엠 목사가 고개를 숙였다.

“또 뭔가 있소?”

“아카이아 대주교가 최근 기이한 일을 꾸민다고 합니다.”

“기이한 일이라니?”

“호라 교단 내 오랫동안 알고 지낸 지인에 의하면 대주교는 빙해 문서에서 진정한 신의 이름을 알아낼 단서를 찾았고, 그 이름을 알아내서 황제의 이름으로 제국 전체에 신의 진정한 이름을 공표할 계획을 꾸미고 있다고 합니다.”

“신의 진정한 이름이라니? 그런 게 있나? 호라신은 호라가 아니냐고?”

“호라가 이름은 아니지요. 선제후님.”

“아, 그러고 보니 그랬었지.”

사실 잘 모른다.

레벤호스트는 신학 공부를 열심히 하긴 했지만, 선제후에 오르면서 대부분의 내용은 다 까먹고 말았으니.

하지만 대주교가 꾸민다는 계획은 레벤호스트가 보기에도 기묘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신의 진정한 이름을 알아내서 뭐 하자는 거지? 그게 의미가 있는가?”

“신교에 점점 밀리는 호라 교단을 부흥하기 위해서겠지요. 진정한 신의 이름이란 걸 떠벌여 그들이 진리를 알고 있는 양 대중을 호도하고 그 기치 위에서 다시 한번 우리 신교의 믿을 자유를 짓밟으려 들 겁니다.”

“큰일이군.”

레벤호스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성과 달리 그는 목사의 말을 그다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레벤호스트는 내실보다는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가를 더 중요시하게 생각했고,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 세련되게 말하고 학식을 과시하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훌륭한 군주도 영민한 인재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목사.”

선제후와 연결된 실을 움직이는 건 마르틴 보엠이다.

선제후를 움직이는 꼭두각시의 실을 쥐고 있으면서도 마르틴 보엠은 침중하기 이를 데 없는 표정으로 선제후에게 고했다.

“카렐리아.”

“카렐리아?”

“선제가 카렐리아의 백성들에게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 약속이라 함은?”

“신교를 믿을 자유라는 약속이지요. 신교는 상업 쪽에 보다 관대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선제는 흐지부지 약속을 미뤄 둔 채 붕어하셨고, 새 황제가 제위에 올랐습니다.”

“루페르트 가우저가 약속을 이행하면 그만 아닌가?”

마르틴 보엠이 회심의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황제 폐하가 곧 독신 선언을 하지 않겠습니까? 독신 선언이 뭡니까? 호라신의 종복으로 귀의하겠다는, 수도승-황제의 탄생을 말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토록 독실한 자가 자신의 직할지의 종교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하군.”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책사이자 주인을 보며 회심의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 아주 명안이야. 그 방안이라면, 루페르트 가우저를 흔들 수도 있겠군.”

1년 전의 레벤호스트가 자신을 본다면 왜 그토록 루페르트를 견제하려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루페르트가 그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제국의 모든 군주 중 가장 명민하며 뛰어나다는 그의 자부심을.

그의 개인적 질투심은 어쩌면 마르틴 보엠이라는 꼭두각시 술사가 없었더라도 그의 발밑을 태우고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카렐리아의 유력자에게 사절을 보내라. 은밀하게 처리해야 할 것이야.”

* * *

“들었어?”

“응. 세상에 그 젊은 황제 폐하가 수도사가 된다고 하더라고.”

“왜 그런데? 인물도 훌륭하신 분이고, 몇 번이고 업적을 세우신 분인데.”

황궁 안, 시녀들의 방에서는 연일 황제의 알 수 없는 결정에 대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시녀들만이 아니다.

황궁을 드나드는 모든 이라면 예외 없이 루페르트의 결정을 입에 올렸다.

그 이야기는 당연하게도 마를로네와 그 조부의 귀에 들어갔다.

“나 알 거 같아.”

마를로네가 조부를 돌아보았다.

“황제 폐하. 그 여자 엄청 싫어하거든.”

마를로네는 그날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경험했던 울피아나를 떠올리며 쓴웃음을 머금었다.

“겨우 그런 이유로 쉽게 결정하는 게 아니다. 평생 독신의 길을 걷겠다는 맹세는.”

베르크 란은 잘 움직여지지 않는 왼팔을 오므렸다 폈다.

진한 주름이 그의 미간에 깊은 흉터처럼 새겨졌다.

‘빌어먹을.’

여전히 팔이 낫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상처가 나을수록 베르크 란은 뼈저리게 느꼈다.

그 가면을 쓴 악마가 영원히 낫지 않을 상처를 자신의 몸에 새겼다는 것을.

‘이대로는 싸울 수 없다. 검을 쥘 수도 없는데 누구와 어떻게 싸우라는 것인가? 빨간 딱지를 뗐다고 해 봐야 이대로는 평범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다.’

“할아버지?”

“그래. 마를로네 무슨 일이냐?”

“표정이 워낙 안 좋아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그보다 아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 그래, 황제 폐하의 독신 선언에 관한 이야기를 했었지. 그래 뭔가 본 거라도 있냐?”

“그게.”

마를로네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 조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황제 말이야. 그 여자 엄청 싫어하더라고.”

“누구를?”

“울피아나.”

“그럴 리가.”

“아니, 진짜야. 나 황제 옆에서 몇 번이나 봤잖아? 할아버지는 못 본 괴물도 보고. 나는 물론이고 그 재수 없는 마법사마저 거품 물고 쓰러질 정도의 괴물 앞에서도 황제는 낯빛 하나 안 변하던데, 그 황제가 세상에 그 여자 보고는 정말로 거세당한 양 벌벌 떨더라니까?”

베르크 란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손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 황제는 보통 인간이 아니야. 그 정도 남자가 고작 여자 하나에 쩔쩔맨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린가.’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복도가 술렁였다.

황제다.

루페르트가 시종과 중신을 거느리고 빠른 걸음으로 황궁을 이동하고 있었다.

근위병까지 동행하는 것으로 보아 황궁 밖에 일이 있는 모양.

베르크 란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발을 짚고 일어섰다.

“어디 나가게?”

“잠깐 구경 좀 하게. 폐하의 행차를.”

“따라간다고 뭔가 내줄 거 같진 않은데.”

“거지도 아니고 황제만 바라보면 쓰나. 할 일 없으면 너도 따라오거라.”

“싫어. 그 여자가 나 황제 따라다니는 거 보면 나 가만 안 놔둘 거 같단 말이야.”

“뭔 헛소리냐.”

베르크 란은 손녀의 말을 일축하고 절뚝이는 걸음으로 황제의 행렬을 따랐다.

예상대로 황제는 황궁 밖으로 나가 황궁 옆에 있는 대주교 회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독신 선언에 관한 준비라도 하는 건가.’

아직 일정은 잡히지 않았기에 조율 정도를 할 것이다.

그런데.

‘저건?’

황궁의 그늘에 세운 마차 뒤에 한 사내가 쪼그리고 있었다.

열 사람을 태우고도 남을 정도로 널찍한 짐칸은 오직 한 사내의 몫이었다.

크다 작다의 문제가 아니다.

거대하다.

인간에게 속한 육체가 아니다.

세상 어디에 3미터에 달하는 키와 곰처럼 넓은 어깨를 가진 자가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런 자가 실제로 있다.

거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 손은 능히 한 인간의 사지를 잡아 찢을 수 있을 정도의 힘과 박력이 있었다.

그 거한이 황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베르크 란의 가슴이 뛰었다.

‘이건?’

틀림없다.

암살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