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28. 황제의 멍에 (2)
루페르트의 승리는 어떤 이에겐 환희에 찬 성가로 들렸겠지만, 어떤 이에겐 대단히 불쾌한 불협화음으로 들리기도 했다.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의 심경을 말하자면 후자에 가깝다.
그는 루페르트의 승리에 사절을 보내 승리를 축하하긴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눈을 부릅뜨고 황제가 렌타이어마르크에 저지른 일과 일들을 주시했다.
책 잡을 건수는 얼마든지 있었다.
특히 만슈타인이라는 애송이 장수가 저지른 전횡은 제국의 군주라면 누구나 반감을 살 만한 짓이었다.
같은 제국인을 상대로 협박과 갈취를 하다니.
선제 철혈대제가 반역을 일으킨 땅에 일말의 자비도 없이 학살과 파괴를 자행했다 하나 그건 어디까지나 반역의 본거지에 대한 응징이었다.
마지못해 끌려들어 간 무고한 촌락과 도시까지 철권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런데 만슈타인은 마치 저잣거리의 깡패처럼 돈을 뜯었고, 그 돈으로 승리를 일궈 냈다.
“그런 인간을 아래에 두다니. 대체 제국의 질서가 뭐로 보이는 건지.”
더욱 마음에 안 드는 건 렌타이어마르크의 변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음침한 리더쉽 아래에 있던 선제후령은 해묵은 종교 논쟁에서 늘 중립을 지켜왔다.
그런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사실상 실각하고 슈발츠마인의 입김이 미치면서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가문의 구성원들이 구교 신앙을 하나둘 드러냈고, 후계자 또한 전통적인 구교 신자를 추천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던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운명 따윈 이제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만 잠재적인 신교 동맹 구성원이 떨어져 나가는 건 어릴 때부터 급진파 신학자에게 교육받았던 레벤호스트에겐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속을 알 수 없는 놈이다.
촌놈처럼 수더분하게 행동하기도 하면서도 필요할 땐 누구보다 명민하게 행동한다.
대리 결투 때 보여 줬던 그 의연함은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젊은 친구가 승리를 맛보았다.
레벤호스트는 철혈대제의 치세를 떠올렸다.
철혈대제도 그랬었다.
즉위 초기, 빈약했던 입지를 한 번의 전쟁과 벼락같은 승리로 뒤집었다.
루페르트와 클라우데 2세.
출신은 천차만별이라지만 결국 둘 다 슈발츠마인 가문이다.
견제가 필요하다.
저 루페르트가 클라우데 2세의 전철을 되풀이하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레벤호스트는 자신의 동료들을 생각했다.
신교동맹.
말 그대로 신교를 지지하는 군주들의 회합이다.
정식으로 선포된 적도 없고 집단 명의로 뭔가를 한 적은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신교 군주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불렸고 그 기조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레벤호스트는 같은 종교를 믿는 선제후를 찾아갔다.
“그대의 생각엔 동의한다만, 명분이 없지 않나? 나도 그 애송이가 싫지만 당장은 그 하켄하임 촌놈이 원하는 대로 하는 걸 지켜볼 수밖에.”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호방한 이미지와 달리 신중한 자였다.
“황제가 선을 넘으면 그때부터 움직여도 늦지 않아.”
옷처럼 입고 있는 호탕함을 연기하는 동료 선제후를 보며 레벤호스트는 강한 실망감을 느꼈다.
‘내가 앞장서면 언제든 뒤따라올 거라는 언질을 주던 인간이 막상 때가 오자 비열한 본성을 드러내는군. 하긴 선제후가 저따위니 제 땅 하나 못 지켜 북부인이 자기 땅에서 난리법석을 피울 수 있는 거겠지.’
레벤호스트는 속으로 게오르크 아르님을 욕하며 다른 신교동맹의 주축인 디터팔츠 선제후를 찾아갔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의 국체를 거부했고 제국의 헌법마저 흔들었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그는 입에 담기 어려운 이단과도 손을 잡았다고 하더군. 저 마법대학에서 마법사 회의 자문단 전체가 황제의 출석에 응한 건 알고 있겠지? 당장은 새 황제가 원하는 대로 하게 하는 게 옳다고 봐야겠지.”
디터팔츠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는 게오르크 아르님보다 훨씬 더 많이 루페르트 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대단히 서운한 일이었다.
신교의 대들보 같던 그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건.
“내가 보기엔 철혈대제의 악몽이 되풀이되는 거로밖에 보이지 않는데.”
“올해는 새 황제의 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어. 해가 바뀌고 황제의 행보를 봐야겠지. 어차피 곧 제국의 밤 행사가 열리지 않던가? 그때 황제의 의중을 떠보세.”
레벤호스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날카로운 신경은 실망으로 가득 찼다.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시간이 전부야. 루페르트를 보라고. 빠르게 움직이니 전쟁을 손쉽게 종결했잖아? 당장 우리 신교 군주들이 손잡고 미리 황제의 전횡에 대비해도 모자람이 있을 터인데, 단박에 뿌리를 뽑아도 모자랄 일을 차일피일하자고?’
“레벤호스트.”
막스 게오르크가 세월이 준 지혜를 머금은 깊은 눈동자를 반짝였다.
올해 오십 즈음 된 그는 선제후단 가운데서도 아카이아 대주교를 빼면 최연장자로 평소는 늘 중립을 지키며 온건하게 움직이지만 가끔은 모두가 놀랄 날카로운 통찰을 보여 주곤 했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었다.
“혹시 그대는 새 황제의 공적을 시기하는 건 아닌가?”
“무슨 말씀인가.”
“기분 나빴다면 사과하지. 허나 새 황제의 공적에 조바심을 느끼지 말게. 성공이라는 순항 뒤엔 능력보다도 행운의 바람이 더 크게 작용하는 법이니까. 계시의 성녀가 렌타이어마르크에 나타나 오염된 늪지대를 정화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겠지?”
노회한 군주답게 말을 돌리지만 이미 레벤호스트는 마음을 자극받은 뒤였다.
‘내가 그런 애송이 촌놈보다 못하다고? 그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레벤호스트는 늘 생각했다.
제국의 모든 군주, 동료 선제후 중에서 자기보다 뛰어난 자는 아무도 없다는.
실제로 레벤호스트는 선제후 중에서 가장 글을 잘 썼고 펜을 바르게 잡았으며 엄격한 규칙을 가진 룸 제국식 시를 짓는 것으로 유명했다.
전쟁 경험은 없지만 전쟁에도 관심이 많아 두 권의 군사 저술을 전문 문필가를 시켜 간행하기까지 한 사람이다.
그런데 루페르트 가우저라는 촌놈은 반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안에 난공불락이라 불리던 렌타이어마르크를 정벌했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위업인지는 군사에 관심이 있는 자라면 모를 리가 없다.
‘막스 게오로크 말대로 마냥 운이 좋았다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 허나 내가 볼 땐 극도로 위험해.’
레벤호스트는 평소 자랑하던 명민한 두뇌를 굴렸다.
곧 괜찮은 수가 생각났다.
“만슈타인.”
레벤호스트의 입가에 오랜만에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의 비위를 마지못해 맞춰 주던 막스 게오르크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오르는 걸 보며 레벤호스트가 웃음기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슈타인이라는 자가 저지른 범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
막스 게오르크는 레벤호스트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한 번에 깨달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동료 선제후의 이야기를 인내심 있게 들었다.
이야기가 끝난 후 막스 게오르크가 한숨을 내쉬며 동료 선제후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걸로 그대가 만족한다면 돕겠네. 하지만 이 이상은 안 돼.”
이건 찬동과 동시에 경고다.
“종파를 떠나 우리는 황제의 신하라는 걸 잊지 말게. 레벤호스트.”
막스 게오르크의 경고에 레벤호스트는 상징과 같은 오만한 미소로 화답했다.
“명심하겠네.”
* * *
오랜 회의와 순방 끝에 노곤해진 몸으로 자택에 돌아온 골트문트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울피아나. 저건?”
틀림없다.
도펠죌트너다.
그것도 모르는 얼굴이 아니다.
저 안젤리나가 은밀하게 고용했다는 베르크 란의 손녀다.
루페르트를 따라 리히트보덴이라는 오지에도 따라갔고 렌타이어마르크 동란 때도 황제의 호위로 종군했다던 작달막한 소녀가 자신의 저택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아 과자를 먹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 아버님.”
울피아나가 다소곳하게 인사하며 부친에게 인사했다.
“네가 데리고 온 거냐?”
멀리 응접실에 앉아 있는 마를로네를 보며 골트문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또 기행인가.’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울피아나의 선행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녀의 기행에 관해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모두를 놀라게 하는 미모와 마음에 호소하는 그윽한 목소리, 타고난 기품에 가려 그렇지 울피아나는 꽤 자주 엉뚱한 짓을 일삼곤 했다.
그녀의 부친인 골트문트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언제까지 충동으로 살아갈 건지. 집에 야생동물을 키우는 기분이라니까.’
아무튼 이번 기행에 관한 이유는 꼭 들어야겠다.
저 도펠죌트너가 루페르트의 사람인 건 명백하니까.
당장 황제가 정치적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빨간 명찰을 떼 주지 않았던가.
“왜 데리고 온 거냐? 저걸.”
“저를 잘 따르더라고요. 마치 강아지처럼요.”
“당장 돌려보내라.”
“굳이요? 귀엽기만 한데. 조금만 자극하면 부르봉 억양이 나오는 게 얼마나 사랑스러운데요.”
울피아나가 마를로네 쪽을 보며 손을 흔들며 크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를로네~! 인사드리렴. 나의 아버님이시란다.”
마를로네가 이쪽을 바라보며 꾸벅하고 인사한다.
못 배워 먹은 촌놈 식의 인사를 보며 골트문트는 표정을 구기진 않았지만, 못 볼 걸 봤다는 기분을 느끼고 시선을 치워 버렸다.
“긴말은 않겠다. 다음에 내가 여기 나올 땐 안 보이게 해 놓거라.”
“아버님.”
울피아나가 눈을 반짝였다.
골트문트는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딸이 부탁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이다.
울피아나는 거의 부탁을 하지 않지만 일단 하나에 빠지면 대단히 강하게 집착하는 여자다.
“뭐, 뭐냐. 울피아나.”
“저, 폐하를 만났어요.”
“뭐?!”
“황궁에서요.”
“무슨 이야기를 했지?”
“그리 대단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폐하 말이죠. 외로워 보이시더라고요.”
“외롭다고?”
“네. 아무리 궁정 안이라고 하지만 호위 하나 없이 궁전 안을 정처 없이 방황하시더라고요. 결국 발길 닿은 데가.”
울피아나가 마를로네 쪽으로 힐끗 시선을 주었다.
그녀의 입에서 코웃음이 흘러나왔다.
“정작 마를로네 양 말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나 봐요. 뭐라더라. 슈발츠마인 사람들과는 친해지고 싶지 않다든가.”
“도펠죌트너라면 그런 소리를 할 수 있겠지.”
“폐하는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찾아갈 정도로 내몰려 있는 거 같아요.”
“근거는?”
“그러니 마를로네 양을 찾아간 거겠죠.”
“우연히 발걸음이 닿았겠지.”
“슈발츠마인 가문이라고 하나 실제 그쪽 출신도 아니잖아요? 데리고 다니던 몸종도 말벗도 없으실 정도로 인간관계도 빈약하시다던데.”
울피아나의 눈이 더욱 반짝였다.
골트문트는 더욱 강한 부담을 느끼며 사랑스러우면서도 두려운 외동딸의 입술이 열리는 걸 지켜보았다.
“황제 폐하. 슬슬 결혼을 생각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생각해 보마.”
마지 못한 답이다.
이번 전쟁에 대해 골트문트의 입장은 알려진 바가 없다.
사람들은 으레 같은 구교 측 제후인 그가 루페르트의 승리에 찬동했으리라 짐작할 뿐이었다.
내막은 다르다.
골트문트는 어느 누구보다 루페르트의 승리를 경계하고 있었다.
강력한 황제는 그가 구상하는 제국의 가장 거대한 적이니까.
실제로 오늘 그는 레벤호스트의 은밀한 제안에 응하고 오는 길이었다.
레벤호스트는 제국 의회에 전쟁의 주역 만슈타인에 대한 13가지 전쟁 범죄에 관한 기소를 촉구할 예정이다.
* * *
“마를로네 양. 오늘은 정말로 즐거웠어요. 다음에 언제 다시 한번 더 다과회를 열기로 해요.”
문이 닫히자마자 마를로네의 미소는 무서울 정도로 싸늘하게 걷혔다.
억지로 반짝거리던 눈엔 다시 짙은 안개가 끼었고 손에 들린 거추장스러운 짐덩이를 무감각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
울피아나가 입던 옛날 옷이란다.
필경 사치스럽고 화려하며 가격이 나갈 것이다.
그래서 버릴 수가 없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시궁창에 버리고 싶지만.
“그래, 울피아나 님을 만났다고?”
베르크 란은 여전히 거동이 불편했다.
초반의 회복세는 빨랐지만, 결투의 상처는 치명적이었다.
도펠죌트너의 우월한 회복력으로도 완전히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특히 가장 중요한 오른팔의 감각이 예전만 같지 않다.
무릎이 시큰거리고 발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정도의 고통을 주기도 했다.
완전한 회복까지는 시간이 더 걸릴 것이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회복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베르크 란도 마를로네도 어느 누구도 그 가능성은 입에 담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문제를 외면한 채 조손은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응. 소문대로 아름다웠고 기품이 있는 분이었어.”
베르크 란이 손녀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불만이 많아 보이는군. 그래, 털어놓아 보거라.”
“결혼하고 싶어 하더라고.”
“결혼? 누구랑?”
“위버하임 남작.”
“황제 폐하 말인가.”
베르크 란이 면모를 하지 못해 까끌까끌한 수염이 난 턱을 매만지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울리는 배필이군.”
“전혀.”
마를로네가 부정했다.
“무슨 뜻이지?”
“그 여자 말이야.”
마를로네가 방 한구석에 놔둔 꾸러미를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우리를 속여 먹은 안젤리나 대황후가 차라리 천사처럼 보일 정도였다고!”
“악녀라는 건가?”
베르크 란이 그답지 않게 씨익 웃었다.
마를로네는 재차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사람 자체가 악한 건 아니었어.”
“그럼?”
“글쎄. 뭐라고 해야 좋을까. 상처 주는 사람? 멀리서 보면 아름답지만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그런데 정작 본인은 자각이 없는 듯한 그런 느낌.”
베르크 란이 한마디로 정의했다.
“순수악이군.”
마를로네는 고개를 들어 창밖으로 보이는 높이 솟은 건물들을 흐릿한 눈으로 응시했다.
“……황제 폐하. 불쌍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