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27. 더 끔찍한 것 (2)
“리, 리프니에님을 모르나?”
“모른다!”
사내는 당당하게 답했다.
“보나 마나 여기 인간들이 믿는다는 호라 같은 실체도 없는 잡신이겠지.”
사내가 히죽 웃으며 촛불이 밝히고 있는 오두막 정경을 돌아보았다.
루페르트도 그를 따라 했지만 곧 후회했다.
오두막 천장과 벽엔 벗겨낸 인간 가죽이 빽빽이 걸려 있었으니까.
이미 마음이 어느 정도 찌그러져 있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루페르트의 마음은 여기서 한 번 더 꺾였을지도 모른다.
‘끔찍하군. 이 인간의 소행인가. 아니 그보다 이 인간은 어디서 온 거지?’
루페르트가 마음을 가다듬으며 물었다.
“어디서 왔나? 남쪽인가? 동쪽인가? 북쪽은 아닌 거 같다만.”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루페르트는 그 방향이 어딘지 몰랐으나 곧 사내가 방향을 알려 줬다.
“서쪽이다.”
“부르봉? 부르봉 사람은 아닌 거 같은데.”
“그보다 더 서쪽. 바다 건너에서 왔지.”
“……신대륙?”
들은 적이 있다.
제국의 동맹국 카스무어가 대양 너머에 새로운 땅을 발견했다는.
그러나 그 땅은 죽음의 땅이었다.
풀 한 포기, 벌레 하나 살아갈 수 없는.
카스무어인이 신대륙에서 가지고 온 건 부도 희망도 아닌 끔찍한 역병뿐이다.
“제국의 황제라면 제국인 백 마리 정도는 내어 주겠지?”
은둔자가 긴 담뱃대를 꺼내 입에 물며 불을 붙였다.
“사람이라니.”
“우리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싶다. 그리 많이 필요하지도 않아. 100마리면 충분하다.”
은둔자가 정신이 알싸해지는 연기를 뿜어냈다.
“신?”
“우리 신은 너희들의 메아리 같은 신과 달리 실체가 있고 힘이 있으시지. 우리 신은 인간의 비명과 살가죽을 원하신다.”
“취향이 독특한 신이군.”
“내게 원하는 게 있어서 온 게 아닌가? 제물을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
루페르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람을 바치라니. 그것도 백 명이나.’
루돌프라면 기꺼이 바쳤을 것이다.
방법은 많다.
부랑자, 범죄자, 반역자, 연고가 없는 자를 아무나 잡아서 넘길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루페르트의 자존심, 정확히는 황제의 자존심을 능멸하는 것이다.
‘아무리 범법자라고 해도 황제가 자신의 백성을 어디서 온 지도 모르는 이상한 놈에게 판다고? 그건 아무리 급해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자유인들의 제국의 황제가 해서는 아니 되는 일이다.’
“바깥에 계집 하나가 있던데.”
은둔자가 눈을 번들거렸다.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정신 번쩍 들었다.
“그 계집 하나와 교환해도 돼. 그 계집한테는 좋은 냄새가 나더군.”
“내게서 더 좋은 냄새가 나지 않나?”
“고약한 향수 냄새는 두통만 일으킬 뿐이지! 뭐, 그래도 황제의 가죽은 벗겨 보고 싶군.”
“좌우지간, 그 거래는 불가능하다.”
“이유가 뭐지?”
“생각보다 사나운 녀석이라 당신 가죽이 벗겨질 수도 있거든.”
마를로네를 생각하니 절로 헛웃음이 튀어나오는 루페르트였다.
덕분에 괜찮은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안개 속을 걷던 무질서한 인간의 무리가 루페르트의 눈앞에 그린 듯이 떠오른 것이다.
‘그거 괜찮을지도?’
루페르트가 표정을 관리하며 은둔자에게 물었다.
“인간 100명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
“상태가 안 좋은 인간도 괜찮나? 상태가 좋지 않지만 자기 발로는 걸을 수 있지. 한 번에 인도할 수 있어.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루페르트의 물음에 은둔자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조건, 받아들이겠다.”
* * *
“내가 필요하면 이 요술 깃털을 하늘 위로 날려라. 그리하면 나와 나의 백성들이 그대를 도우러 달려올 것이다.”
은둔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새의 꽁지깃을 주었다.
그것이 끝이었다.
아무 설명도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은둔자는 루페르트를 쫓아내듯 자신의 오두막에서 몰아냈다.
그 기이한 깃털을 손바닥에 올린 채 물끄러미 쳐다보던 루페르트는 고개를 들어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의 여신을 눈에 담았다.
“여신님. 그 은둔자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궁금한가요?”
평소보다 리프니에의 목소리가 매서운 느낌이다.
소라고둥처럼 귀여운 모습이 아닌 사람의 실체로 싸늘한 시선을 보내다 보니 체감 온도는 더욱 싸늘하다.
“……제가 아는 세계의 사람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루페르트는 시선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맞아요.”
리프니에가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재의 대륙에서 왔죠. 당신들이 신대륙이라 부르는.”
“재의 대륙? 그곳은 어떤 곳입니까?”
“거기도 사람이 살았어요. 아주 많이요. 당신의 제국보다 큰 나라를 세우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그들은 너무나 욕심이 많았고 너무나 어리석었죠.”
리프니에가 활짝 웃었다.
“그래서 전부 죽었어요.”
“……아.”
달리 할 말은 없었다.
전부 죽었다는데.
리프니에는 더 이상 말하기 싫은 듯 눈을 감아 버렸다.
어둠이 그녀 주위를 감싸는 걸 보며 루페르트 또한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은둔자의 정체가 아니다.
루페르트는 손안의 깃털을 보며 주먹을 쥐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제국 성인.’
이 깃털이 무슨 힘을 가져다줄지는 아직 모른다.
어렴풋이 예전에 본 스스로 움직인다는 바위가 움직여 무언가 해 줄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여신이 장담했다.
그것이라면 제국 성인의 장난감을 능히 가볍게 박살 내 버릴 수 있다고.
‘다른 방법은 없다. 이 깃털에 모든 걸 걸겠다.’
제국을 파멸시키려 하는 자들에게 철퇴를 내릴 시간이다.
* * *
작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었다고 하나 시간의 흐름은 큰 틀에서 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형태로 흘러갔다.
황제군은 도시를 포위했고 충성스러운 제국 신민이 황제를 위해 성문을 열어 주었다.
무혈입성으로 도시를 점령한 황제군은 황제 루페르트를 거느리고 선제후의 궁전으로 향했다.
“위대한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장군 분더발트가 루페르트에게 고개를 조아리며 정중하게 말했다.
“아직 끝난 건 아니오. 장군.”
진짜 싸움은 지금부터다.
루페르트는 깃털을 손에 쥔 채 분더발트에게 명령을 내렸다.
“대포와 폭약을 준비하여, 광장을 비우고 병사들을 반월형으로 배치하시오. 궁전 안에서 무엇이 나오든 쉽게 처리할 수 있도록.”
분더발트는 의아한 눈으로 루페르트를 바라보았다.
늘 동석하기만 했던 황제가 전투 지시를 내린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황제 폐하가?’
전쟁에 문외한이 시시콜콜한 지시를 내리는 건 패배로 가는 지름길이다.
얼마나 많은 군주나 성직자가 장군의 일에 간섭하다 패배로 이끌었는가.
이른바 위대한 승리엔 늘 그런 무능한 상관의 패착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전쟁은 끝났다.
중요한 국면도 아니다.
한 번쯤이야.
분더발트는 기꺼이 루페르트의 지시에 따랐다.
다만, 준비를 하면서도 루페르트의 저의를 의심한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항복한 군주 앞에 궁전을 무너뜨릴 정도의 화약과 대포를 들이대라니.
그것도 동료 선제후에게 말이다.
그래도 충실한 성격답게 분더발트는 시킨 대로 행했다.
황제군은 광장을 비우고 골목만을 점령한 모양새로 선제후의 궁전을 둘러쌌고, 궁전의 입구엔 야전용 대포 두 문이 늠름하게 자리 잡았다.
궁전을 무너뜨리진 못하겠지만 맹렬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는 화약통도 입구 주위에 촘촘히 배치됐다.
만슈타인이 이끄는 기병대는 광장에서 멀찌감치 떨어져 두 무리로 나뉜 채 흥미로운 눈으로 보병대가 벌이는 작업을 지켜보았다.
모든 준비가 갖춰지자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변명을 듣겠다.”
궁전 안에 들어간 건 소수의 전령이었다.
전령이 빠져나온 후 문이 열렸고 죽어 가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맨발로 걸어 나왔다.
전처럼 그는 미사여구를 내뱉으며 맨발로 걸어왔다.
루페르트는 그에게 일말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루페르트는 선제후 다음에 나타날, 제국의 진정한 위협만을 생각했다.
곧 종소리가 울렸고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괴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제국 성인이 모두를 조롱하며 만인의 눈앞에 나타났다.
시간의 흐름대로.
“에디지우스.”
루페르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하얀 천으로 감싼 입 부분에 미소 짓는 형태가 떠올랐다.
“오. 황제 폐하가 내 이름을 불러주다니. 필생의 영광이구만.”
“제국의 이름으로 너를 심판하겠다.”
“할 수 있으면. 가짜 황제.”
에디지우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오냐.”
루페르트가 손을 내저었다.
그와 동시에 뒤편에 있던 포병들이 대포의 화구에 불을 붙였다.
콰쾅!
두 구의 대포가 동시에 불을 뿜으며 사람 머리만 한 포탄을 날렸다.
그 포탄은 제국 성인의 몸에 구멍을 냈고, 머리통을 글자 그대로 날려 버렸다.
“우와.”
지켜보던 마를로네가 탄성을 내질렀다.
“제국 성인도 대포알을 맞으니 죽는구나…….”
“대포를 맞고도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요.”
임시 포수를 맞은 한스 징펠만이 수염을 쓰다듬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도제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벌써 다음 포탄을 장전했다.
한편 광장에 모인 병사들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현장을 지켜보았다.
갑자기 나온 자칭 제국 성인도 기괴한데, 그 괴인이 나타나는 걸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대포알로 날려 버리는 모습은 평범한 병사의 눈에도 기괴해 보였으니.
가장 놀란 건 다름 아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였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철석같이 믿었던 제국 성인이 등장한 지 1분도 되지 않아 퇴장했다.
연극으로 치면 주연 배우가 나타나자마자 발이 고꾸라져 무대 아래로 자빠진 격이다.
안 그래도 죽어 가던 선제후의 낯빛이 그야말로 검은색으로 변해 버렸다.
루페르트는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쓰러진 제국 성인의 시체를 주시했다.
‘자, 이제 일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은둔자의 깃털은 어디까지나 보험용이다.
여신이 보증했지만, 은둔자는 그다지 믿음이 안 가는 인간이었고 믿기도 싫었다.
할 수만 있다면 루페르트 자신의 힘만으로 이 상황을 처리하는 게 최선의 방안이다.
그 궁리가 현재의 상황으로 이어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라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던 일이 운명처럼 일어났다.
제국 성인의 시체에서 붉은 벌레들이 꿈틀거리며 몸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다.
‘역시 이걸로는 안 되는 건가.’
루페르트는 즉시 좌우에 명했다.
“저 불경한 자의 시체와 기생충을 당장 불로 정화해라.”
“황제 폐하의 명령이다! 저것들을 불태워라!”
분더발트의 우렁찬 명령이 떨어진 직후 용감무쌍한 분더발트 연대의 병사들이 제국 성인의 시체에 불을 지르기 위해 접근했다.
그런데 다음 순간 궁전 안에서 오싹한 포효가 터져 나왔다.
한두 명이 아닌, 수십, 수백 명이 일제히 내지르는 마치 지옥에서 터져 나온 듯한 흐느낌.
곧 병사들은 보았다.
궁전 안에서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안면을 가진 인간들이 배를 하늘로 향한 채 뒤집어 누운 채 벌레처럼 네다리로 기어 궁전으로 튀어나오는걸.
그 속도는 인간의 속도가 아니었고, 뒤틀린 채 네 발로 질주하는 그 모습 또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모습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발이 묶인 듯 부릅뜬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장면을 지켜보았다.
“저, 저건 뭡니까?!”
분더발트조차 경악을 숨기지 않았다.
그 경악의 크기는 이전보다 훨씬 컸다.
‘전에는 그냥 순순히 죽어 줬던 건가.’
타타타타탕!
황제군의 총이 불을 뿜었다.
하늘을 향해 뻗은 창들이 일제히 아래로 내려가 창의 벽을 세웠고, 측면에선 만슈타인의 기병대들이 피스톨과 기병도를 뽑고 공포를 다스리며 기회를 엿보았다.
인간 꼭두각시의 목적은 황제군의 격퇴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에디지우스, 정확히는 에디지우스의 몸에서 기어 나온 벌레들을 전력으로 감쌌다.
‘벌레가 본체였나.’
적에 대한 지식을 하나둘 깨달아 가며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폭약을 터뜨리시오.”
분더발트는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재차 우렁찬 목소리로 주위에 명했다.
“놈들을 이 세상에서 쓸어버려라!”
병사들이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치직거리는 소리를 내고 타고 들어간 도화선은 폭약통에 닿았고, 곧 광장 전체가 울릴 정도의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악마조차 살아남을 수 없는 폭발의 향연 속에서 인간들은 터져 나가고 사지가 찢겨 나가며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뒤틀렸고, 그마저도 매캐하게 피어오른 하얀 연기가 감싸 버렸다.
자욱한 화약 연기 속에서 루페르트와 황제군은 연기 너머를 노려보았다.
“지겔슈타트.”
루페르트가 그의 마법사를 불렀다.
“네. 폐하.”
“어떤가?”
“으음. 확신을 할 수 없군요. 잠시 시간을 주십시오.”
지겔슈타트가 뒤편에 서 있는 마를로네를 불렀다.
“도펠죌트너.”
“네.”
“뭐가 보이나?”
“죽음밖엔 보이지 않네요.”
“어떤 죽음이지?”
지겔슈타트의 물음에 마를로네는 가늘게 뜬 눈으로 불쾌감을 섞어 말했다.
“꿈틀거리는 죽음요.”
지겔슈타트가 곧장 루페르트에게 보고했다.
“안에 뭔가 있습니다. 크고 거대한 무언가가.”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 나의 군대만으로는 처리할 수 없는 재앙이라는 소린가.’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제국 성인은 이 세상에 속한 존재가 아니라는걸.
즉, 표면에 속한 존재가 아닌 이면의 존재.
이면의 존재는 표면의 군대로 처리할 수 없다.
이면의 존재는 같은 이면의 존재로 처리해야 한다.
리프니에는 그 길을 제시했고 수단마저 손에 쥐여 주었다.
[ 루페르트 가우저. ]
마음이 통한 걸까, 루페르트가 여신을 생각할 때 여신이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다.
[ 당신의 진정한 힘을 사용할 때가 온 거 같네요. ]
“기꺼이.”
루페르트는 하얀 연기 솜에서 거대한 구체가 형상을 갖추어지는 걸 보며 다채로운 색채를 가진 깃털을 하늘 위로 날렸다.
깃털은 바람을 타고 하늘 위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올라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