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26. 성 에디지우스 (2)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선제후의 궁전 앞에 황제와 그의 군대가 도착했다.
“손쉬운 승리군요.”
말 머리를 나란히 한 분더발트가 궁전을 노려보며 담담히 말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선제후가 저렇게까지 소극적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다른 광장에선 선제후를 따르던 연대가 저항을 포기하고 군기를 황제군에 넘겨주고 있었다.
뒤늦게 장교들이 전황을 분석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전쟁은 너무 이상한 형태로 종결됐기 때문이다.
만슈타인의 한발 빠른 움직임과 그 기발한 후속 조치가 탁월하다고는 하나 그 승리는 만슈타인의 오롯한 재능만이라기보다는 상대방의 과실에도 비슷한 지분이 있는 것으로 보였다.
곧 드러난 결과는 상대방의 실수가 컸다는 걸 드러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겐 기병대만 부족했을 뿐이지 루페르트가 도착한 직후엔 황제군에 대항할 병력이 있었다.
수비군과 합세해서 회전을 벌였다면 황제군은 어쩌면 패퇴하여 국경을 도로 넘어가야 했을지도 모른다.
즉, 만슈타인의 승리는 절반이 상대방의 실책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분더발트는 이를 시기하지 않았다.
운이라는 것은 막강한 적의 패착과 더불어 위대한 명장이 되기 위해 필수 불가결한 덕목이니까.
오히려 마음을 비우니 보인다.
그 불안한 반석에 모든 것을 걸 수 있는 만슈타인의 과감함이.
처음에는 무모한 만용으로 보였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니 둘도 없는 날카로움으로 느껴졌다.
이러나저러나 전쟁은 끝났다.
곧 선제후는 궁전 밖으로 끌려 나올 것이고 이제는 누구의 비호도 받지 못한 채 황제의 단죄를 받을 것이다.
그런데 황제의 표정이 썩 밝지 않다.
손쉬운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불안한 심경을 은은히 내비치고 있었다.
“폐하?”
“아, 장군. 미안하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곧 병사들이 선제후를 데리고 나올 겁니다.”
활짝 열린 궁전의 문안에서 병사들의 외침이 들렸다.
“선제후다. 선제후가 출두하고 있다!”
황제의 군기가 휘날리며 만들어 낸 그림자 아래로 루페르트와 그의 장군, 호위와 관료들이 지위에 따라 도열한 채 마중 나오는 선제후의 행렬을 저마다의 감정이 담긴 눈으로 응시했다.
곧 루페르트의 눈에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는 윤곽이 들어왔다.
틀림없다.
저 불쾌한 걸음걸이로 끈적거리며 다가오는 건 이 모든 사태를 초래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다.
곧 병색이 완연한 얼굴이 햇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웃고 있었다.
선제후의 맨발이 태양이 달군 땅을 밟았다.
“오, 위대한 승리자시여. 오, 둘도 없는 제국의 정당한 군주시여, 오, 신의 가호 아래 제국을 지배하는 유일자시여.”
입에 발린 찬사를 내뱉으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루페르트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발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또 용서를 구하는 건가.”
“아무리 황제 폐하가 관대하다고 하나 두 번의 용서는 없을 터인데.”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무릎을 꿇었다.
루페르트는 싸늘한 눈으로 선제후를 노려보았다.
한마디 대꾸도 대응도 없었다.
“선제후를 호송할까요?”
분더발트가 조심스레 묻는다.
루페르트는 이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불안한 눈으로 어둠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또 다른 것들을 보았다.
궁중의 사람들이다.
법관의 옷을 입은 자, 귀족의 옷을 입은 자, 하녀와 하인들, 악사, 주방장, 병사들, 정강이를 드러낸 집달리 풍의 하급 관리들.
루페르트의 궁정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군상들이지만 어째서인지 루페르트는 그들에게서 피가 얼어붙을 정도의 오싹함을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피부에 두드러기가 올라왔다.
‘이 느낌은?’
권능 위기 감지가 발동했다.
군대를 보고도 발동하지 않았던 권능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 상대로 발동한 것이다.
마를로네가 루페르트를 돌아보며 불쑥 물었다.
“폐하?”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손을 내저으며 명했다.
“선제후를 포함한 모든 이를 체포해라.”
그때 궁전 안에서 조잡한 종소리가 들려왔다.
병사들의 눈동자에 의문 부호가 떠올랐다.
조잡한 쇠붙이로 만든 작고 조잡한 종들이 울리는 경박한 울림은 모든 제국인의 기억에 있는 것이었다.
어릴 때부터 보고 손가락질하고 두려워했던 존재들.
문둥이라 경멸당한 나병 환자들이 몰려다니며 내는 소리니까.
마을이나 도시에 들어오는 게 용납되지 않은 그들은 반드시 소리 나는 싸구려 종을 옷이나 지팡이에 달고 그들이 있다는 걸 알려야 했다.
기억에 묻힌 음울한 소리가 선제후의 궁전 안에서 울려 퍼졌다.
곧 온몸을 하얀 천으로 감싼 깡마른 사내가 여러 개의 종이 달린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궁전 밖으로 걸어 나왔다.
루페르트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기 시작했다.
그뿐만 아니다.
말 아래 서 있던 마를로네가 눈을 부릅뜨며 뒷걸음질 쳤다.
“폐, 폐하…….”
“나도 알고 있어.”
처음 보는 인간이지만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제국 성인이라 불리는 존재는 현실에 서 있는 괴이 그 자체니까.
루페르트가 말 머리를 급히 돌리며 명했다.
“장군. 저 인간을 죽이시오.”
“저 인간을요?”
분더발트가 의아해하며 묻는다.
이미 그들의 수장인 선제후는 투항했고, 상대는 비무장에 힘도 없어 보이는 나병 환자인데 군대를 동원해 죽이라니.
“저건, 평범한 인간이 아니오.”
그때 나병 환자가 미소 지었다.
그의 얼굴은 하얀 천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얼굴을 둘러싼 천이 움직이며 웃는 입 모양을 그대로 재현했다.
“황제 폐하. 어딜 그리 급히 가십니까?”
나병 환자가 루페르트를 향해 손짓했다.
“설마 우리 같은 존재를 전에 만나 보신 건가?”
분더발트가 장교들에게 명했다.
총을 든 병사들이 일렬로 서서 총구를 나병 환자에게 거뒀다.
자신을 노린 수많은 총구 앞에서도 나병 환자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이게 황제의 답인가?”
수많은 종들이 움직이며 경박하게 울렸다.
“쏴라!”
장교가 구호를 내리자 십여 정의 총이 하얀 연기와 굉음을 내뿜으며 총탄을 흩뿌렸다.
모두가 사내의 죽음을 예상한 순간 검은 그림자가 사내와 병사 사이에 뛰어들었다.
병사들은 의아한 눈으로 사내를 막아선 사람의 정체를 눈으로 확인했다.
아까 궁전 밖으로 나왔던 하인과 귀족 여성이다.
옷차림에서 말해 주듯 전혀 접점이 없는 듯한 두 사람이 마치 방패처럼 흰옷의 사내를 막아선 채 그를 대신해 총탄을 몸으로 받은 것이다.
귀족 여성이 입은 드레스에 핏물이 꽃처럼 피어올랐다.
“뭐, 뭐야!?”
“오, 맙소사! 호라신이시여!”
병사들이 총기를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나병 환자를 대신해 총탄을 맞은 여성은 비명 하나 지르지 않았고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똑바로 서서 나병 환자 옆으로 움직이다 푹 고꾸라졌다.
“하하하!”
루페르트 앞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광기에 들린 그 웃음은 방금 귀족 여성이 보여줬던 기괴한 장면과 더불어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 오싹함을 느끼게 충분한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선제후가 루페르트를 올려다보았다.
“황제여. 아니, 하켄하임의 촌놈 루페르트 가우저여.”
기병들이 칼을 뽑고 루페르트와 선제후 사이를 막아섰다.
루페르트는 번쩍이는 투구를 쓴 기병들 너머로 미소 짓는 선제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내가 왜 너 같은 작은 놈의 장난질에 반응하지 않은 줄 아나?”
“……제국 성인과 손잡은 건가?”
루페르트가 엄숙하게 물었고 선제후는 광소를 터뜨렸다.
그 광소에 루페르트의 탄 말이 동요를 일으키며 위아래로 혼잡하게 날뛰었다.
“촌놈 주제에 제국 성인을 알고 있다니. 에디지우스의 말이 진짜인 모양이군.”
“에디지우스?”
선제후가 고개를 끄덕이며 유령처럼 서 있는 흰옷의 사내를 돌아보았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
흰옷의 사내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지팡이를 가볍게 흔들었다.
“제국 성인이 나와 함께한다.”
“장군!”
루페르트가 두려워하는 말을 진정시키며 분더발트에게 명했다.
“선제후를 처형해라!”
“폐하?”
“황제의 명령이다.”
“황제께서 명하신다면.”
분더발트가 친히 병사들에게 명했다.
“사격 준비!”
수많은 총구가 선제후를 겨눴다.
선제후는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에디지우스에게 향해 그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마치 쏴 볼 테면 쏴 보라는 표정.
장교의 구령이 떨어지며 수십 개의 총탄이 선제후와 에디지우스를 향했다.
그런데 같은 일이 벌어졌다.
또 다른 검은 그림자가 믿기 어려운 속도로 달려 나가 선제후와 에디지우스를 감싼 것이다.
악사와 장교, 귀족과 상인, 주방장과 병사.
이번에도 전혀 접점이 없는 사람들이 방패를 자처하여 둘을 감쌌다.
“마리.”
루페르트가 마를로네에게 물었다.
“저 인간들 몸에 뭐가 보이지?”
마를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에리히가 생각나네요.”
“네가 데려온 소년 말인가?”
“네, 셀 수 없는 죽음이 보이네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였고 곧 엄숙한 목소리로 명했다.
“궁전에서 나온 모든 이를 죽여라. 그들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불경한 이단이며 혐오이며 제국의 적이다.”
황제의 명령이다.
허수아비 황제가 아닌 진정한 황제의.
저마다 저항감과 다른 생각은 가지고 있겠지만, 병사들은 기꺼이 황제의 명을 따랐다.
화승총이 불을 뿜었고, 기병들이 군중들 사이를 휩쓸고 지나가며 죽음의 칼날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시체가 쌓였고 궁전 앞은 피바다가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다.
특히 전장의 경험이 풍부하고 학살을 저질러 본 노병들의 얼굴에 먼저 두려움이 나타났다.
“뭐, 뭐야. 이것들.”
비명도 공포도 없다.
사람을 죽이는 기분이 조금도 들지 않는다.
살아 있는 인형을 벤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그러나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에디지우스가 종 달린 지팡이를 흔들며 광소를 터뜨렸다.
“가라, 나의 종들아. 가서 가짜 황제를 잡아라. 나머지는 필요 없다! 모두 죽여라!”
그가 명하자 멍하니 죽임을 당하던 자들이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도처에서 총성과 날 선 비명이 울려 퍼졌다.
무수한 시체가 바닥에 널브러지며 핏물이 바닥을 적셨다.
황제군의 피해는 전무했으나, 황제군의 진영은 뒤로 밀리고 있었다.
공포도 고통도 모르는 인간들에게 정신으로 압도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공포는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아비규환 속에서 마를로네는 각막을 뒤덮을 정도로 짙게 드리운 검은 얼룩이 한 점으로 모여드는 걸 발견했다.
혼절할 정도로 끔찍한 죽음의 악취가 인간들의 방벽 너머에서 풍겨 왔다.
얼룩을 지우고 깨끗한 시야로 전방을 주시했다.
“아.”
마를로네가 뒷걸음질 쳤다.
그녀의 몸은 누군가의 몸에 부딪혔다.
“뭐가 보이나?”
지겔슈타트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앞으로 밀며 물었다.
마를로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괴물.”
산더미처럼 쌓인 시체 안에서 불그무레한 것들이 기어 나왔다.
이빨이 있는 벌레들.
하나의 문명을 멸망시킨 미네아의 붉은 벌레들이다.
그것들이 하나로 뭉치며 전승되지 않은 진정한 악몽을 수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현세에 재현하려 한다.
한곳에 모인 벌레들이 서로를 깨물었고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자 수천, 아니 수만 마리에 달하는 벌레들이 사방에서 급류처럼 모여들며 거대한 구체를 이루었다.
곧 제국인들은 볼 수 있었다.
시쳇더미를 헤집고 일어나는 거대한 붉은 구체를.
병사들의 입에서 헛소리와 비명이 튀어나왔다.
일부는 무기를 던지고 달아났고 일부는 끝없이 불어나는 구체를 보며 헛소리를 내뱉었다.
“저, 저걸 어떻게 하라고……!!”
고참 하사관의 말만큼 병사들의 심정을 제대로 대변하는 것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늘진 골목, 검은 머리칼을 지닌 소녀가 현세에 나타난 악몽을 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냥 자연사하게 두는 게 나았으려나. 저런 귀찮은 걸 꺼내 오다니.”
그 소녀, 리프니에는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폐, 폐하!”
분더발트가 사색이 된 얼굴로 루페르트를 돌아보았다.
분더발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황제의 얼굴엔 일말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대리 결투 당시, 챔피언이 처참하게 밀리는 가운데서도 터럭만큼의 감정 변화도 보여 주지 않은 루페르트의 굵은 신경에 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침착을 유지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저토록 젊은 나이에 저렇게 심지가 굳다니!’
분더발트의 생각은 일부만 맞았다.
루페르트는 이 상황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다.
‘역시 이런 수를 남겨 둔 건가. 그래서 만슈타인에게 선수를 뺏겼을 때 가만히 있었던 것이군.’
[ 루페르트 가우저. ]
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페르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여신님.”
옆에 분더발트가 있지만 거리낄 게 없다.
이미 그의 손엔 소라고둥이 들려 있으니까.
“장군.”
“폐하?!”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는 장군을 향해 루페르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수고했네. 아무래도 지금부터는 내가 나서야 할 때인 거 같아.”
모두가 돌아보는 가운데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불었다.
청명한 소리가 지옥도 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