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26. 성 에디지우스 (1)
장미의 저택.
대황후 안젤리나가 말년을 보낸 곳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다.
마지막 주인인 안젤리나의 시녀가 실종된 이후로 이 저택은 빈집이 되었다.
하얀 보를 씌운 가구로 가득 찬 실내의 풍경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섬뜩한 별세계를 연상시켰다.
먼지와 빛줄기를 뚫고 한 사내가 저택의 뒤편으로 돌아갔다.
“…….”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안드리아의 루돌프.
철혈대제라는 이명을 가졌던 과거의 황제가 저택을 찾은 것이다.
저택 안은 비워진 상태라 소수의 관리인 이외엔 아무도 지키지 않았다.
설령 그들이 있었더라도 루돌프를 막을 수 있는 건 아무도 없었겠지만.
저택 뒤뜰에 조촐한 비석이 세워진 묘가 보인다.
그 누구도 멈출 수 없을 것 같던 루돌프의 발걸음이 멈췄다.
묘지 위에 누군가 서 있다.
검은 코트를 걸치고 높은 모자를 쓰고 등을 돌린 채 서 있는 거구의 사내가.
루돌프는 그 사내를 뚫어지게 쳐다보다 미련 없이 돌아서서 저택을 떠났다.
그것은 굽은 허리임에도 3미터에 가까운 거체, 기이할 정도로 긴 팔과 거대했던 발을 가지고 있었다.
인간의 복장을 하고 있지만,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것은 그림자가 없었다.
“……리프니에.”
심해보다 깊은 분노를 담아 루돌프가 낮게 읊조렸다.
* * *
점점 커지는 황제의 군대 앞에서 바이엔은 항전 의지를 잃었다.
모든 비난의 화살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에게 쏠렸다.
“선제후는 무능하고 아무런 비전도 없습니다. 그는 단지 억지를 부리기 위해 우리를 반역자로 만들려 합니다. 우리가 비록 법적으로 선제후의 신민이나 폐하의 선처에 고마움을 느끼긴커녕 은혜로 원수로 갚은 제국의 적을 따를 의무는 없습니다. 우리는 선제후의 신민 이전에 제국인이니까요.”
피를 토하는 듯한 사내의 말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회귀 전의 자신을 떠올렸다.
‘인기를 잃은 군주의 말로는 한결같군.’
인기가 군주를 만들어 주는 건 아니지만 인기를 잃은 군주는 정상적인 활동을 하기 어렵다.
모든 행동이 비난의 대상이 되고, 거의 모든 영역에 강한 저항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아무리 황제의 권한이 절대적이라고 하더라도 실제 그 일을 수행하는 건 평범한 사람이다.
평소의 반감이 쌓이면 황제조차 피부로 느낄 정도로 국정 수행에 악영향이 간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아마도 과거의 루페르트보다 상황이 좋지 않을 것이다
무능한 꼭두각시 황제라고 하나 정당하게 선출된 루페르트와 달리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제국의 반역자니까.
누가 반역자의, 그것도 힘도 비전도 없는 신민을 자처하겠는가?
그가 버림을 받는 건 시간문제다.
“포위를 시작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이 모양인 걸 보니 바이엔도 끝난 모양입니다.”
분더발트가 연기가 피어오르는 성벽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이 전쟁은 폐하의 승리로 끝날 것으로 보입니다.”
분더발트의 시선은 만슈타인을 향했다.
만슈타인은 분더발트와 눈이 마주치자 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보며 분더발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서운 남자다. 하지만 동시에 극도로 위험한 자다.’
부관으로서 만슈타인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는 것 외엔 늘 예의 바르고 정성을 다하고 낮은 위치에서 하나하나 배워 나가는 썩 괜찮은 군인이었다.
황제를 등에 업은 것이 명백함에도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뒷배를 과시하거나 암시하려 들지도 않았다.
한 번은 분더발트의 부하가 면전에서 모욕에 가까운 말을 쏟아 냈지만, 만슈타인은 화를 내기는커녕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며 자신이 먼저 사과를 했었다.
그걸 본 분더발트는 만슈타인의 사람됨이 꽤 선한 쪽일 것이라 지레짐작했다.
그러나 렌타이어마르크에서 그가 보여 준 모습은 선량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자신이 앞장서서 채찍을 휘두르거나 폭언을 가하는 것이 아닌 조직을 이용해 렌타이어마르크라는 사회 그 자체에 체계적인 폭력을 휘둘렀다.
지금 만슈타인은 예의 바르고 쾌활한 신하지만 그가 힘을 얻는다면?
저 속을 알 수 없는 남자는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를 것인가?
한 가지 확실한 건 만슈타인이 수행한 전쟁은 지금까지 분더발트가 아는 전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 전쟁의 형태가 어떻게 발산될지는 분더발트는 알지 못한다.
분더발트는 황제를 보았다.
‘과연 황제 폐하는 저 속을 알 수 없는 사내를 잘 다룰 수 있을까?’
제대로 다룰 수만 있다면 만슈타인은 황제 최고의 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면 어쩌면 그 검은 황제 자신을 찌르는 시해의 도구가 되리라.
분더발트는 이 감상을 황제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에게도 감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 * *
바이엔의 북쪽 성문이 열렸다.
수비병의 방관 속에서 분더발트 연대를 필두로 제국군이 줄지어 도시 안으로 입성했다.
선두에 선 분더발트가 손짓했다.
매복도 없고 함정도 아니다.
렌타이어마르크를 상징하는 기도하는 손이 그려진 깃발이 내려지고, 창과 방패를 들고 정면을 응시하는 초대 황제의 모습이 그려진 황제의 깃발이 걸렸다.
지겔슈타트를 비롯한 최정예 전투원의 삼엄한 호위를 받으며 루페르트는 백마를 탄 채 병사들과 함께 바이엔에 입성했다.
도시 안에서는 반가운 얼굴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스 징펠만이다.
그는 안면이 있는 지겔슈타트와 마를로네에게 눈인사를 한 후 루페르트에게 다가왔다.
“폐하.”
“징펠만 총사.”
“먼저 승전을 축하드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나, 드려야 할 말씀이 있습니다.”
루페르트는 한스 징펠만에게 말 한 필을 내주었다.
“그래, 말씀하시오.”
말머리를 나란히 한 한스 징펠만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뭔가 불길합니다.”
“불길하다고?”
“이쪽이 적진 앞에서 군대를 모으고 도시를 포위하는 동안 선제후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모집한 병력이 도시 안에 있고 장비를 만들 상인과 물자가 있는데도 말입니다.”
“…….”
확실히 불길하다.
만슈타인의 계획이 기발한 것 맞지만, 너무 쉽게 일이 풀린 감이 있다.
실제로 분더발트와 만슈타인은 교통로를 막은 초기 렌타이어마르크의 반격에 극도로 신경을 곤두세웠다.
둘이 돌아가면서 쪽잠을 잘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그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성내 수비군을 이끌고 성문 밖으로 나와 이쪽을 방해했다면 만슈타인의 구상은 미완의 구상으로 그칠 확률이 높았다.
“더욱 이상한 점은 선제후 궁전의 움직임입니다.”
한스 징펠만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성내 잠입했던 첩자들의 기이한 보고를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포위가 지속된 두 달 동안, 궁전 안에 다수의 사람이 들어갔지만 나오는 사람이 이상할 정도로 적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정도로 차이가 나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거지?”
“100명이 들어갔다고 치면 2명 정도만이 나오는 수준입니다. 그마저도 정기 보고를 하러 간 군인과 식료품을 공급하는 상인들이 전부라고 합니다.”
루페르트는 광장에 들어섰다.
멀리 시계탑이 보이는 관청 너머로 음울하게 서 있는 선제후의 궁전이 눈에 들어왔다.
루페르트의 시선을 주변을 둘러싼 바이엔의 시민들을 향했다.
일부가 손을 들어 이쪽을 환호하고 있지만, 대부분은 점령당한 도시의 전형적인 우울한 무표정과 걱정과 두려움이 반반 섞인 눈으로 점령자들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
한스 징펠만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식료품을 공급하러 간 상인들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하더군요. 선제후 궁전 안에서는 사람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그야말로 죽음과 같은 정적이 궁전을 덮고 있다고요.”
순간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광장에 서 있던 이름 모를 소년과 눈이 마주쳤다.
황제의 시선이 닿자 소년은 허리를 숙였지만, 루페르트의 눈을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침상 위에 얼굴에 하얀 천을 덮은 채 죽어 있던 소년의 시체를 떠올렸다.
쟁반 위에 담긴 악취 나는 붉은 벌레 또한 떠올렸다.
루페르트가 물었다.
“제국 성인은?”
“선제후의 궁전 안에 있다는 소문이 퍼져 있습니다.”
“그런가.”
어쩌면 이 모든 일의 원흉은 한 괴물로부터 비롯됐는지도 모른다.
루페르트는 광장에서 군대를 대기시켰다.
“분더발트 장군.”
“네. 폐하.”
“선제후의 군대를 무장 해제시키고 광장에서 최대의 방비를 갖추고 대기하고 있게.”
“선제후의 궁전에 바로 들어가시지 않는 겁니까?”
“그의 죄를 당장이라도 묻고 싶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
“군대도 잃고 성벽을 잃은 그가 뭘 할 수 있을까요?”
“글쎄.”
루페르트는 말끝을 흐렸다.
‘어쩌면 그런 것이 필요 없을지도 모를지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반란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진압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루페르트가 생각하기에 이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 * *
“역시 똑똑하군. 똑똑해. 이번 황제는.”
온몸을 흰 천으로 감싼 사내가 종이 달린 철제 지팡이를 흔들며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냈다.
그 옆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권좌에 앉은 채 병든 눈으로 끝없이 펼쳐진 긴 복도를 노려보고 있었다.
루페르트의 첩자가 보고한 것처럼 선제후의 궁전 안은 소름 끼칠 정도의 정적에 잠겨 있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곳처럼.
“그대보다 유능한 건 확실하군.”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선제후는 말없이 항의를 담아 그 사내를 노려보았다.
“나병의 에디지우스.”
선제후의 입에서 불쾌한 음성이 악취와 함께 새어 나왔다.
“그대가 제국 성인인 것은 알고 있지만, 말은 삼가시게. 나는 렌타이어마르크계 황제의 혈통을 이어받은 제국의 선제후니까.”
“그래서 창칼 한 번 부딪치지 않고 전쟁에서 패한 건가?”
“내 장군이 그렇게 무능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눈동자는 기둥을 향했다.
기둥엔 말라비틀어져 미라처럼 변한 시체가 천 개의 못에 박힌 채 고정되어 있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그 친구가 운이 좋은 거야. 훌륭한 지휘관을 장군으로 뒀으니. 하긴 황제니까 그런 인재를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지. 제국의 모든 좋은 건 슈발츠마인 놈들이 가져가니까.”
“적진에서 적군이 될 장정을 자신의 병사로 모집하는 발상은 대단히 감명 깊었어. 내가 모시던 황제는 꿈도 못 꿀 정도의 재치와 지략이 엿보이더군.”
에디지우스가 말할 때마다 몸을 가린 흰 천에서 악취 나는 점액과 붉은 실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와 역겹게 꿈틀거렸다.
여간한 인간이라면 제대로 눈을 마주칠 수 없는 광경이지만 반쯤 눈이 먼 선제후는 웃으며 희끄무레하게 보이는 제국 성인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미소 지었다.
“그대는 초대 황제를 모시지 않았나? 그대가 제국 성인이 맞다면 말이지.”
에디지우스의 입 쪽에서 키득 소리가 났다.
“노예제는 머리가 나빴어. 생각을 해 보라고. 선제후. 룸 제국의 투기장에서 사람을 잡던 백정 같은 인간에게 무슨 가르침이 있었겠나? 글자도 못 읽는 인간인데.”
“그가 룸 제국을 무너뜨리지 않았나?”
“그건 그가 사람을 잘 뒀기 때문이지. 이를테면 나 같은.”
복도 너머에서 웅성이는 소리와 군홧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선제후의 입에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때가 왔군.”
“그래.”
“황제를 죽일 수 있겠나?”
선제후의 물음에 에디지우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황제 따위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다. 선제후.”
허옇게 뜬 그의 흰자 안엔 붉은 벌레 수십 마리가 혐오스럽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제국을 멸하는 자다.”
그가 손을 저었다.
죽음과 같은 정적에 휩싸인 복도의 기둥 뒤에서 사람들이 나타났다.
귀족, 군인, 시녀, 시종 저마다의 복식과 신분을 가진 그들은 분명 사람이었으나,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주검처럼 하얗게 질린 얼굴과 초점 없는 눈으로 허공을 미동도 하지 않고 응시하는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라기보다는 밀랍 인형에 가까웠다.
그들 중 숨을 쉬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