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25. 믿음 (3)
제국 원법전. 제국 헌법이라고 불리는 초대 황제 티그리트의 법전에 의하면 황제는 네 가지 경우에 한해 아래 선제후를 직접 토벌할 수 있다.
하나, 선제후가 황제와 그의 직할령에 위해를 가했을 때.
둘, 선제후가 제국을 벗어나 타국의 신하로 들어갔을 때.
셋, 선제후가 동료 선제후나 독립 군주를 이유 없이 침공하고 황제의 중재에 따르지 않을 때.
넷, 선제후가 이단 신앙에 빠졌다는 증거가 드러날 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이 중 네 번째 항목을 위반했다.
그것만으로 황제가 친히 벌을 내려도 무방하나, 한술 더 떠 그는 정면으로 루페르트에게 도전했다.
렌타이어마르크에 파견된 첩자들이 속속 현지의 사정을 보고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형식적인 명목은 렌타이어마르크의 수호라고 하지만 무엇으로부터의 수호인지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선제후는 렌타이어마르크와 인근 군주령은 물론이고 드라쿨레아, 부울, 팔크스 인접 외국에서도 병사를 끌어모으고 있습니다. 십수 명에 달하는 전쟁 무리에서 수백 명에 달하는 용병대가 속속 렌타이어마르크의 수도 바이엔으로 모여들고 있다고 합니다.”
“렌타이어마르크 경계 안에 동방 제국의 이교도 기병대, 악마 같은 초원 유목민까지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군대를 모집하고 있다.
루페르트는 즉시 조사관을 보냈다.
황제의 조사관이 사유를 묻자 선제후는 사신을 체포해 구금했다.
명백한 반역이다.
루페르트는 즉시 선제후들에게 사신을 보내는 한편 한 사내를 궁정에 불러들였다.
“분더발트입니다.”
“오랜만이오. 백작.”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에게 지휘봉을 내밀었다.
장군의 지휘봉이다.
분더발트가 지휘봉을 받아들고 의아한 얼굴로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이것은?”
“이번 반란군 토벌에 그대의 힘을 빌리겠소.”
엄밀히 말하면 분더발트가 맡을 일은 군대의 조직과 운영이다.
군대의 움직임과 방향은 루페르트, 아니 만슈타인이 결정한다.
루페르트는 그 자리에서 만슈타인을 분더발트에게 소개하며 자신이 직접 정벌에 참가할 것을 표명했다.
황제의 친정.
클라우데 2세의 치세에 황제의 친정은 흔하디흔한 일이었다.
클라우데 2세는 거의 모든 전투에 직접 나섰고, 결정적인 전투에서 언제나 승리를 거뒀다.
그에게 패배한 적들은 두려움을 담아 클라우데 2세에게 철혈의 황제라는 별명을 붙였다.
철혈대제라는 별칭은 그렇게 탄생했다.
이제 새로운 황제가 클라우데 2세의 본을 받아 친정에 나설 것이다.
선제후들은 즉각 응답했다.
전원 찬성.
그들은 한목소리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성토했다.
당연한 귀결이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황제를 배신한 자를 옹호하는 건, 명분도 없고 같은 반역자가 된다는 것과 진배없으니.
다만 실질적인 지원을 보내온 건 아카이아 대주교 하나뿐이었다.
그는 50만 탈러에 달하는 군자금을 보내왔다.
루페르트의 진정한 동맹이 누구인지 드러나는 대목이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그 금액을 군자금으로 쓸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선제후에게 공문을 보내는 시점부터 이미 렌타이어마르크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으니까.
놀라운 일이지만 황제의 휘하엔 불과 5천 명의 군사만이 있었다.
* * *
모든 계획은 만슈타인이라는 남자의 머리에서 나왔다.
잘생겼다기보다는 고집스럽고, 생각을 알기 어려운 모호한 관상의 소유자인 그는 루페르트와 분더발트 앞에서 자신의 구상을 이야기했다.
“중요한 건 시간입니다. 현재 동원할 수 있는 군대만으로 빠르게 선제후의 수도로 진격해야 합니다.”
분더발트는 난색을 표했다.
“지금 우리가 동원할 수 있는 건 내 연대와 소수의 기병대뿐이다. 나머지는 시간이 걸려. 황궁의 근위대를 빼내서 쓴다면 모르겠지만 과연 근위대가 협조를 할까?”
“당연히 안 하겠지요.”
“현재 우리가 가용할 수 있는 병사는 내 연대와 기병 대대 3개 남짓이다. 합치면 겨우 5천에 불과하다는 뜻이지. 황제 폐하가 친정을 하시는 데 겨우 5천 정도의 병력을 끌고 간다면 외국은 고사하고 선제후들의 웃음을 살 것이다.”
최소 3개 보병 연대와 그 절반의 기병, 10대의 중포는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분더발트가 생각하는 황제군의 최소한의 진용이었다.
‘5천 가지고 뭘 하라는 건지. 선제후를 친다는 말은 그 수도 바이엔을 친다는 말과 같은데, 겨우 5천으로 그 높은 성벽을 공략하려는 건가? 대포 하나조차 없이? 그보다 바이엔이 어떤 곳인지는 알기나 아나?’
바이엔은 150년 전, 동쪽의 이교도 대국 동방 제국이 이끄는 50만에 달하는 대군의 침입을 받았고, 버텨 냈다.
무패를 자랑하던 이교도의 군세는 바이엔의 성벽 아래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그런 곳을 겨우 5천으로 포위하고 공격을 한다?
분더발트의 눈에 비친 만슈타인은 마음에 안 드는 애송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오는 길에 소문을 듣자니 한 달 전만 해도 돈 주고 산 카렐리아 기병 대위가 경력의 전부인 애송이다.
왜 황제가 저런 얼치기에게 부관 자리를 맡겨 이런 자리에 데리고 왔는지부터가 의문이다.
그런 만슈타인이 야릇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그건 저쪽도 같은 사정 아닐까요?”
“무슨 소리지? 소령?”
“말 그대로입니다. 우리가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이 없다면 그건 렌타이어마르크 쪽도 마찬가지 아니겠냐 이 말씀입니다.”
그야말로 당돌한 발언.
분더발트가 생각하지 못한 관점이다.
솔직하게 말은 맞는 말이다.
군대의 모집이라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니까.
분더발트 연대를 예를 들자면 당장 전쟁이 없고 계약된 거래가 없다면 분더발트는 병사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일거리도 없는데 3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일개 연대장이 유지한다는 건 수지가 안 맞기 때문이다.
그건 다른 연대장도 마찬가지다.
전쟁이 없다면 연대장들은 연대의 뼈대가 되는 소수의 장교와 하사관 등 정예 인력만을 남겨 둔 채 일거리를 찾아 대륙 각지를 전전하며 왕과 군주들을 만나고 다닌다.
활약할 전쟁을 발견하고 만족스러운 계약이 체결되면, 그때 연대장들은 고향으로 돌려보낸 병사들을 다시 불러 모은다.
운이 좋다면 해고 전의 병사들 대부분이 오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병사들도 먹고살아야 하니 일거리를 찾아 그들 스스로 다른 전장에 떠나기도 하고, 아예 창을 놓고 고향에서 농사에 종사하기도 한다.
부족한 병력은 신병으로 채워야 한다.
훈련이 있을 것이고, 장비 또한 마련해야 한다.
한마디로 시간이 필요하다는 소리다.
분더발트 연대처럼 이미 완편된 상태에서 대기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모를까, 뼈대만 남은 연대가 전투력을 갖추려면 최소한 한 달에 달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확실히 렌타이어마르크 쪽도 당장 가용할 병력이 없기는 매한가지겠지. 거기는 기병 자원도 별로 없어서 우리처럼 한 번에 2천 기나 확보할 수도 없을 테니까.’
그러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분더발트가 퉁명스럽게 물었다.
“저쪽과 이쪽과는 조건이 같지 않아. 그쪽에서 간신히 여기저기서 긁어모아 3만 명 남짓 모을 때, 우리는 1선급 연대 여러 개를 포함해 정예 병력만 십만 명 이상을 모을 수 있어. 중포 여러 대를 포함한 포병은 물론이고.”
도시의 수준이 높으면 높을수록 징병의 규모와 질 또한 상승한다.
무기, 갑주, 옷, 장화, 화약 등 전쟁이 필요한 장비와 물자가 거기서 나오기 때문이다.
테타우는 제국 최고의 도시다.
최고 수준의 장인과 최대 규모의 공장이 밀집했고 강과 바다, 도로를 통해 대륙의 산물들이 앞다투어 모여든다.
그에 반해 렌타이어마르크의 수도 바이엔은 유서 깊은 요새 도시라고 하지만 테타우에 비하면 모자람이 있다.
분더발트는 계속해서 만슈타인을 공격했다.
“설령 그대 말이 맞다고 해도 겨우 5천으로 바이엔의 공략이 가능하다고 믿는 건가?”
이에 만슈타인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가면 방법이 보일 겁니다.”
분더발트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황제를 응시했다.
시종일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던 루페르트는 분더발트의 시선을 받자마자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책임지겠네.”
이것이 루페르트가 해야 할 일이다.
황제의 말에 분더발트는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렇게 해서 황제의 군대가 편성됐다.
1개 보병 연대, 보병 3천 명과 3개 기병 대대, 기병 2천 명으로 편성된 분견대 수준의 군대였다.
병사의 수는 턱없이 부족했지만, 황제의 정예들은 충실하게 갖춰졌다.
가장 먼저 달려온 건 한스 징펠만과 쌍둥이 도제였다.
“전쟁이라. 끔찍하지만 영광스러운 일이겠지요. 우리 불과 철의 형제단은 폐하의 군대와 함께할 것입니다.”
그들은 제국 수렵대로 30명으로 구성된 정찰대를 거느리고 있으며 황제의 군대 앞을 선행하며 군대의 눈과 귀가 되어 줄 것이다.
마법 대학에서는 그리운 인물을 보내왔다.
“격조했습니다. 황제 폐하.”
사각의 마법사 지겔슈타트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며 군대에 가담할 뜻을 내비친 것이다.
그야말로 천군만마와 같은 든든함이다.
그런데 이건 루페르트도 전혀 기대하지 않은 호재였다.
지겔슈타트가 신비로운 눈동자를 반짝이며 사정을 설명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고대의 마물을 거느리는 것이 알려진 이상, 마법 대학도 중립을 지킬 수만은 없게 되었습니다. 악마와 이단은 호라 교단의 이단 심문청의 관할이라고 하지만, 미네아의 붉은 벌레 같은 고대의 악마는 제국 그 자체를 뒤흔들 수 있는 존재. 응당 대학이 나서야 할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개인 호위는 마를로네가 맡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폐하. 저에게 일거리를 주셔서. 할아버지 몫까지 열심히 할게요.”
실력적인 측면으로는 못 미덥긴 하다.
일반인에겐 악마 같은 괴력을 발휘하지만, 조금이라도 강한 자가 나타나면 힘을 못 쓰는 모습을 몇 번이나 보여 줬으니.
하지만 루페르트는 그녀에게서 강한 행운의 기운을 느꼈다.
몇 번이고 루페르트의 목숨을 구한 건 물론이고, 가장 결정적인 국면에서 활약하기도 했으니까.
특히 판텔레온전에서 그녀는 자신이 왜 도펠죌트너인지 톡톡히 증명했다.
무엇보다 붉은 벌레를 발견한 장본인이 그녀 아니던가?
‘확실히 이 녀석에겐 운이 있어. 행운이 따라.’
행운의 마스코트로써도 나쁘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조부는 어때? 많이 나았나?”
“네. 일어서서 스스로 용변을 볼 정도로는 회복됐어요. 완치까지는 좀 걸리겠지만 말이죠.”
“그래.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하마.”
“저야말로 잘 부탁드릴게요.”
이쪽이 황제가 됐고 저쪽도 빨간 명찰을 떼긴 했지만, 관계는 딱히 변한 건 없다.
여전히 둘 사이엔 미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마를로네의 흐릿한 눈동자와 억지로 꾸민 미소를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웃었다.
‘정말이지 한결같은 녀석이라니까.’
루페르트의 지원군은 그만이 아니었다.
최고의, 가장 든든한,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장 염려되는 동행자가 나타났다.
“저도 데리고 가 주세요!”
그것은 바로 소녀로 화한 리프니에다.
* * *
황제의 처소, 미궁엔 금단의 방이라 불리는 절대 출입금지 영역이 있다.
청소, 정리, 심지어 화재 발생 시까지 어떠한 사유에도 출입이 금지되는 이 영역 앞에 어두운 로브를 걸친 건장한 사내가 도착했다.
“…….”
안드리아의 루돌프, 클라우데 2세, 그리고 철혈대제.
이 남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황제와 같은 비밀을 공유한다.
[ 들어오세요. ]
그는 여신 리프니에의 또 다른 사도다.
문 너머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펼쳐져 있었다.
루돌프는 주저 없이 어둠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문이 닫히고 태고의 정적이 그를 무겁게 감쌌다.
곧 어둠 속에서 환한 빛이 번지듯이 나오며 한 소녀의 모습을 드러냈다.
“오랜만이네요?”
소녀의 모습을 한 여신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서 오세요. 황제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