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24. 황제의 검 (3)
“관대한 처분에 감사드립니다. 폐하.”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조건 없이 석방했다.
그뿐만 아니다.
빼앗긴 선제후 직도 후임자 지정에 관한 권리도 모두 돌려주었다.
제국의 정치 판도는 제국 전체를 뒤흔들었던 대리 결투 이전으로 돌아왔다.
그 관대한 처분은 삽시간에 제국 전체로 퍼져 나갔고, 군주와 선제후들은 그것의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하기 위해 저마다의 셈법을 굴렸다.
“시골뜨기답지 않게 눈치는 있는 친구군.”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루페르트의 관대한 처분을 짧게 평했다.
호방하고 전투적이면서도 찰나의 통찰로 사람과 현상을 꿰뚫어 본다는 평가에 걸맞은 평가다.
“지나치게 타인을 의식한 판단이 아닐까? 선제후든 후임 결정권이든 하나만 돌려줘도 충분히 참작 가능한 처분이라고 생각했을 텐데. 젊은 황제라 그런지 얻어야 할 몫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군.”
트라이아 선제후 레벤호스트의 평가는 루페르트의 결정을 깎아내릴 뿐으로 자신의 우수함을 믿어 의심치 않는 오만함이 여지없이 묻어 나왔다.
“우리의 오랜 벗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복귀는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환영하는 바이나, 그의 행동에 경솔함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는 황제 폐하에게 큰 빚을 졌다.”
디터팔츠 선제후 막스 게오르크는 신교 선제후지만 제국의 국체와 헌법을 누구보다 존중하는 제국의 충신이다. 그는 루페르트의 행동에 논평을 하는 대신,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책임을 강조했다.
“…….”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는 이번 사안에 대해 아무런 평을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선제후, 유일한 성직 선제후이자 선제후 회의의 의장인 아카이아 대주교는 공적으로 무언가를 발설하는 대신 직접 루페르트를 찾았다.
“폐하.”
이제 그는 루페르트와 한배를 탄 몸이다.
비록 서로 원하는 꿍꿍이는 전혀 다르지만 말이다.
“선제후를 그렇게 쉽게 풀어 주는 건 그다지 유익한 판단은 아니라고 판단됩니다. 이미 일어난 일이니 되돌릴 순 없겠지만, 황제의 유약함은 두고두고 정적들에게 공격받게 될 것입니다.”
비록 황제 아래의 신하라고 하지만 제국에서 수뇌부에서 높은 연륜과 경험을 지닌 대주교는 루페르트에게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역시 전과는 다르군.’
루페르트가 아는 대주교는 속죄주의를 운운하며 시종일관 저자세로 일관할 것을 요구하던 극도의 자기보신자였다.
자기만 챙기는 인간이 자기 한 몸 건사 못하는 꼭두각시 황제를 돌볼 리 만무하다.
루페르트에게 충고는커녕 찾아온 일도 손에 꼽는다.
그가 명색이 선제후 회의의 의장으로 한 일은 자기가 죽기 전까지 내전과 전쟁을 미룬 게 전부였다.
빨리 죽었기에 망정이지 오래 살았다면 무슨 일이 일어났을지 생각도 하기 싫다.
그런데 이번 회귀에서는 오래 살 것 같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황제의 권위는 행동에서 나오는 법입니다. 유약한 행동을 하면 할수록 권위는 떨어지는 법이지요.”
저 반짝이고 약동하는 살아 있는 눈동자는 과거엔 결코 볼 수 없었던 속성이었으니.
“선제께서는 권위를 세우기 위해 온갖 노고를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괜히 수십 번에 이르는 친정(親征)을 하신 게 아닌 거지요.”
“선제께선 직접 전쟁을 지휘하셨습니까?”
“아니요. 전쟁 지휘는 늘 대리 장군에게 맡겼습니다. 피콜로미니, 프란시 같은 지금은 무덤에 들어간 명장들이 선제에게 직접 원수봉을 하사받아 제국의 군대를 이끌었죠.”
“그건 의외군요.”
루페르트가 들은 것과는 다르다.
그가 아는 철혈대제는 전쟁에서도 늘 진두에서 지휘하며 어떤 불리한 싸움도 승리로 이끄는 위대한 명장이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융커스 베샤문트의 반란군을 상대로 추태를 보이고 정치적 생명이 끝나 버린 루페르트에게 철혈대제의 군사적 재능은 선망할 수밖에 없는 하늘의 축복이었다.
그런데 대주교는 그가 아는 것과 전혀 다른 사실을 이야기했다.
‘피콜로미니? 프란시? 그다지 듣지 못한 이름 같은데.’
의문이 가긴 하지만 철혈대제의 시대를 살아간 대주교에게 그때의 일을 문제 삼는 게 우스운 모양새긴 하다.
“……최소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석방할 때 최소한 종교에 관해서 입장을 명확하게 하고 우리 쪽으로 묶어 놔야 했습니다.”
대주교의 훈계는 이제 다음 영역으로 향하고 있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루페르트도 할 말이 있다.
루페르트는 독수리궁에서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베르너에게 했던 행동을 대주교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늙고 전성기가 지나고 무기력한 인물이라고 하나 철혈대제가 총애한 신하다.
대주교는 한 번에 맥락을 짚고 표정을 바꿨다.
“……그가 그런 식의 협박을 해 왔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폐하의 생각도 이해가 가는군요.”
“복안이 있습니다.”
대주교의 얼굴을 살피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조금씩 뛰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왜 흥분하지 않겠는가.
늘 꼭두각시에 머물렀던 황제가 이제는 선제후와 대등하게 이야기를 하는 건 물론이고, 그의 생각마저 바꿔 놓으려 하고 있으니.
별것 아닌지도 모른다.
단순한 개인적인 충족감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하나하나의 경험은 루페르트의 자산이 되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흉중에 담아 왔던 속내를 쏟아 냈다.
“결국은 전쟁이 해결책일 겁니다.”
“전쟁?”
대주교의 얼굴에 강한 반감이 드러났다.
“내전은 아닐 겁니다. 반역자에 대한 토벌이겠지요.”
“그가 반역을 일으킬 거라 봅니까?”
“저는 그렇게 봅니다.”
소라고둥을 매만지며 루페르트가 말했다.
사실 일어나지 않아도 관계없다.
시간을 돌리면 그만이니.
회귀 원점은 이미 황제가 된 시점부터 재조정했다.
시간의 책갈피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석방 직전으로 설정했다.
앞으로 무슨 일어나건 루페르트는 대응할 수 있다.
그 믿음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나타났다.
그 과할 정도의 자신감에 대주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린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가능성 없는 이야기는 아니군요. 아니, 상당한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떻게 보십니까? 혹 그가 반역을 일으킨다면 다른 선제후들이 그를 도울 것 같습니까?”
“돕지 못할 겁니다.”
대주교는 딱 잘라 말했다.
“한 번의 실수도 용서받기 어려운데, 관대한 처분으로 용서를 받은 그가 두 번이나 잘못을 저지른다면 프리드리히의 친우는커녕 가족조차 그를 돕지 못할 겁니다.”
루페르트는 속으로 한 사내의 얼굴을 그렸다.
‘요하네스. 역시 그 친구는 물건이군.’
확실히 요하네스가 뛰어난 인물인 건 맞지만, 대주교에 비하면 아직 막 자라나는 새싹에 불과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렌타이어마르크는 오랜 기간 동방 제국의 침략에 맞선 제국의 방패였습니다. 작은 촌락조차 성벽과 저장고를 갖추고 있지요. 전 영지가 하나의 요새라고 할까요. 물론 그 방어력은 동에서 서로 향하는 공격에 치중되어 있지만, 주요 도시의 방어력은 저지대 연맹의 요새 못지않을 겁니다. 이를 공략하려면 훌륭한 장군이 필요할 겁니다.”
대주교는 단지 가능성을 점치는 것만이 아닌, 실제적인 실천 방안을 자연스럽게 고려하니까.
머리로만 생각한 자와 수많은 경험을 쌓은 자의 차이라고 할까.
“고어문트 선제후 아래 훌륭한 장군이 있다고 들었으나, 아마 그는 자신의 장군을 내주지 않겠지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겨 있던 주름 진 눈이 비로소 루페르트를 향했다.
“전쟁에 대비하는 건 좋은 자세지만, 전쟁을 오래 끌면 안 됩니다. 카렐리아와 슈발츠마인이 아무리 부유한 지방이라고 해도, 전쟁은 모든 걸 집어삼키는 괴물입니다. 전쟁이 길어지면 얼마나 많은 부가 있건 순식간에 사라질 겁니다.”
‘그건 그렇겠지.’
전쟁이 얼마나 많은 돈을 필요로 하는지는 루페르트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모집 비용도 만만치 않지만, 군대를 유지하는 비용도 무시무시하다.
급료를 받지 못한 군대는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한 마리 야수가 변한다.
“게다가 폐하께서 신경 쓰셔야 할 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하나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반역에 대비하신다면 빠르게 끝내야 할 겁니다.”
대주교의 조언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 늙은이. 이런 식견을 가지고도 속죄주의 운운하며 아카이아에 틀어박혀 죽기만을 기다렸던 건가.’
솔직한 감정은 배신감이리라.
그가 진퇴양난에 빠져 있고, 제국이 위기에 빠진 걸 알고서도 모른 척했던 과거 대주교의 행동이 말이다.
“벌써 이런 시간이군요.”
대주교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단히 송구스러우나 제가 집전해야 할 미사가 있습니다.”
“괜찮습니다. 대주교님. 오히려 시간을 내주셔 귀한 말씀을 듣게 되어 크나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적당한 인사치레가 끝난 후 대주교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빙해 사본은 여전히 해석 중에 있습니다. 계속해서 성과가 나오고 있지요.”
대주교의 달라진 눈에 강한 빛이 번득였다.
그걸 본 루페르트는 대주교의 생명력의 원천이 무엇인지 확실히 이해했다.
‘그 빙해 사본을 이용한 종교 개혁이 이 늙은이를 지탱하는 새로운 불꽃인 모양이군.’
“진척이 있으면 다시 이 건에 관해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대주교는 집무실을 나섰다.
홀로 남은 루페르트는 대주교의 조언을 곰곰이 곱씹었다.
“장군이라…….”
장군은 군대를 조직하고 지휘하며 전쟁을 수행하는 전쟁 전문가들이다.
병사 없이 군대를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장군 없이는 전쟁 수행이 불가능하다.
적게는 수천 명, 많게는 수만 명에 달하는 거대한 무력 집단을 하나로 통솔하고 관리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지식과 경험이 필요한 것이니.
무엇보다 장군은 전장에서 살아가는 자가 올라갈 수 있는 현실적으로 가장 높은 자리다.
수많은 전장에서 경험을 쌓고 살아남은 자 중에 가장 뛰어난 자들이 장군직에 오를 수 있다.
전쟁은 그런 뛰어나고 검증된 자들이 치르는 결투다.
제국을, 때로는 대륙 그 자체를 결투장으로 하는.
“슬슬 장군 쪽도 고려할 때가 왔지.”
이미 점찍은 인물은 있다.
그 이름은 루벤 크로이처.
제국 말기 루페르트를 보위하던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다.
전장에서 한눈을 잃어 늘 검은 안대를 찬 그 늙고 고집스러운 군인은 루페르트를 잘 대해 준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언젠가 황제가 되면 그를 중히 쓰리라 생각했었다.
물론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황제 폐하께서 저를 부르셨다고요? 하하. 일개 연대장에 불과한 제게 뭔 특별한 게 있어서…….”
황제가 되면서 집무실 앞에 작은 대기실을 만들었다.
대기실에 걸린 거울은 일견 평범한 거울로 보이지만, 사실 그 너머엔 거울을 통해 대기실을 볼 수 있는 비밀의 공간이 있다.
그 안에서 루페르트는 자유롭게 자신이 쓰고자 하는 인물의 됨됨이를 평가할 수 있다.
바로 통찰의 만화경을 통해서 말이다.
루페르트는 실로 오랜만에 재회한 늙은 군인을 감회에 찬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때는 좀 더 젊었네. 루벤 크로이쳐.’
늘 생각했었다.
이 충성스러운 사내에게 언젠가 꼭 좋은 자리를 주리라고.
장군 중의 장군, 원수의 상징인 원수봉을 맡길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병사들과 다른 장군들이 루벤 크로이쳐를 비난하던 장면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일개 연대장 감이 장군이 됐으니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이다.”
“천 년을 버텨 온 테타우의 성벽이 한 달도 못 견디고 함락당하는 게 말이나 되나?”
“그 애꾸는 머리가 나쁘다고! 아니, 두개골 안에 뇌 대신 돌을 넣어 다니는 인간이라고!”
성벽이 넘어가고 융커스 베샤문트의 군대가 물밀 듯이 도시 안으로 밀려 들어올 때 나온 이야기다.
어느 정도 감정이 섞였겠지만, 어찌 보면 꾸며 내지 않은 진심일지도 모른다는 소리다.
‘루벤 크로이쳐. 그대의 충심은 이해하나 그대의 능력을 보지 않을 수가 없어.’
의자 위에 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노군인을 바라보던 루페르트의 왼쪽 눈동자에 불경한 녹색 빛이 일렁거렸다.
‘루벤 크로이쳐. 그대의 진가를 보여 주게.’
곧 결과가 나타났다.
- 완고한 연대장 B+
연대장으로서의 평가는 나쁘지 않다.
하지만 장군으로는 어떨까.
- 군대 분쇄기 D+
‘구, 군대 분쇄기라고!?’
적어도 적의 군대를 분쇄하는 건 아닌 것으로 보인다.
적의 군대를 분쇄하는 자라면 더 훌륭한 등급을 받았을 터이니.
아니나 다를까, 소라고둥이 움직이며 루페르트의 생각을 뒷받침했다.
[ 어머, 저 사람. 장군으로는 못 쓰겠네요. ]
“…….”
루벤 크로이쳐, 탈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