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23. 대관식 (3)
어머니의 기억은 많지 않다.
아버지의 기억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총천연색으로 보기 시작할 무렵부터 부모는 이미 기억 저편에만 존재하는 희미한 존재였다.
그런 루페르트에게 안젤리나라는 존재는 아마도 부모에 가까웠던 모양이다.
이제야 알았다.
저 절반만 남은 채 갉아 먹히는, 눈을 부릅뜬 시체의 얼굴을 보고서야.
‘아, 안 돼……!’
처참한 시체의 얼굴 위로 짧지만, 잊을 수 없던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메헨부르그, 리히트보덴, 처음으로 그에게 같은 편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한 편지, 선제후 쟁탈전, 그리고 과거의 부군과 함께 있던 마지막 모습까지.
‘아, 안젤리나 님……. 안젤리나 님…….’
그의 감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프니에가 즐거워하며 말했다.
“마침 잘 왔어요. 아무도 못 오게 막아 주세요. 시녀 하나가 눈치 없이 기웃거리더라고요.”
리프니에가 시체에 고개를 처박았다.
머리카락과 뒷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루페르트는 수천 개의 돌기가 왕복운동을 하며 살을 갉아 먹는 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리프니에가 안젤리나를 먹고 있다.
그녀가 안젤리나를 먹을 때마다 아직 조각상으로 남은 미완의 부분에 살아 있는 자의 생기가 나타났다.
리프니에가 안젤리나를 갉아 먹을 때마다 흔들리는 시체와 죽은 생선처럼 광채 없는 안젤리나의 눈동자와 반쯤 파먹힌 얼굴을 보며 루페르트는 느꼈다.
마음이라는 테두리가 무자비하게 일그러지고, 그 형태를 잃어 가는 것을.
“어억!”
루페르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왜 그러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더 심한 것도 보았을 텐데.”
리프니에가 고개를 들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상관은 소녀의 그것이지만 하관은 고기와 뼈, 기름이 낀 수천 개의 왕복하는 돌기다.
돌기에 묻은 알 수 없는 핑크빛 점액을 보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리프니에가 그 모습을 보더니 불쑥 말했다.
“혹시 제가 역겹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여, 여신님. 아, 아닙니다!”
“뭐, 당신 같은 인간의 눈엔 그렇게 비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말이죠. 뭐가 다르죠? 어차피 땅 밑에 있어 봐야 구더기나 송장벌레, 아니면 그보다 더 작은 미물한테 파먹힐 텐데요? 그런 거한테 먹히느니 저에게 먹혀 조금이라도 이 세상에 도움 되는 게 낫지 않나요?”
“…….”
“거기다 제가 이걸 먹었기에 오늘 당신을 구해 줄 수 있었어요.”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반응을 요구하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지워지지 않는 반감을 느끼며 가까스로 대답했다.
“안젤리나 님의 시신에 그런 힘이…….”
“이 시체 자체엔 아무런 힘도 없어요. 다만 제가 닮고자 하는 모습을 구현하려면 원형이었던 그녀의 시체를 먹을 필요가 있었죠.”
“그럼 저주는……?”
루페르트가 안젤리나의 시체를 묘지에서 꺼내는데 동의한 건, 그녀에게 어둠의 저주가 깃들어 내세조차 방해받는다는 말을 들어서다.
“아? 저주요?”
리프니에의 입이 인간의 입으로 돌아왔다.
돌기에 붙어 있던 핑크빛의 점액은 은은하게 미소 지은 입가에 묻어 있었다.
리프니에는 손가락으로 그것을 닦아 내 혀로 날름거리고는 허공을 빤히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아, 깜빡했네요. 그 사막 민족들이 워낙에 꾸물거려서 말이죠. 시키지도 않은 사람을 죽이질 않나.”
“사람이 죽었다고요?”
“하녀 한 명이 죽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루페르트 가우저. 그 사막 민족들은 감쪽같이 일을 처리했으니까요.”
“…….”
다르다.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 명백한 불일치를 자각하기 시작한 시점이.
“거기다가 제가 이 몸을 만들고 움직이는 데 얼마나 고생한 줄 아세요? 당신 혼자 남쪽에서 고생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저도 나름 엄청나게 수고를 했다고요! 그 엉터리 조각사가 제대로 마감하지 않은 부분이 또 얼마나 많던지! 변태라고 들었는데, 세상에 치마 아래를 조형하지 않고 통짜로 해 놓았지 뭔가요?”
‘여신님은 이 조각상을 움직이려고 따라오지 않으신 건가…….’
순간 루돌프의 한마디가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걸 괴물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뭘 괴물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쩌면 그는 비슷한 일을 몇 번이나 경험한 건 아닐까.
혼란 속에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루페르트 가우저. 내일 황제가 되죠?”
“네, 그렇습니다.”
“드디어 황제가 됐네요! 정말이지 너무너무 먼 길이었죠? 앞으로가 더 험난하겠지만 제가 새로운 육체를 얻었으니 당신을 더 잘 보조할 수 있을 거예요!”
리프니에가 화사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루페르트는 잠시 주저했다.
“?”
리프니에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루페르트는 리프니에의 불쾌감을 읽고 다급히 변명했다.
“여신님. 그렇다면 이 소라고둥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건 계속 걸고 계세요. 그건 저와 당신을 잇는 실타래 그 자체니까요.”
루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 여신의 손을 잡았다.
여신의 손은 빛조차 들어오지 못한다는 심해처럼 시리고 차가웠다.
* * *
“…….”
곧 대관식이 시작될 것이다.
루페르트는 언제나 입던 검은 톤의 단조로운 제복 대신 자줏빛으로 물든 황제의 옷을 입고 있었다.
황궁의 복도는 대관식을 준비하는 시종과 하녀의 행렬로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데 곳곳에 근위대 병사들이 빈틈없이 들어서서 좁은 복도를 더 좁게 만들었다.
“그럼 대관식 때 뵙겠습니다.”
베르너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나가기 전 그는 미소를 머금으며 한마디 덧붙였다.
“황제 폐하.”
그렇다.
곧 루페르트는 제국의 황제가 된다.
회귀의 분기점이라고 할까.
목적은 달성했다.
꼭두각시가 아닌 명성과 힘을 거머쥐고 차례로 단계를 밟아 가며 이 자리에 올랐다.
누구도 감히 루페르트는 꼭두각시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미 선제후 중 하나는 연금 상태이고, 다른 하나는 루페르트의 동맹이 되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과거와는 달리 루페르트는 진정한 황제로서 제국을 움직일 것이다.
그가 바란 미래다.
그러나 루페르트의 마음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여신님.’
리프니에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사람을 먹다니.
그것도 안젤리나를 먹다니.
그 와중에 이루어진 대화도 실망스러웠다.
차이를 느꼈다.
그녀와 자신이 같지 않다는.
인간과 신이 같을 순 없겠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너무나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무엇보다 리프니에에게 먹히며 들썩거리던 안젤리나의 시체, 밤새 들어야 했던 스산한 소리는 아마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내가 잘하고 있는 게 맞는 걸까.’
뭔가 어긋난 느낌이다.
분명 제국을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이 방향이 맞는 걸까.
피로와 함께 진한 근심이 젊은 황제의 얼굴에 드러났다.
“…….”
앞으로 이런 일이 얼마나 일어날 것인가.
또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버틸 수 있을까?
사람들은 루페르트가 철혈대제의 뒤를 이을 걸물이라고들 말하지만, 루페르트 본인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자신은 평범하다는 걸.
평범하지 않았다면 안젤리나의 시체를 보고 그렇게 충격을 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리프니에 말마따나 루페르트는 그보다 더 끔찍한 시체들도 숱하게 봤으니까.
마음이 약하니까 잘 깨지는 것이다.
루페르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의자에 기댄 채 힘없이 미끄러졌다.
‘내가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잘해 내긴 했지만…….’
자괴감이 극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정문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도펠죌트너. 네가 허가를 받았다는 건 알고 있지만 여긴 황제 폐하의 처소다. 어딜 감히 들어오려 하는 건가?”
‘도펠죌트너?’
루페르트는 문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냐?”
문이 열리고 근위대 장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도펠죌트너 하나가 폐하를 뵙기를 청합니다.”
누군지 말해도 알 것 같았다.
문 너머로 마를로네가 긴 머리카락을 드리운 채 이쪽을 무표정한 얼굴로 힐끗 쳐다보고 있었으니.
“아니, 무슨 무례한!”
“들라 하라.”
장교가 굳은 얼굴로 할버드를 치우자 마를로네가 방 안에 들어왔다.
루페르트는 문을 닫으라 명했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네. 알고 있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병실을 바꿔 달라고 부탁해서요. 정오까지 눈을 찌르는 햇빛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서요. 한사코 부탁했지만, 의사가 말을 들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요. 그래서…….”
조곤조곤하게 말하던 마를로네가 말을 멈추고 루페르트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폐하?”
“아직 전하야. 모두 폐하라고 부르고 있지만.”
“피곤해 보이시네요? 못 주무셨나요?”
“뭐, 그럴 일이 있었지.”
루페르트는 눈앞에 떠오르는 안젤리나의 부릅뜬 눈을 억지로 지워 버리기 위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젠장. 언제까지 절 지켜보실 겁니까.’
“걱정 있으세요?”
흐릿한 안개가 낀 듯한 눈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다.
루페르트는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시선을 정면으로 보았다.
늘 그렇지만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가 참 어렵다.
“걱정이라니.”
“어릴 때부터 남자하고만 지내서 남자 표정을 잘 읽는답니다.”
“남자?”
“할아버지요.”
실없는 소리에 루페르트는 피식 웃었지만 마를로네의 얼굴은 진지했다.
“지금 폐하의 얼굴은 할아버지가 고민할 때와 비슷해요. 말씀해 주세요. 털어놓으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고해 신부는 아니지만 나름 좋은 말도 많이 할 줄 안답니다.”
“그래?”
마음을 읽힌 것일까.
표정 관리라면 장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루페르트는 한숨을 내쉬며 열린 창가를 지친 눈으로 응시했다.
“문득 생각이 들었어. 내가 자격이 있는 황제인지 아닌지.”
“흐음.”
“넌 어떻게 생각하지?”
“좋은 말을 해 주고 싶긴 한데, 저는 정직해서요. 솔직히 말할게요. 폐하는 사람이 좋으신 거 같아요.”
“그래?”
루페르트의 얼굴에 희미한 실망이 스치고 지나갔다.
‘이런 여자아이 눈에도 평범하게 보인다는 건가.’
사람이 좋다는 건 평범하다는 뜻이다.
루돌프의 말대로 황제는 강철의 심장을 가져야 한다.
겨우 시체 한 구 보고 침울해져서 잠도 못 이룬 자신을 보면 그 말의 의미를 알 것 같다.
‘역시. 나는 자격 없는 황제일까?’
다시금 자괴감이 젊은 황제의 마음을 옭아매려 할 때였다.
마를로네가 말했다.
“하지만 전 그런 점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좋다는 말은 군주에겐 결점이란다.”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죠. 하지만 말이죠. 사람들은 다 알고 다 기억해요. 우리의 군주가 좋은 분인지 아닌지. 선량한 분인지 아니면 악독한 분인지. 다들 말을 안 하지만 모두 알고 있어요. 평소의 생활에서 피부로 느껴지는걸요.”
루페르트에게 눈을 떼지 않고 마를로네가 말했다.
그녀의 눈동자 속의 감정은 여전히 읽을 수 없었지만, 그녀가 진심을 말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철혈대제에 비하면…….”
“그분요? 그분은 평판이 안 좋아요.”
“그건 너와 네 할아버지가.”
“우리 불쌍한 일가 제외하고요. 젊은 사람은 잘 모르지만, 철혈대제의 시대를 산 나이 지긋한 사람이라면 치를 떨던데요? 그렇게 무섭고 끔찍한 시절은 두 번 다시 경험하기 싫다고요.”
“…….”
루페르트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애당초 근거도 불충분하고. 해서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를로네가 그런 루페르트를 빤히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그런 말이 있죠. 소문으로만 철혈대제를 접한 사람은 그를 명군이라고 하겠지만, 단 한 번이라도 철혈대제를 직접 상대한 사람이라면 다르게 말할 거라고요.”
루페르트가 마를로네를 응시했다.
자신도 모르게 동의했다.
철혈대제는 굉장한 사람이다.
실제로 그렇게 생각했고 철혈대제처럼 되는 것이 루페르트의 소망이었다.
하지만 직접 상대했던 철혈대제는 상상과는 달랐다.
‘……루돌프 님.’
바깥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린다.
시간이 된 모양이다.
마를로네는 문가를 힐끗 쳐다본 후 남은 말을 마저 이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폐하는 충분히 좋은 분이라는 거예요. 남들이 뭐라고 하든 간에 저는 폐하가 잘하실 거라고 믿고 있어요. 물론 저를 써 주시고 지금 병실을 바꿔 주시면 더 감사하겠지만 말이죠.”
루페르트는 피식 웃으며 마를로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다.
고맙고 대견했다.
가장 우울한 시점에 나타나 좋은 말로 위로해 주는 게.
여동생이 있다면 이런 기분일까.
그런데 마를로네는 평범한 여자가 아니다.
황제의 손길을 날렵한 몸놀림으로 사뿐하게 피했다.
“대담하시네요. 폐하.”
루페르트가 남작에서 선제후가 되고 선제후에서 황제가 되어도 마를로네는 마를로네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황제라면 당연히 대담해야지.”
용기가 생겼다.
세상을 다시 마주 볼 작은 용기가.
아울러 잊고 있던 불타는 제도의 풍경이 다시금 루페르트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렇다. 나는 황제다. 내가 나를 의심하면 어쩌겠단 말인가.’
문이 열리고 황제가 집무실을 나섰다.
* * *
아카이아 대주교를 필두로 다섯 명의 선제후가 황제의 권좌를 향해 나아가는 루페르트를 양옆에서 호위했다.
“불과 얼음, 역병과 전쟁에 굴하지 않는 힘을 주소서.”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양옆에 도열한 성직자들이 황제의 경구를 말했다.
“손에 쥔 검으로 신앙과 신자를 지키시고, 다른 손에 쥔 방패로 백성을 굽어살피소서.”
루페르트 가우저의 얼굴엔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
당당하게 걸어가는 황제 옆에서 또 다른 금언이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천 년의 제국을 이루소서.”
권좌는 눈앞에 있다.
무구한 소년들의 합창을 들으며 루페르트는 창과 방패를 들고 권좌에 앉았다.
녹슨 월계관이 머리에 씌워졌고, 뒤이어 갖은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하기 짝이 없는 왕관이 머리에 덧씌워졌다.
녹슨 월계관과 카렐리아의 왕관.
두 개의 관은 하나의 권능을 상징한다.
바로 제국의 황제를.
루페르트는 여전히 굳은 얼굴로 자신 앞에 부복한 모든 이를 보았다.
선제후, 군주, 귀족, 성직자, 마법사, 교수, 장군과 장교 여타 모든 자가 단 한 명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루페르트 가우저.
시간의 나선을 넘어 다시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엄숙하게 말했다.
“나는 제국의 황제다.”
동시에 생각했다.
‘제국이여. 내가 돌아왔다.’
제국력 991년 봄.
슈발츠마인의 선제후 루페르트가 제위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