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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86화 (86/225)

86화 23. 대관식 (2)

아카이아 대주교와 밀약을 맺은 이후에도 루페르트는 침실로 돌아가지 못하고 여전히 황궁의 궁내부에 머물러 있었다.

해는 이미 진즉에 떨어지고 황궁의 종탑 시계는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수백 년 만의 대리 결투도 대리 결투지만, 거기 걸린 게 너무 많다.

선제후를 구금하고 그의 직을 박탈하고 그 후임을 루페르트가 지정한다는 건 상상 이상의 서류와 양해, 협조를 구하는 일이다.

그 모든 행위는 정치력과 권력, 그리고 수고를 요구했다.

넓은 집무실 중앙엔 슈발츠마인 가문에 봉사하는 붉은 공단을 검은 겉옷에 덧댄 법학 박사 여럿이 먼지 쌓인 과거의 기록과 문서를 검토하고 있었고, 다른 한쪽엔 담비 가죽으로 만든 외투를 걸친 회계사들이 발생하는 비용을 산출하고 있었다.

제국다운 방대한 규모라고 할까.

부단하게 움직이는 사람들 너머엔 루페르트가 측근들과 앞으로의 방향에 관해 굳은 얼굴로 논의하고 있었다.

지금 그의 옆을 지키는 건 오토 브라에, 베르너, 그리고 요하네스 삼 인이다.

베르너가 말했다.

“전쟁 준비도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렌타이어마르크는 테타우에서 멀리 떨어진 영역입니다. 그쪽의 선제후 가문이 딴마음을 먹는다면 충분히 지킬 수 있을 겁니다. 렌타이어마르크는 150년 전 동방 제국의 오십만 병력을 홀로 막아 낸 역사가 있으니까요.”

베르너는 집무실 절반을 차지한 회계사들을 보았다.

그들이 계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전쟁 비용이다.

“전쟁이라.”

루페르트가 내키지 않는 어조로 말했다.

“내전을 하자는 건가?”

“제국의 반역자를 처벌하는 걸 내전이라고 부르진 않습니다. 애당초 그들에겐 정당한 우두머리도 없습니다. 동란(動亂)이 보다 합당한 표현이겠지요.”

오토 브라에가 베르너의 의견을 받아 말했다.

루페르트는 이에 별 반응을 보이진 않았지만, 내심 이들의 능력과 수완에 대단히 흡족해하고 있었다.

‘이렇게 유능한 젊은 친구들과 함께 국정을 의논할 수 있다니. 이제야 황제가 된 기분이군.’

그에게 국정이라는 건 늘 듣고 결재하는 게 전부였다.

엄밀히 말하는 서명 하는 기계라고 할까.

루페르트의 수많은 별명 중엔 서명하는 원숭이라는 것도 있었던 것 같다.

그놈의 울피아나가 루페르트를 말할 때 그런 말을 했었다.

“서명하는 원숭이 주제에 다 아는 것처럼 말씀하지 말아 주실래요?”

울피아나가 게슴츠레 눈을 뜬 채 빈정거리는 모습이 뇌리에 떠오르자,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헛소리를 냈다.

“헉!”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하자 루페르트는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네. 피곤한 모양이야.”

아무튼 당시 루페르트에겐 발언권이 없었다.

아니 발언을 할 깜냥도 지식조차 없다는 게 옳은 표현이리라.

뭘 알아야 딴지를 걸지.

실제 딴지를 건 적도 있지만, 그때마다 루페르트는 그것도 모르냐는 은근한 돌려 까기라는 반격을 얻어맞았다.

아는 게 없으니 반박할 수도 없었다.

더욱 루페르트를 환장하게 한 건, 모르는데도 알려 주는 이도 없었다는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셋이나 있다.

그것도 하나같이 비범한.

오토 브라에, 베르노, 요하네스.

안젤리나의 선물이다.

그런데 이 중에서 특히 비범한 이는 따로 있다.

“승자의 권리를 행사하지 않는 방법도 고려해 볼 만합니다.”

요하네스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는 가장 어리지만, 가장 영리하고, 가장 위험한 친구다.

그런데 그만 보면 늘 궁금한 게 있다.

‘요하네스 사기라는 게 대체 뭘까?’

“전하?”

“……계속하게.”

“어차피 그는 이번 일로 위신과 명분을 잃었고, 건강조차 좋지 않습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가문과 관계도 고려하는 게 좋겠죠. 무엇보다 렌타이어마르크는 얻을 게 없는 땅입니다. 가난하고 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공격이 쉬운 것도 아니고요.”

“하긴, 렌타이어마르크가 어중간한 땅이긴 하지.”

여러 이야기를 들었지만, 역시 요하네스의 의견이 가장 마음에 든다.

‘이 친구. 셋 중에 가장 나하고 맞는 느낌이야. 그런데 요하네스 사기라는 거, 대체 뭐일까?’

루페르트의 개인적인 호기심과 무관하게 그들을 볼 때마다 루페르트가 느끼는 감정은 고마움이다.

‘안젤리나 님.’

늘 그랬다.

첫 만남은 분명 딱딱하고 충돌이 있었지만, 일단 그녀의 인정을 받은 이후에 그녀는 언제나 루페르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만을 제공했다.

베르크 란 조손을 보내 그의 생명을 역겨운 암살자로부터 지켜 주었고, 리히트 보덴이라는 과제를 통해 선제후가 되기 위한 금전이라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그리고 황제를 눈앞에 둔 지금, 그녀는 루페르트가 필요로 하는 유능한 관료를 셋이나 제공했다.

이들의 능력은 흠잡을 곳이 없었다.

이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루페르트에겐 신선한 경험이었다.

그 모든 걸 준 안젤리나에겐 그저 무한한 감사밖에 드릴 게 없었다.

하지만 그 감사함은 곧 죄책감으로 바뀌었다.

‘지금쯤 내 침실엔 그분의 시신이 있겠지.’

여신의 명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몸엔 사악한 저주가 깃들어 있다고 하니.

내키지 않지만, 안젤리나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보다 여신님. 아깐 대단했지. 빨리 침실로 돌아가고 싶어지는걸. 안젤리나 님의 시신이 있는 건 꺼림칙하지만……. 다 잘되라고 하는 일이잖아.’

슬슬 자정이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지만, 아직 루페르트에겐 들를 곳이 하나 남았다.

그를 위해 싸워 준 챔피언의 병문안이다.

* * *

목숨을 위해 싸워 준 챔피언의 순서가 마지막으로 미뤄진 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유는 단순하다.

베르크 란은 오늘 루페르트가 만나야 할 사람 중 가장 지위가 낮고 비천하다.

그가 어떤 공을 세웠건, 어떤 희생을 치렀건 그건 제국이라는 철저한 계급 사회에서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사실 루페르트가 직접 가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다.

적절한 부하 하나를 보내 위로하게 하면 충분할 정도의 격의 차이가 있었다.

그럼에도 루페르트는 시간을 내어 직접 베르크 란을 찾았다.

그것이 자신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 준 챔피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했다.

병실에 들어가기 전 의사에게 설명을 들었다.

“온몸의 뼈에 금이 갔다고 보는 게 좋겠군요. 금이 간 것만으로 그쳤으면 차라리 다행입니다. 내장도 튀어나오지 않았다 뿐이지, 안에서 뒤죽박죽으로 뒤섞인 것 같습니다. 커다란 보울 하나를 가득 채울 피를 토했는데도 계속해서 검은 피를 꾸역꾸역 게워 내는 걸 보면 말입니다.”

의사의 보고에 의하면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란다.

루페르트가 베르크 란을 찾았을 때 그는 눈을 감은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미동도 하지 않았고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던 모양이다.

마를로네가 파리한 안색으로 조부의 곁을 지키고 있었으니.

‘정말로 끈질긴 사람이군.’

루페르트가 봐도 그는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부상을 입었다.

그가 몇 번이고 소라고둥을 불고 싶다는 충동을 느낄 정도로 처참하게 당했으니.

말이 결투지 그것은 광장에서 고통을 동반한 처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마를로네가 뒤늦게 루페르트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나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성별을 조잡하게나마 가려 주던 모자는 광장에서 잃어버렸는지, 그녀는 검사라기엔 다소 치렁치렁한 금발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마음고생을 적잖이 해서일까? 그녀의 얼굴은 수척했고, 그 수척한 얼굴은 평소보다 그녀가 나이가 들어 보이게 만들었다.

루페르트는 가만히 마를로네를 내려다보았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으로 예쁜 얼굴이다.

앳된 느낌의 평소보다 나이가 들어서인지 여성의 향기가 물씬 난다.

그래서일까, 상의에 달린 붉은 명찰이 지금처럼 거슬린 적은 없었던 것 같다.

“그래, 조부의 상태는?”

무표정한 얼굴로 루페르트가 말했다.

“방금 잠들었어요.”

“……네 조부가 쾌차할 때까지 황궁에서 지내도록 조치해 놓았다.”

“고마워요. 전하.”

건조한 목소리와 목례로 마를로네가 감사를 표시했다.

어떤 감정일지 알 것 같다.

아마 원망이리라.

자신의 조부를 이 지경으로 만든 건 은 가면이지만, 루페르트가 없었다면 그 지경이 될 일도 없었을 터이니.

‘그가 자청한 일이다.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루페르트는 눈을 감은 베르크 란을 지그시 쳐다보다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기, 전하.”

마를로네가 떠나려던 그를 뒤에서 불렀다.

“혹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일?”

“네. 할아버지가 이 모양이 됐지만, 저도 먹고살아야죠. 할아버지도 부양하고.”

‘조부가 일어날 거라고 믿는 건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할아버지는 저를 홀로 여태까지 키우셨어요. 붉은 명찰을 단 채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요. 이제 저도 그 은혜를 갚고 싶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느낌이 달랐다.

늘 거리를 두려는 딱딱한 어조로 말했지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나긋나긋하고 조곤조곤한 어조다.

원래도 듣기 좋은 목소리였지만 모양새를 다듬으니 은은히 말투에 밴 부르봉식 억양과 악센트가 뒤섞여 마치 부드러운 운율의 음악처럼 들렸다.

루페르트는 그녀를 향해 돌아서서 그녀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눈에 담았다.

마를로네는 예쁜 얼굴이긴 하지만 피리스처럼 화려하지도 않고, 울피아나처럼 아름답진 않지만 체구 또한 작다.

하지만 그녀에겐 특유의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다.

여전히 이쪽을 바라보는 눈동자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전처럼 거리를 두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네 조부, 베르크 란은 나의 챔피언으로 날 위해 싸웠다.”

루페르트가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흐릿한 안개가 낀 것 같은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루페르트를 향했다.

“그가 버텨 준 덕에 신비로운 여인이 나타나 승부를 뒤집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할 예정이다. 금전적 보상은 물론이고 너와 조부에 대한 사면 또한.”

빈말이 아니다.

전부터 꾸준하게 생각했던 일이다.

금전적 보상이야 언제든지 할 수 있지만 사면은 쉬운 일이 아니다.

도펠죌트너에 대한 사면은 선제의 칙령에 대한 정면 도전이니.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베르크 란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냈다.

그가 없었다면 루페르트는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이고, 내일 치러지는 대관식의 주인공이 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베르크 란, 그는 루페르트를 황제로 만든 공신이다.

사면을 이야기할 정도의 공을 세운 것이다.

‘이것으로 된 것이다. 이것으로.’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 란.

생각해 보면 짧고도 긴 인연이었다.

이제는 그 인연의 끝을 고할 때가 왔다.

베르크 란은 죽겠지만, 적어도 그의 손녀만큼은 풍족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심심하면 잔소리를 해 대며 옆에서 푸념을 늘어놓던 작고 귀여운 아가씨를 이제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섭섭하긴 하지만, 루페르트에겐 해야 할 일이 너무나도 많다.

“그럼.”

이번에야말로 끝이라고 생각하며 루페르트가 돌아서려 할 때였다.

“저기, 전하.”

마를로네가 다시금 그를 뒤에서 돌아 세웠다.

약간의 짜증을 담아 돌아보자, 빤히 바라보는 시선이 루페르트를 열렬히 반겼다.

“아직 답변을 못 들었는데요?”

“답변은 하지 않았나?”

“아니요. 그거 말고요. 저에게 일을 주시는 거요.”

당돌하게 말하는 마를로네를 보며 루페르트는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뜨렸다.

언제나 그렇지만 마를로네라는 소녀는 늘 루페르트의 예상은 뛰어넘었다.

이번도 그렇다.

제대로 한 방 먹었다.

“슈발츠마인 가문을 싫어하는 거 아니었나?”

쓴웃음을 머금으며 루페르트가 묻자 마를로네는 생긋 웃으며 천연덕스럽게 답했다.

“막 좋아지려고 해요.”

그 순간 루페르트는 강하게 느꼈다.

아직 그녀와 자신을 잇는 운명의 실타래는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일그러졌던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지는 걸 느끼며 루페르트는 오늘의 마지막 종착지, 침실로 향했다.

* * *

루페르트의 기분은 격한 피로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좋았다.

‘빨리 돌아가서 여신님과 이야기를 해 봐야겠어! 어떻게 한 건지, 어떻게 그런 마술을 부렸는지! 으……. 안젤리나 님의 시체가 있는 건 조금 그렇지만.’

방문이 열린 순간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건 들썩이는 누군가의 팔이었다.

굳어 버린 시체의 팔이 뭔가 갉아 먹는 소리와 함께 발작적으로 위아래로 움직이고 있었다.

루페르트는 피가 얼어붙는 오싹함을 느끼며 시체에 다가갔다.

“여, 여신님……?”

가림막 뒤에서 루페르트는 시체 쪽을 보았다.

얼굴의 절반이 파먹힌 안젤리나의 시신이 눈을 부릅뜬 채 누워 있었다.

썩기 시작한 시신의 퀭한 눈을 보는 순간 루페르트는 순간 균형을 잃고 비틀거렸다.

“……어으.”

그 시체 앞에 뭔가가 웅크리고 있다.

작은 체구의 소녀다.

그 복장은 결투장에 나타났던 소녀와 그리고 방에 있던 조각상과 일치했다.

조각상이 고개를 들었다.

그것이 웃었다.

수천 개의 끊임없이 왕복운동 하는 돌기로 가득 찬 이빨을 드러내며.

“루페르트 가우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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