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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대제-85화 (85/225)

85화 23. 대관식 (1)

6시간 전.

황궁 도서관-분실(分室), 이른바 금서의 관.

마법대학의 고위 마법사와 이단 심문청의 인가를 받은 자만이 들어갈 수 있는 가장 은밀한 지식의 보고 앞에 한 사내가 좌우에 고위 성직자를 거느리고 나타났다.

도서관을 지키던 사서는 그를 보자마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기꺼이 길을 열어 주었다.

왜냐하면 그 앞에 선 자야말로 이단 심문청의 지휘자이자, 제국의 모든 비밀을 관리할 권한을 지닌 유일한 사람이니까.

아카이아 대주교는 결투장에서 보였던 높은 우관과 치렁거리는 화려한 법복 차림 그대로 금서의 관에 들어가 금실과 금납으로 봉인된 상자를 열어 안에 담긴 서류를 꺼냈다.

강한 허기와 갈증은 물론 피로와 요의마저 선제후의 감각을 날카롭게 자극했지만, 선제후-대주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꼼꼼하게 필사된 필경사의 기록을 눈으로 읽어 나갔다.

오랜 탐색의 시간이 지난 후 대주교는 그가 찾고자 하는 정보를 찾아냈다.

“역시……. 계시의 성녀였나.”

대주교는 그 높은 신분과는 어울리지 않는 맥 빠진 자세로 의자에 늘어진 채 고개를 의자 뒤로 늘어뜨렸다.

우관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머리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우관이 가리고 있던 휑한 정수리를 드러낸 채 대주교가 중얼거렸다.

“내가 이겼군. 친구여.”

일찍이 파멸의 예언자라 불리던 광인이 있었다.

제국을 신교와 구교, 반으로 갈라놓은 것도 모자라 그는 말세를 외치며 혼란과 전화를 불러왔다.

그는 아카이아 대주교 손에 죽었다.

그는 대주교의 오랜 벗이었다.

지금은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운 홍안의 소년일 때부터 둘은 같은 신학교를 나오고 같은 대학을 다녔다.

언제나 앞서 있던 건 크로지우스였다.

같은 내용을 보아도 그는 하나를 더 보았고, 더 빼어난 결과로 동료 학생과 선생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아카이아 대주교, 아니 소년 고트프리트가 친우에 대해 가지는 감정은 선망이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얼굴에 그 나이가 나이테처럼 새겨질 무렵부터 선망은 질투로 바뀌었다.

운 좋게도 그의 친우는 관직이나 권력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쟁쟁한 군주의 자제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주교 자리가 마침 소귀족에게까지 차례가 왔을 때 그가 거머쥘 일은 없었을 것이다.

권력을 가지면서 고트프리트가 친우에 가지던 질투심은 상당 부분 누그러졌고, 오히려 친우에 대한 존경과 감사가 늘었다.

둘의 사이는 어릴 때보다 더 돈독해졌지만, 하나의 문서가 운명처럼 둘 앞에 떨어졌다.

천 년 전 발견됐고, 이제 막 해석이 되고 있다는 빙해 사본이 둘 앞에 놓인 것이다.

친우가 늘 자기보다 하나를 더 본다는 걸 알고 있었고, 이제는 경험으로 그게 당연한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수준까지 왔지만, 그 문서의 해석을 두고 30년 지기는 전혀 상반된 입장을 내비쳤다.

크로지우스는 빙해 문서를 정면으로 부정했다.

“호라교의 공인 된 여섯 경전에 따르면 신에겐 이름이 없다. 이름 자체가 인간의 개념이며 다른 층위의 존재인 신에게 인간의 이름이라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룸인은 그들의 신에게 단지 성스럽다는 뜻의 룸어를 빌어 호라라고 불렀을 뿐, 그것이 이름이라고 할 순 없다. 그런데 그 신에게 숨겨진 진정한 이름이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믿지 않겠다.”

고트프리트의 생각은 정반대였다.

질투나 시기, 열등감 따위 개인적 감정을 넘어 고트프리트는 빙해 사본이 진정한 신의 말씀을 기록한 진실이라고 믿었다.

빙해 사본은 고문서학자와 연금술사, 대학의 마법사들이 확인한 바와 같이 천 년 이전, 어쩌면 룸 제국의 발흥 이전에 제작되었을 거다.

룸 제국이 호라 신앙 자체를 그들의 구미에 맞게 조작하고 편집했다는 건 신학교에서 역사를 공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렴풋이 알고 있는 내용이다.

약간의 교리 차이가 있다고 하나 그조차도 룸 제국 측에서 뒤틀어 버린 내용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무엇보다 빙해 사본은 최초의 황제 티그리트가 직접 발견하고 성물로 지정한 문서다.

황제는 현재의 지식으로 문서를 해석할 수 없으니 후대에 길이길이 보전하여 사본의 내용을 해석해 진정한 복음을 밝히라고 명했다.

티그리트의 검 위에 선 나라의 백성이 그의 말을 부정한다?

그건 제아무리 열린 사고의 소유자라고 해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다.

고트프리트가 이를 들어 반박하자, 크로지우스는 냉소를 머금으며 지체 없이 답했다.

“고문서학자들은 사본이 만들어진 시점이 짧게는 이천 년, 길게는 사천 년도 전이라고 하는데 그 긴 세월 동안 계시의 성녀는 안 나타나고 뭐 했나? 당장 그 잘난 룸 제국이 멸망할 땐 왜 안 나타난 거지? 애당초 티그리트 황제께서 사본에 계시의 성녀 같은 엉터리 예언이 있다는 걸 아셨다면 다른 명령을 내리셨겠지.”

고트프리트의 주장은 계시의 성녀라는 지나치게 구체적인 항목 하나에 발목이 잡혔다.

동료의 반박에 고트프리트는 신학교 학생 시절부터 느끼던 깊고 짙은 감정, 열등감을 떠올려야 했다.

크로지우스를 시기하던 건 고트프리트만은 아니었다.

크로지우스의 천재성은 선배, 후배, 동기 외국 출신의 경쟁자들에게 두루 시기 받았다.

몇 명의 경쟁자가 크로지우스를 공박했지만 무참하게 부서졌고, 교단의 한직으로 밀려났다.

그런 와중에 크로지우스가 빙해 사본을 정면으로 부정했다.

그건 문제가 된다.

그의 주장은 제국의 건국자, 나아가서는 제국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으니.

크로지우스 다음 가는 명성을 떨치고 있던 고트프리트에게 크로지우스의 정적들이 모여든 건 비단 우연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들도 고트프리트에게서 그들의 몸에서 나는 것과 같은 냄새를 맡았을 터이니.

동류는 동류를 알아보는 법이다.

동류가 부추겼다.

크로지우스를 공박하라고.

친구를 배신하라고.

고트프리트는 갈등했으나, 그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영원할 것 같았던 우정이 영원히 합칠 수 없는 균열로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크로지우스.”

일말의 위엄조차 잃어버린 대주교의 입가에 득의만면한 미소가 검버섯이 피어오른 얼굴에 곰팡이처럼 번져 나갔다.

“계시의 성녀가 나타났다. 사본에서 예지한. 그대는 뭐라고 할 것인가? 성녀가 사기꾼이며 마법사라고 부정할 것인가? 대학의 그 잘난 오각의 마법사조차 어찌할 바 모르는 그 존재를?”

그 친우가 대답할 일은 없을 것이다.

파멸의 예언자, 얀란트의 크로지우스는 친우 고트프리트가 수레바퀴로 사지를 분질러 말뚝에 묶어 불태워 버렸으니.

그 공으로 고트프리트는 선제후가 되었고 오랜 기간 제국 권력 최상층에서 활동했으나, 여전히 명성은 친우가 독점하고 있다.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크로지우스는 제국의 역사 자체를 뒤바꾼 인물이니.

이제는 다를 것이다.

서고 입구 쪽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대주교 예하. 룸왕 전하께서 마중할 채비가 끝났다고 합니다.”

아카이아 대주교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수 우관을 들어 휑한 정수리 위에 씌웠다.

그가 서고를 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성직자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앞장선 대주교의 눈동자엔 늙은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야망의 빛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크로지우스. 너의 시대도 얼마 남지 않았군.’

대주교의 눈에 비친 세상이 이토록 빛으로 가득 차 있었던 적은 없었다.

‘나, 고트프리트가 새로운 시대를 열 것이다.’

* * *

대주교가 물었다.

“전하는 빙해 사본이라는 고문서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 있다.

성물 목록에 있었다. 그것도 첫 번째에.

그런데 빙해 사본의 존재는 극비다.

황제도 아닌 시점에서 아는 체를 할 순 없다.

루페르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룸 제국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쓰인 호라 신앙에 관한 문서지요. 최근 학자들이 일부 항을 해독했습니다. 단지 일부분만이지만 그건 우리가 아는 호라교를 송두리째 바꾸기에 충분한 것이지요.”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감을 느꼈다.

‘이게 지금 중요한 일인가?’

당장 내일 대관식이 있다.

케케묵은 수백 년 전 문서가 뭐 어쨌단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어떻게 이 늙은이를 물리칠까 고민하고 있자니 대주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의 진정한 이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신의 진정한 이름요?”

이번은 루페르트도 약간의 흥미를 보였다.

대주교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테트라 그라마톤. 그것은 각각의 음을 가진 표음문자 네 개. 즉, 사 음절로 이루어졌지요.”

대주교가 주위를 둘러보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두 개의 문자가 해독됐고, 나머지 두 문자가 해독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 대주교를 바라보는 루페르트의 시선은 신선 그 자체였다.

‘이게 내가 아는 대주교인가.’

고리타분한 늙은이.

늘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지만 정작 말에는 알맹이가 없고, 모든 일을 원만하고 두루뭉술하게 처리하려는 인간이었다.

그래도 권위는 있는지라 적어도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 제국이 갈라지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그 고리타분한 늙은이가 루페르트가 알지 못하는 내면에서부터 빛나는 눈동자를 번득이며 열의에 차 말하고 있다.

“그 해독된 두 문자는 프, 그리고 리입니다. 프리.”

대주교가 씨익 웃었다.

“프리?!”

그 모습은 본 루페르트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대주교가 그에게 그렇게 웃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고, 게다가 그 미소는 상상 밖의 비열함을 품고 있었으니까.

“사실 이 사본은 성물로 지정되긴 했지만, 너무 오래되었고 허무맹랑한 내용이 많다는 이유로 무시되었죠. 하지만 오늘 계시의 성녀가 나타났습니다.”

“계시의 성녀요?”

“오늘 결투장에 나타난 신비로운 소녀 말입니다. 틀림없습니다. 그건 빙해 사본이 예지한 계시의 성녀입니다. 빙해 사본이 단지 오래된 문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진실된 복음이라는 게 드러난 것이지요.”

“그렇습니까? 그런데 그것이 중요한 일입니까?”

강한 피로감을 느끼며 루페르트가 물었다.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전하. 아니, 폐하!”

대주교가 갑자기 루페르트의 두 손을 마주 잡았다.

“지금은 위기의 시대입니다. 제국은 어둠 속에서 빛을 잃고 방황하고 있지요. 제국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신앙의 빛입니다.”

“신앙의 빛? 빙해 사본이?”

“역시 영민하시군요. 정확합니다. 빙해 사본에 의한 종교 개혁이야말로 신교 같은 이단을 뿌리 뽑고 신민에게 진정한 복음의 길로 이끌 것입니다.”

“복음의 길 말이군요.”

루페르트는 코웃음을 치려는 걸 가까스로 자제했다.

‘호라 같은 죽은 신앙을 개혁한다고 뭐가 달라지는 거지?’

루페르트의 속을 꿈에도 모른 채 대주교는 비열한 미소를 머금고는 숨 가쁘게 말을 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강력한 황제가 있어야 합니다. 불신자의 어떠한 도전조차 견뎌 내는 강력한 황제가 말입니다! 폐하가 신앙의 수호자로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우리 호라 교단 또한 폐하를 수호하겠나이다.”

“…….”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카이아 대주교라는 인간도, 그가 말한 진실된 복음이라는 것도.

하지만 호라 교단의 도움은 큰 힘이 될 것이다.

신교의 등장으로 힘이 약해졌다고 하나, 여전히 제국 절반 이상 신민의 신앙을 쥐락펴락하는 사람들이니.

그 방대한 하부 조직, 인재, 금전적 혹은 신앙적인 지원은 황제 루페르트에게 적잖은 힘이 될 것이다.

“좋습니다.”

꼭두각시 황제 시절 익혔던 감정의 가면을 쓰고 루페르트는 대주교에게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키아아 대주교가 황제의 깃발 아래 섰다.

루페르트 가우저, 아니 황제 루페르트 최초의 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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