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22. 결투 (5)
약속된 침묵 속에서 소녀가 결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닿는 걸음마다 돌과 돌이 맞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그 누구도 그녀를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를로네에게 채찍을 휘두르던 난폭한 기병도, 마를로네를 끌어내려던 고압적인 장교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결투장을 향해 맨발로 다가오는 소녀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듯 아름다웠고, 온몸에 거역할 수 없는 성스러운 광휘를 휘감고 있었으니까.
기이하게도 소녀는 맨발이건만 걸을 때마다 돌이 맞부딪치며 울리는 소리가 났다.
몸이 석상이라도 이루어지기라도 한 것일까.
그건 알 수 없다.
광휘가 원래의 색채를 감추고 있었으니.
무엇보다 저 영롱하게 반짝이는 두 눈은 돌이 아니다.
살아 있는 사람의 눈이다.
“오오!”
뒤늦게 사람들이 반응했다.
정확히는 마비가 풀린 느낌.
웅성임이 사방에서 일었고, 군주와 선제후들은 저마다의 측근으로 자신의 주위를 에워쌌다.
반응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놀란 선제후는 따로 있었다.
“오오……!!”
아카이아 대주교의 얼굴은 거의 넋을 잃고 있었다.
“대주교님. 대주교님.”
좌우를 호위하던 수도원장과 주교들이 그를 불러 보지만, 아카이아 대주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 그의 시선은 소녀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누구의 제지도 받지 않은 채 소녀는 결투장 앞에 섰다.
두 결투자가 중단되기 전 자세 그대로 결투장에 머물고 있었다.
“싸움을 그만두세요.”
소녀가 말했다.
하늘 위에서 울려 퍼지던 노래와 같은 목소리다.
‘저 얼굴은?’
루페르트 가우저의 의연함이 비로소 깨졌다.
틀림없다.
발등까지 덮는 진홍빛의 스커트와 검은 공단으로 만든 셔츠를 입은 저 소녀의 모습은 루페르트의 집무실과 침실에 있던 것과 일치했다.
안젤리나, 불쌍한 안젤리나의 14세 시절의 조각상이다.
그런데 그 조각상은 더 이상 조각상이 아니었다.
하얀 피부 너머로 투명하게 비치는 실핏줄과 생명을 머금은 반짝이는 검은 눈동자, 걸을 때마다 태초의 강물처럼 넘실거리는 짙은 갈색의 머리카락은 살아 있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력을 머금고 있었으니까.
다만 기이한 구석도 있었다.
소녀의 옷자락 일부가 부자연스럽게 움직이지 않는다.
마치 그것이 석상인 것처럼.
‘서, 설마 저 소녀의 정체는 여신님?!’
루페르트의 의연함이 깨졌지만, 그에게 주목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만인의 관심은 광휘를 머금은 여신 같은 소녀에게 집중되어 있었으니.
거기서는 루페르트조차 한 명의 관중에 불가하다.
“무익한 싸움을 그만두세요.”
소녀가 거듭해서 말했다.
그 목소리는 수만 군중의 함성과 아우성을 뚫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뇌리에 뚜렷하게 울렸다.
느닷없는 정적이 찾아왔고, 모든 이의 시선은 이제 결투자 대신 광휘를 머금은 소녀 하나에게 집중됐다.
이제는 어두워 거의 앞이 보이지 않는 좁은 시야로 베르크 란은 다가오는 소녀의 맨발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건?’
주르륵.
한 줄기 핏물이 열린 입술 사이로 흘러내렸다.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쿵!
베르크 란이 무릎을 꿇었다.
이미 한계를 넘어섰고 의지의 힘으로 가까스로 버티던 육체가 무너져 내렸다.
“크으…….”
점점 무너져 내리는 시야 속에서 베르크 란은 대검을 든 채 똑바로 서 있는 자신의 적을 노려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내가 이겼다.’
베르크 란이 쓰러졌다.
“할아버지!”
마를로네가 느닷없이 고성을 터뜨린 건 베르크 란이 쓰러져서만은 아니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챔피언이 검을 들었다.
장외 패를 당하고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 패배자는 갑자기 나타난 소녀의 등장에 잠시 정신을 빼앗기긴 했지만, 원래 하려던 일을 떠올렸다.
바로 베르크 란의 죽음이다.
“그만두라고 말했을 텐데요?”
소녀가 그와 베르크 란 사이를 막아섰다.
은 가면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내리쳤다.
베르크 란의 팔을 부러뜨리고 그를 무너뜨린 그 무시무시한 힘으로.
소녀는 가는 팔을 들어 검을 막았다.
모두가 소녀의 죽음을 예상했다.
팔이 잘리고 몸통마저 반으로 갈리는 상상이 절로 그려졌다.
그러나 검은 소녀의 팔에 닿기도 전에 스스로 멈추었다.
“……!!”
은 가면이 미약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가면 너머의 어두운 눈구멍 너머 희미하게 비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소녀의 팔에 막힌 채 서서히 말아 올려지며 일그러지는 자신의 검을 보고 있었다.
“!!”
노르드마르크 최상의 철괴를 디터팔츠 최상의 장인들이 수천 번을 담금질한 대검이 종이처럼 구겨지고 있다.
은 가면은 검을 놓으며 뒷걸음질 쳤다.
소녀가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미소 짓자, 그는 등을 돌려 군중 속으로 달아났다.
결투의 승리자가 정해졌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대 룸인의 왕 루페르트의 챔피언은 결투장에 남았고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챔피언은 결투장을 떠났다.
루페르트의 승리다.
“저, 저게 뭐야?”
마를로네가 충혈된 눈으로 예고도 없이 일어난 기적을 보며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만이 아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만 명의 관중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그들 눈앞에 벌어진 기적에 압도당한 채 경직됐다.
오직 한 명만이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다.
루페르트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더할 나위 없는 환희와 경배를 담아.
‘여신님!’
인내는 보답받았다.
그리고 한 사내는 고요 속에서 격동한다.
아카이아 대주교는 떨리는 눈으로 광휘를 휘감은 소녀를 노려보았다.
‘저건 안젤리나? 아니, 아니야. 저건!’
피와 투쟁, 권력과 야망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사고 속에서 하나의 문서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천 년 전 발견된 빙해 사본.
거기서 간신히 해석한 경구 하나가 운명처럼 대주교의 뇌리를 지배했다.
“계시의 성녀.”
대주교의 입가에 순수한 환희의 미소가 떠올랐다.
갖은 거짓과 기만, 선량한 척을 하며 평생을 살아가던 자가 잃어버렸던 미소가 태양 아래 드러났다.
“틀림없어! 저건, 저건 사본에서 말하는 계시의 성녀다!”
모두의 경악 속에서 소녀는 느닷없이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한편 군중 속에서는 또 하나의 황제가 그림자 속에 숨어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
클라우데 루돌프 폰 슈발츠마인.
일찍이 철혈대제라 불리던 자 또한 이 자리에 있었다.
* * *
제국은 물론이고 대륙 전체의 이목이 쏠렸던 대리 결투가 끝났다.
승자는 루페르트 가우저라 알려진, 카를 루페르트 폰 슈발츠마인.
이름이 뜻하는 대로 슈발츠마인의 선제후이자 룸왕이며, 곧 내일 황제가 될 자다.
루페르트는 즉시 승자의 권리를 행사했다.
“고대의 관습에 따라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선제후 직을 박탈하며, 그 후임자는 룸인의 왕 루페르트가 결정한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순순히 황궁의 별궁에 연금됐다.
일체 저항도 없었고, 이의도 없었다.
하지만 루페르트는 강하게 감지했다.
정당한 결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바라보는 주변 선제후들의 시선이 그리 곱지 않다는걸.
특히 두 명이 큰 불만을 쏟아 냈다.
“이런 식으로 대리 결투가 부활 된다면 다음은 누굴까? 나도 챔피언을 찾아봐야 하나. 그런데 도펠죌트너를 어디서 구하나.”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은 빈정거린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가문은 한때 황제를 배출하기도 한 제국의 뿌리 중 하나다. 수백 년 전의 케케묵은 관습으로 그와 그의 가문으로부터 조상과 최초의 황제가 보장한 토지와 자치권을 뺏는다는 건 제아무리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자초한 일이라고 해도 지나친 처사가 아닐까?”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는 아예 루페르트에게 선처를 베풀라고 은근히 압박을 넣는다.
디터팔츠 선제후와 아카이아 대주교는 별다른 입장을 표명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생각 또한 나머지 둘과 크게 다르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역시, 무익한 결투였군.’
이리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결투가 끝나자마자 다시 더럽고 비열한 궁정의 음모극이라는 두 번째 싸움이 소리 없이 막을 올리고 있었다.
‘하지 말았어야 할 촌극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
리프니에가 원한 것이니.
그래도 이긴 건 다행이다.
결투에서 패배했다면 승리와 달리 모든 걸 잃게 됐을 테니까.
아무튼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든 간에 루페르트는 자기가 할 일은 확실히 할 생각이었다.
대관식이 끝난 후 심문이 있을 것이다.
선제후가 붉은 산맥, 자부아, 그리고 룸에서 저지른 반역 행위에 대한 조사를 위해서 말이다.
물론 오늘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집무실로 몰려왔다.
슈발츠마인의 원로들이다.
“놀랐습니다. 전하.”
“그러게 말입니다. 만약 지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는지.”
“챔피언의 팔이 부러질 땐 우리 가문도 부러지는 줄 알았습니다.”
슈발츠마인 가문의 원로들은 그동안 꾹 눌러 참았던 말을 쏟아 냈다.
이기긴 했지만, 과정 자체는 위태로웠다.
루페르트는 물론이고 슈발츠마인 가문 전체에 타격을 줄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에 루페르트는 꼭두각시 시절부터 부단하게 연마한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베르크 란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하늘이 우리를 도울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루페르트는 소라고둥을 꼭 쥐었다.
‘설마하니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지만 말이야.’
너무 신경을 써서일까.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감을 느꼈다.
당장이라도 침실에 돌아가고 싶다.
결투 중에 거행됐을 안젤리나의 시신 확보가 성공했는지도 궁금했고, 그 신비로운 소녀의 정체가 리프니에인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황제의 시간은 온전히 자기 것이 아니다.
황제는 제국의 지배자이자 제국을 대표하는 자.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파도처럼 몰려오는 원로와 귀족, 군주들의 행렬을 보며 루페르트는 체념했다.
‘이거, 운이 없으면 오늘 안에 침실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겠는걸.’
다행스럽게도 선제후 중에 그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저마다 본심을 감춘 채, 동료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묵묵히 병사들의 경호를 받으며 별궁에 연금되는 장면을 지켜보고 자리를 떠났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동료 선제후의 반역이 대가를 치렀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다음 차례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어쩌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와 같은 생각을 품은 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다섯 명의 선제후가 있지만 이들 중에 루페르트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동맹이 필요하다.’
내전이 일어날 것이다.
내전이 일어나는 것만큼은 막아야겠지만, 내전이 일어난다면 황제는 동맹을 찾아야 할 것이다.
루페르트는 그렇게 생각하며 쏟아지는 인파를 상대했다.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제국의 밤 행사에서 만났던 쇠르너 백작입니다.”
“로렌의 공작 막스입니다. 저는 처음부터 폐하께서 이길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저지대 연방을 대표하여 인사드립니다. 연방의 전권대사인 클루이베르트입니다.”
제국에서 그리고 타국에서 온 수많은 군주, 권력자, 외교관이 저마다 루페르트의 눈도장을 찍기 위해 고개를 조아리고 인장에 입을 맞췄다.
루페르트는 강한 피로감을 뒤로하고,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며 그가 보일 수 있는 최대의 성의를 담아 상대했다.
수십, 수백 명을 상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늘 좋은 표정을 지어야 하고 좋은 말을 해 줘야 하며 이름과 직위를 기억해 정확하게 발음해 줘야 한다.
그런 성의라도 보여야 그들의 마음에 도장을 찍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과거의 루페르트에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과거의 루페르트는 이 책임에서 도망쳤다.
귀찮고 하기 싫었고 모르는 사람을 상대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추태가 꼭두각시 황제를 만드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루페르트는 사람을 만나고 또 만나고 또 만났다.
‘이들을 전부 나의 사람으로 붙잡을 순 없다. 하지만 처음부터 적으로 돌리는 우행을 저질러서도 안 되겠지.’
인장 반지에 몇 명의 입술이 닿았는지 세는 걸 포기할 무렵 알현 시간이 끝났다.
조용해진 집무실에 앉아 한숨 돌리고 있자니, 시종 하나가 다급히 알현실로 들어왔다.
“전하!”
“무슨 일인가?”
“아카이아 대주교께서 알현을 청하십니다.”
“아카이아 대주교가?”
루페르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오전과 오후의 피로가 싹 가시는 기분이랄까.
‘그 늙은이가 무슨 용무로 찾아온 거지?’
루페르트는 아카이아 대주교를 잘 알고 있다.
고리타분하며 엄격한 신앙심의 소유자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는 신앙이 깊은 것도 아니고 극도로 이기적인 인물이다.
‘그놈의 속죄주의, 속죄주의.’
루페르트가 아는 한 대주교는 이익이 없는 일에 끼어들지 않는다.
그 늙은이가 왔다는 건 요구할 거리가 있다는 뜻이리라.
‘그 늙은이가 원하는 게 뭘까?’
루페르트는 대주교를 단 한 번도 좋아한 적이 없지만, 그와 그의 교단엔 힘이 있다.
“대주교를 맞이할 준비를 하라.”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눠 보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