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대제-80화 (80/225)

80화 22. 결투 (1)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드디어 움직였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긴 칩거를 끝내고 움직인 날은 대관식이 있기 불과 3일 전의 일이었다.

이미 테타우 시내는 제국 전역에서 올라온 제국 의회의 구성원, 선제후와 그 수행단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새로운 황제의 즉위를 바라는 축제 또한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혼란과 환희의 절정 속에서 선제후가 꺼낸 카드는 가장 큰 축제의 예고였다.

[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별지에 첨부한 사안의 해결을 고대의 관습법에 의한 결투로 처리하고자 한다. 룸인들의 왕이자 슈발츠마인 선제후 루페르트의 빠른 답변을 요구한다. ]

결투.

현재에도 귀족 사이에 빈번하게 일어지는 일이라고 하지만 군주급 이상의 귀족 사이에 일어나는 일은 드물다.

심지어 선제후 간의 결투는 지난 수백 년간 찾아볼 수 없는 일이며 일어날 수도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 수백 년의 공백을 비웃기라도 하듯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보란 듯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루페르트에게 공개 결투를 제의했다.

물론 죽어 가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직접 싸울 일은 없을 것이고 고대의 방식에 따라 챔피언을 내세울 것이다.

“드디어 시작이네요. 루페르트 가우저.”

침실의 조각상이 입을 열었다.

조각상 안에 깃든 리프니에는 대단히 즐거워 보였다.

“이제 안젤리나의 시신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거죠?”

“그렇습니다.”

계획은 한 번에 이루어진다.

루페르트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챔피언이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결투를 하는 동안 록산느의 하브루타인들이 재빠르게 시신을 묘에서 꺼내 황궁 안에 자리 잡은 루페르트의 처소-사자궁의 침실에 시신을 갖다 놓는다.

계획의 핵심은 대리 결투 그 자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도전에 대해서 루페르트는 기타 현안을 정하기도 전에 장소부터 정했다.

역대 황제의 조각상이 새겨진 황궁의 입구 광장이다.

그곳은 황궁 외부, 테타우의 삼십만 시민과 테타우에 방문한 무수히 많은 외부인들이 몰려들 것이다.

황궁 근위대로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많은 군중을 통제하며 내일 대관식을 치를 황제와 선제후들을 지켜야 하니까 황궁의 경비는 자연스레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

특히 선제후용으로 마련한 별궁의 경비가 대단히 한산해질 것이다.

그 선제후가 축제의 한가운데에 있다면 더더욱.

* * *

대관식 전날.

황궁의 정문, 이른바 선제의 벽 앞.

구름 같은 인파가 황궁 아래 모여들었다.

“들었어? 황제 폐하가 선제후와 결투를 한다던데?”

“황제가 직접 하는 게 아니야. 대리인을 세우는 거지.”

“아직 황제가 아니잖아. 룸왕이라고 불러야지. 하여간 무식한 인간들이란.”

“누가 이길까? 아니 뭘 걸고 싸우는 걸까?”

수많은 군중의 두런거림 속에서 황궁 안에서 위풍당당한 행렬이 나타났다.

가장 먼저 나타난 건 귀족이다.

영지를 갖지 못한 군주의 자식이나 형제들은 화려한 옷을 입고 있으나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는 자로 대부분 군주 가문의 가신으로 평생을 보내나 상당수가 결혼이나 군인의 길로 보다 나은 미래를 추구하곤 한다.

다음에 나타난 건 군주의 행렬이다.

군주는 말 그대로 자신의 영지를 가지고 다스리는 자로 최소 백작 이상의 작위와 그에 걸맞은 크기나 인구의 영지를 가진 자를 의미하나 실질적인 구분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분할 상속으로 인한 공작들이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다.

일곱 선제후가 차지한 커다란 땅덩어리 사이사이를 지배하는 그들은 제국 지배 계층의 등뼈이자 제국 의회의 중요한 구성원이다.

군주 다음에 나타난 건 높은 우관을 쓴 성직자의 행렬이다.

호라교단으로 알려진 그들은 상명하복의 엄격한 위계 구조를 바탕으로 한 하나의 강력하고 단일한 조직으로 제국인의 신앙을 관리하고 지배하며 그로부터 군주와는 또 다른 형태의 권력을 누린다.

유일한 성직 선제후 아카이아 대주교의 선제후령이 다른 선제후령에 비해 크기도 작고 소출도 작다지만 아무도 무시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서 나온다.

다음은 일곱 선제후의 등장이다.

성직자 집단 이후 조용히 나타났지만,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결투장의 가장 좋은 자리를 점하고 그들의 수준에 맞는 경호원을 보란 듯이 좌우에 포진시켰다.

군주들은 시기로, 백성들은 선망으로 그들을 바라본다.

일곱 선제후 중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두 명은 다름 아닌 결투의 당사자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그리고 슈발츠마인 선제후이자 룸인의 왕 루페르트.

둘 옆엔 그들을 대표하는 챔피언이 그들의 군주만큼이나 높은 주목을 받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일견 화려해 보이는 건 렌타이어마르크 측의 챔피언이었다.

키가 크고 균형 잡힌 체구도 체구지만 번쩍이는 은 가면이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그에 맞서는 자도 만만치 않았다.

제국 곳곳에 서식하는 흉포한 불곰의 가죽을 통째로 벗겨 머리를 두건으로 삼고 몸통을 망토 삼아 두른 거구의 전사가 그의 덩치에 걸맞은 대검을 짚은 채 영웅의 동상처럼 고고히 서 있었다.

중재를 맡은 건 선제후 중에서 가장 서열이 높은 아카이아 대주교였다.

다만 그는 이 결투에 대해 탐탁지 않은 태도를 보였기에 자기 대신 카렐리아 주교에게 중재 및 진행을 맡겼다.

곧 루페르트의 것이 될 카렐리아 왕국의 주교는 제국인과 차이가 느껴지는 이질적인 억양으로 말했다.

“두 당사자는 이 결투에 무엇을 걸 것인지, 각자 제시하시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병든 기색이 완연한 어두운 얼굴에 한껏 미소를 머금으며 루페르트를 향해 가볍게 목례했다.

“내가 원하는 건 제국 의회에서 의제에 올려놓은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루페르트가 말했다.

“내 직을 걸겠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얼굴에 선명한 경악이 떠올랐다.

그뿐만이 아니다.

루페르트의 말을 들은 모든 고귀한 자와 평범한 자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루페르트의 얼굴과 옆 모습, 등 뒤를 바라보았다.

수만 개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채 루페르트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울러 내일 내가 쓰게 될 두 개의 관 또한 걸겠다.”

벼락이 떨어진 것처럼 황궁 앞엔 정적이 감돌았다.

그 모습은 마치 시간 그 자체가 멈춰 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는 얼굴로 저마다의 말을 쏟아 냈다.

“조용히 하시오!”

“정숙!”

기병들이 몽둥이를 휘두르며 일반인의 입을 닫게 하려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높고 견고한 벽면에 부조된 선제들이 내려다보는 황궁 앞엔 노도와 같은 언어의 물결이 넘실거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일의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가 모든 걸 이 무익해 보이는 결투에 걸었기 때문이다.

저 결투에서 지면 그는 모든 걸 잃을 수 있다.

시골 청년에서 선제후, 선제후에서 황제가 될 제국에서 제일가는 출세자가 한 번에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스스로를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비상식적이군.”

트라이아의 선제후 레벤호스트가 중얼거렸다.

그뿐만이 아니다.

“저런 친구였나?”

노르드마르크 선제후도.

“상당히 무모하구만.”

디터팔츠의 선제후도.

“…….”

고어문트의 선제후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님.”

골트문트의 딸, 울피아나가 얼굴을 가린 베일을 살짝 열어 저 앞에 자신의 챔피언을 거느리고 우뚝 서 있는 검은 제복의 사내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룸왕께서 언젠가 저에게 구혼했다고 하셨죠?”

루페르트에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울피아나는 자기도 모르게 입맛을 다셨다.

골트문트는 곁눈질로 외동딸의 모습을 훔쳐보고는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또 시작인가.’

“왜 거절하신 건가요? 저런 제국의 영걸을 사위로 맞이할 기회를?”

부드럽게 말하지만, 그녀의 목소리엔 부친이자 선제후마저 옭아매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으로 일찍이 소문이 났지만, 그녀를 잘 아는 사람은 모두 그녀를 두려워한다.

한 번 발동이 걸리면 결코 시들지 않는 그 소름 끼치는 집요함에.

골트문트는 애써 딸을 무시하며 입을 열었다.

“무모한 도박에 모든 걸 거는 건 영걸이 아니다. 필부나 하는 짓이야.”

“그만큼 자신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건 지켜볼 일이지.”

골트문트는 턱을 괸 채 루페르트 앞에 은 가면을 쓴 챔피언 옆에 앉아 있는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를 의심이 깃든 눈으로 노려보았다.

‘루페르트 가우저도 그렇지만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저자가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이는 것이지? 아내를 잃고 병을 얻고 판단력이 흐려진 건가? 아니면 소문대로 진짜 사교에 빠져 이성마저 저버린 것인가?’

원인을 제공한 건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다.

그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명분도 없는 사안으로 루페르트가 부재중에 선거를 무효로 할 기회를 노렸다.

대체 루페르트를 떨어뜨려서 그가 얻게 될 이득이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그가 후보를 내세운들 그의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자는 아무도 없을 테니.

본인이 입후보해도 결과는 같다.

그가 보인 일련의 행동은 오로지 루페르트를 떨어뜨리는 것에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루페르트가 그와 가문의 원수인 것처럼.

그 선제후가 루페르트에게 응답했다.

“동등한 가치일지 모르겠지만 저 또한 직을 걸겠습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가 아카이아 대주교를 바라보았다.

판단의 시간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이의 시선이 늙은 성직 선제후의 입을 향했다.

중재자가 무슨 의견을 내놓을 것인지 모두가 궁금해하는 동안 황궁의 뒤편에선 한 무리의 괴한이 텅 빈 거리를 소리 없이 속보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사막을 닮은 눈동자 색과 피부색을 가진 그들은 어두운 계열의 두건과 망토로 몸을 가리고 있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장미 덤불로 만든 산울타리로 벽을 만든 작고 아담한 저택이었다.

한때 테타우에서 가장 엄중한 경호를 받던 저택은 텅 비어 있었다.

지켜야 할 주인이 사라지고 그녀의 하인만이 남은 사실상 빈 쭉정이 같은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남자라고는 늙은 정원사 하나뿐인 이 저택에 현재 남은 사람은 전 주인과 함께 늙어 가던 시녀 한 명뿐이었다.

사막을 닮은 눈동자를 지닌 괴한들은 그녀가 못 보고 지나치길 바랐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그들이 침입할 때 뒤뜰 정원에 있었다.

그것도 그녀의 주인이 묻힌 묘역 앞에.

일말의 자비도 없는 삽이 그녀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사막을 닮은 눈빛을 한 괴한들은 능숙하게 전 주인의 묘를 파헤쳤다.

곧 검게 칠한 목재 관이 나타났다.

괴한들은 관을 열어젖혔다.

장미 향과 부패하는 시신의 썩은 향이 뒤섞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괴한 냄새가 확 올라왔다.

관 안에 가지런히 누운 건 다름 아닌 안젤리나의 시신이었다.

늙고 병들고 죽어 가던 얼굴을 처녀처럼 한껏 치장하고 얼굴이 하얗게 보이도록 화장시켰지만 젊은 시절 칭송받던 그 여신 같은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철혈대제의 천상의 배필이라 불리며 한때 가장 고귀했던 여인의 시신은 존경도 경의도 없이 더러운 마대에 담겼다.

비어 있는 관엔 아직 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시녀가 던져졌다.

또 한 번의 무자비한 공격이 시녀의 숨통이 끊겼고 관이 닫혔다.

사막 위에 새겨진 흔적이 유사(流沙)에 의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처럼 묘역 또한 원래의 형태대로 돌아갔다.

하브루타인들은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숨겨진 뒷길과 울타리를 따라.

원래는 경비병이 상시 순찰을 돌고 어둠에 반쯤 가린 망루 위에 서 있는 근위대가 매의 눈으로 감시하고 있는 구역이지만 그들이 벽을 넘고 황궁 영역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그들을 제지하는 건 아무도 없었다.

두 명의 하브루타인은 때로는 고양이처럼 때로는 쥐새끼처럼 사자궁이라 불리는 별궁 안을 능숙하게 나아가며 한 방에 도달했다.

그곳은 다름 아닌 오늘의 룸왕이자 내일의 황제인 루페르트의 침실.

약조대로 그들은 침실 뒤편, 리넨과 자단목으로 만든 가림막으로 구분된 루페르트의 사적 공간에 마대 자루를 놔두었다.

사람을 죽이고 시체를 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던 하브루타인 하나가 순간 공포에 부릅뜬 눈으로 어둠 속을 보았다.

거기엔 대리석으로 만든 소녀의 석상이 서 있었다.

평범한 대리석 석상임에도 사내가 놀란 건 그가 시체를 내려놓는 순간 석상이 미소 지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발밑부터 젖어 들어가는 섬뜩한 공포감 속에서 하브루타인들은 부리나케 침실을 빠져나왔다.

“어머.”

조각상이 웃으며 마대 자루를 바라보며 돌로 된 손으로 자루를 열었다.

분칠을 한 시신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 차가운 볼을 차가운 손으로 어루만지며 리프니에가 말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당신도 쓸모가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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