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20. 두 개의 길 (2)
추적자들이 그 모습을 보고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들로선 쉬이 움직일 수 없다.
남작 앞에 우뚝 선 사각의 마법사를 본 순간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으니까.
“귀찮게 됐군. 사각의 마법사를 남겨 두다니. 거기다 그 무자비한 살인마 한스 징펠만까지.”
‘매잡이’ 호겔 프리츠가 침을 뱉으며 중얼거렸다.
그가 자신 옆에 우뚝 선 염소 가면을 올려다보았다.
“슬슬 본 실력을 드러내는 건 어떨까? 그대가 전력을 다한다면 죽일 수 있지 않나? 저 마법사조차.”
“…….”
염소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가면의 좁은 눈구멍 속의 그의 시야가 향하는 곳은 마법사가 아니다.
그는 멀리 달아나는 루페르트의 양옆을 지킨 도펠죌트너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저택을 우회한다.”
염소 가면이 말했다.
불만의 눈빛들이 염소 가면을 향했지만, 감히 그에게 불만을 입 밖에 낼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공포로 지배하는 자다.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흉조의 힘으로.
지겔슈타트와 한스 징펠만은 멀찌감치 숲을 따라 우회하는 추격자들을 바라보다 나란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디 무사하시길.”
* * *
황제 시절 루페르트가 아무것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도 점점 깊어지는 제국의 내란에 위기와 책임을 느꼈고, 이를 어떻게든 진화하려고 발버둥을 쳤었다.
꼭두각시 황제의 한계를 깨닫고 포기하기 전까진 말이다.
그 짧고 허무했던 격동기 속에도 교훈은 있다.
“도망자와 추격자, 둘 모두가 말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했을 때 추격자가 도망자를 따라잡는 경우의 수는 두 가지지. 더 빠른 말을 가지고 있거나 아니면 더 쌩쌩한 말을 가지고 있거나.”
불난 집에 부채질한다고 망해 가는 황궁에 도둑이 든 일이 있었다.
도둑은 그나마 남아 있던 보석을 싹싹 긁어 황궁 밖으로 달아났다.
뒤늦게 이쪽이 추격대를 보냈지만, 좀처럼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도둑을 놓쳤다.
성벽 위에서 마음을 졸이며 그 장면을 봐서 잘 안다.
동등한 말을 가지고 있을 때 거리를 좁히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중요한 건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지.”
베르크 란이 힐끗 루페르트 쪽을 쳐다보았고 마를로네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참, 대담한 작전이네요.”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말이 지치면 그땐 어떻게 하죠?”
“우리 말이 지친다면 그들의 말도 지치겠지. 거기다 우리의 말은 얼마 전까지 마구간에 있었지만 적의 말은 이미 먼 거리를 이동해 왔다. 어느 쪽이 쌩쌩할는지는 자명하겠지?”
“그렇군요.”
마를로네는 고삐를 움직여 그녀의 할아버지 쪽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루페르트 눈치를 보며 베르크 란 정도가 간신히 들을 수 있는 크기로 속삭였다.
“우리 황제 폐하가 또 어처구니없는 계획을 말하고 있는데?”
“인정한다.”
“어떡하지? 할아버지 그 염소 이길 수 있어?”
“아마 내가 이기겠지.”
“정말?”
“……내가 이긴다. 하지만 싸움은 피하는 게 좋다.”
“왜? 이긴다며?”
“그자에게 동료가 있다는 걸 잊은 거냐? 애당초 네가 조금만 더 도움이 됐더라면…….”
“우리 더 좋은 방법은 없어?”
“글쎄다.”
베르크 란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루페르트 가우저란 애송이가 황제에 근접할수록 보이는 게 있다.
바로 선제의 모습이다.
‘선제라면 남작 일가를 버리는 것도 모자라 남작 일가 본인조차 모르는 상태에서 선제의 유용한 도구로 사용했겠지.’
루페르트는 그가 모시던 철혈대제에 비해 지나치게 유약하다.
평화로운 시기라면 모를까 당장 테타우에서 반역이 실시간으로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저렇게 물렁한 모습을 자꾸 보인다는 건 적어도 베르크 란의 눈엔 무능력함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장 위기를 자초했어. 그 위기를 타개하는 방법도 어처구니가 없고. 거리를 유지한다니? 그런 단순한 생각으로 뭘 어쩌겠다는 건가? 말보다 빠른 걸 구하기 어려운 건 맞지만 상대방을 앞지를 수 있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어.’
이를테면 대단히 민첩한 하나를 보내 앞길을 막는다거나, 지름길로 거리를 좁힌다든가.
아니면 연기나 깃발 같은 걸로 가까이 있는 동료에게 신호를 보내 협공할 수도 있다.
루페르트가 제시한 빈약한 근거 따윈 가볍게 지르밟을 위험이 가득하다는 소리다.
아니나 다를까 출발한 지 1시간이 지날 무렵 지평선 끝에 불온한 점들이 나타났다.
“추격자가 시야에 나타났네요.”
마를로네가 한스 징펠만이 빌려준 망원경으로 뒤를 살피며 낭랑하게 말했다.
“내버려 둬라. 거리만 유지해. 놈들이 뛰면 우리도 뛰고, 놈들이 걸으면 우리도 걷고.”
마를로네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베르크 란에게 접근했다.
“무슨 생각일까?”
“글쎄다.”
정말이지 단순하고 안일한 발상이다.
상대방이 누군가.
일개 보병연대의 호위를 받는 룸왕을 묶어 두려던 자다.
그 철두철미함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권능과 힘은 이미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런 강적을 상대로 이런 안일한 작전이라니.
선제라면, 철혈대제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방법이다.
하지만 저 사내, 루페르트는 이상한 확신에 차 있었다.
그 엉성한 계획이 통하리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자연스러운 몸짓과 웃는 듯한 입매에서 느껴졌다.
‘선제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베르크 란은 마를로네에게 가까이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총 쏘는 놈을 죽일 수 있겠느냐?”
“글쎄. 쉽진 않겠던데. 그가 콧수염 아저씨랑 비슷한 실력이라면.”
“내가 시선을 끌겠다.”
“할아버지가 그래 준다면야.”
이미 베르크 란의 머릿속에 작전은 실패했다.
그는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한 명의 병사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한.
그런데.
“…….”
반나절이 지났다.
베르크 란은 믿기 어려운 경험을 하고 있었다.
적은 여전히 지평선 가까운 것에 점의 형태로 존재한다.
거리가 좁혀지지 않고 있다.
루페르트의 그 엉성한 계획이 통하고 있는 것이다.
‘왜? 이런 게 통하는 거지? 우리가 가진 최고의 손 패를 내려놓는 악수를 저질렀는데도 왜 이런 수가 통하고 있느냐다.’
상황이 이해가 안 되긴 마를로네도 마찬가지였지만 그녀의 사고는 그녀의 조부보다는 좀 더 유연했다.
“사실 저 사람들도 뾰족한 방법이 없는 거 아닐까? 저 사람들도 엄청 준비하고 퍼부었잖아? 자부아에서부터 시작해 에반하우젠까지. 그러니까 우리를 쫓아오는 거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저들도 신은 아닐 거 아냐?”
“…….”
손녀의 말에 베르크 란은 딱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무엇보다 지금 상황이 적들의 궁색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살아 있는 증거 그 자체였으니.
그런데 루페르트에겐 또 다른 하나가 있었다.
“슈발츠마인의 사람이다.”
그것은 루페르트의 머릿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권력 지도다.
이질적인 선제후의 영토 안에서 그는 자신과 같은 가문이 지배하는 영역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다.
“세 필의 말과 식량을 빠르게 준비해다오. 사유는 말할 수 없으나, 이 사례는 테타우에서 하겠다고 전해라.”
루페르트는 자신의 인장을 경비병에게 맡겼다.
루페르트의 풍모와 복장, 그 말씨가 예사롭지 않은 걸 발견한 경비병은 기민하게 인장을 들고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곧 경비병이 나왔다.
“후작께서 환영할 준비를 하셨다고…….”
“시급을 요하는 일이다.”
“알겠습니다.”
경비병이 세 필의 말을 내왔다.
“추격자가 영지를 공격할 수도 있으니 인근 영주에 지원을 요청하고 총병을 위주로 방비를 단단히 구축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새로운 말을 구하는 동안 추격자가 가까이 접근했으나 새로운 말을 얻어 탄 루페르트는 활기찬 질주로 좁혀진 거리를 단숨에 벌렸다.
루페르트를 바라보는 베르크 란과 마를로네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했다.
운 좋은 시골 촌놈이 아니다.
머리도 나쁘고 지략도 평범하고 전투력도 일개 병사 수준이지만 제국의 권력 지도와 귀족을 다루는 솜씨는 평범한 자의 것이 아니다.
그 수많은 귀족과 군주 중에서도 대단히 높은, 이를테면 선제후급에서나 가능한 관록을 저 시골 출신 젊은이가 가뿐히 해내고 있다.
너무도 빠르고 쉽게 보급을 끝마치자 추격자의 기세는 급격히 떨어졌다.
지평선 끝에 어른거릴 정도의 거리로 따라오던 추격자들은 상부 디터팔츠 부근부터 슬슬 포기하는 기색이 보이더니 슈발츠마인 접경부턴 아예 자취를 감췄다.
추격자가 추격을 포기한 것이다.
루페르트의 단순한 발상이 추격자의 교활한 콧대를 꺾어 버렸다.
“유목민이 된 기분이네요. 말 위에서 먹고 자고.”
마를로네가 루페르트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제 아무 일도 없겠죠?”
그녀의 물음에 루페르트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으며 어슴푸레 잠겨 드는 농경지와 벌판, 그 너머로 보이는 마을을 바라보았다.
“아직 하나가 남았어.”
“하나가 더 남았어요?”
마를로네가 놀란 눈으로 쳐다보자 루페르트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하지만 걱정 마. 그건 내가 할 일이니까.”
루페르트가 하품을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를로네와 베르크 란은 그들의 고용주의 뒷모습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응시했다.
“루페르트 가우저.”
베르크 란이 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고용한 사내의 이름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순간이었다.
기이하게도 베르크 란은 그 울림에서 야릇한 운명을 느꼈다.
도처에서 타오르는 불길과 널브러진 셀 수 없는 시신, 코를 찌르는 매캐한 화약 연기와 위태롭게 휘날리는 군기의 모습을.
그 이름에선 전쟁의 맛이 났다.
* * *
제국 수도 테타우. 동 제국 의회 대강당.
거기엔 저마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권력을 뽐내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보는 건 단상의 중앙에 서 있는, 창백하다 못해 시체처럼 녹색 빛을 띤 안색을 한 죽어 가는 남자였다.
“안젤리나 대황후의 표가 과연 효력이 있는가? 그걸 따지는 게 그리 불경한 것인가?”
불길하게 떨리는 눈동자와 입에서 나는 끔찍한 구취와 달리 그의 목소리엔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유언에 의한 의사 표시라고 하나 그 의사 표시가 정상적인 의사 작용에 의해 이루어졌는가? 악의를 품은 누군가가 사경을 헤매는 대황후를 기망하여 그녀의 결심을 비열하게 바꾼 것이 아닐까?”
그 사내는 골트문트도 레벤호스트도 게오르크 아르님도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다.
죽어 간다는 소문과 달리 사자의 포효 같은 그의 웅변을 들으며 자리를 차지한 제국 의회의 군주와 귀족들은 서서히 마음이 기울어 가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그들의 시선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바로 앞에 배석한 다섯 명의 선제후를 향하고 있었다.
이들 중 누구 하나라도 이의를 제기한다면 저 죽어 가는 사내의 웅변을 끝이 날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럴 만한 권력과 권한이 있음에도.
“그렇다면 그 표는 효력이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사자후는 이제 종막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군주들은 수군거렸다.
이렇게 공격당하고 있는 차기 황제, 루페르트 가우저는 어디에 있는지.
그때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사람이 들어왔다.
병사들이 앞을 막았으나 그가 내민 인장을 보고 황송하게 고개를 숙이며 자리를 열어 주었다.
군주들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한다.
거기엔 검은 톤의 의복을 입은 젊다기보다는 앳된 사내가 빠른 걸음으로 단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군주들의 눈동자에 놀라움이 떠올랐다.
“루, 룸왕이다.”
“슈발츠마인 선제후?”
“그럴 리가?! 그는 자부아에 갇혀 있다고 들었는데?”
웅성거림 속에서 루페르트 가우저는 단상에 올랐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의 병든 눈동자에 숨길 수 없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왜? 내가 나타난 게 그리도 놀라울 일인가?”
루페르트가 불타는 눈동자로 선제후를 노려보며 엄중하게 물었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면 룸왕으로서 묻겠다.”
루페르트가 한 발 앞으로 다가갔다.
이글거리는 눈빛이 죽어 가는 자의 얼굴을 꿰뚫을 듯 직시했다.
“내 자격에 의문을 품는 건가?”
서릿발 같은 음성에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주춤거리며 한발 물러섰다.
나면서부터 고귀했고 특별했던 렌타이어마르크의 선제후가 불과 2년 전만 해도 하켄하임에서 시답잖은 일을 하던 시골 청년에게 압도당한 것이다.
“가, 가능성을 제기해 본 겁니다.”
선제후가 시선을 피했다.
다른 선제후들이 루페르트를 바라본다.
흥미, 놀라움, 불쾌함, 무관심.
겉으로 드러난 감정은 다르지만 그들의 마음속에 울리는 생각은 하나이리라.
황제가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