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화 19. 하류 (2)
그곳에 벽돌로 지은 집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부분은 천막이었고, 일부가 진흙을 지푸라기와 이겨 낸 흙집에서 살았다.
포장도로가 아닌 사람의 발길로 다진 흙길을 따라 좌우에 갖가지 점포가 줄지어 서 있었다.
가판대 위에 놓인 건, 강에서 잡은 고기나 솥 안에 끓고 있는 정체불명의 고기와 말라비틀어진 풀떼기가 대부분이었으나 한구석엔 창검을 팔고 가는 대장장이와 총포상도 있었다.
‘제국에 이런 곳이 존재했던가.’
루페르트의 눈에 비친 마을의 풍경은 그저 놀랍다고밖에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마을의 낙후도나 빈곤함은 내전이 무르익은 루페르트의 치세 중반기에나 볼 수 있는 모습이었으니까.
아직 선제의 후광이 남은 좋은 시절에 제국에 이런 곳이 존재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테타우의 빈민가조차 이거보다는 낫겠군.’
“말 그대로 제국의 하류, 버려진 자들의 마을이군요.”
지겔슈타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탈영병, 범죄자, 이교도. 제국의 태양 아래 살아갈 수 없는 자들이 모인 곳이지요.”
지겔슈타트의 눈이 번득였다.
“그나저나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 있나 봅니다.”
한 무리의 사람이 이쪽을 향해 똑바로 다가오고 있었다.
발을 저는 자, 손목이 잘려 나가 갈고리를 찬 자, 자신의 키만 한 대검을 등에 둘러맨 자.
저마다 뚜렷한 개성의 인간들이다.
무슨 일일까.
적의는 보이지 않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를 무법자의 마을이다.
루페르트와 지겔슈타트가 경계의 빛을 내비치며 나름의 준비를 할 때였다.
머리가 벗겨진 사내가 환하게 웃으며 베르크 란의 어깨를 툭 하고 쳤다.
“장군!”
그만이 아니다.
다리가 하나 없지만, 목발도 없이 토끼처럼 민첩하게 뛰어다니는 사내가 대뜸 베르크 란 앞에 도약해 힘차게 포옹했다.
“란 장군!”
두 사내는 가볍게 볼을 비볐다.
전형적인 부르봉식 인사법.
지겔슈타트는 그 비제국적인 풍습에 눈살을 찌푸렸지만, 베르크 란을 향해 몰려드는 사람은 끝이 없었다.
“장군! 오랜만이오. 아직도 건재하시군.”
“우리 장군은 죽여도 죽지 않는 사람 아닌가?”
“그나저나 여기엔 무슨 일인가? 우리야 장군은 늘 환영이긴 하지만.”
루페르트는 살짝 놀란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놀랍군.’
상상도 못 했다.
저 베르크 란이라는 사내가 이토록 환영받을 수 있다는 게.
그가 기억하는 베르크 란은 언제나 무뚝뚝하고 차가우며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폭탄 같은 사내였다.
아무도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 하고, 그 또한 누구에게도 접근하지 않는.
하지만 이 버려진 자들의 마을에서 그는 어떠한 영웅보다 뜨거운 환대를 받는다.
그 무수한 환영 인사 속에서 하나의 단어가 눈에 밟힌다.
‘장군?’
사람들은 베르크 란을 장군이라고 불렀다.
루페르트는 그들의 표정과 말에서 어떠한 빈정거림이나 조롱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서 베르크 란은 순수한 장군 그 자체였다.
그런데 왜일까.
그 장군이라는 말에 왠지 모를 오싹한 불길함이 느껴지는 건.
한스 징펠만이 멀리서 총포상과 교섭을 하는 걸 보며 생각을 정리하려고 할 때였다.
“역시 여기로 온 건가?”
뒤에서 느닷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뒤를 돌아보았다.
두건을 뒤집어쓴, 하얀 수염을 기른 베르크 란에 뒤지지 않는 기골이 장대한 노인이 어느덧 루페르트 뒤에 우뚝 서 있었다.
“루돌프 님.”
루페르트는 표정을 관리하며 가까스로 그의 이름을 말했다.
하마터면 고개를 숙이며 폐하라고 부를 뻔했다.
“살아 계셨군요. 아니, 살아 계실 거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번엔.”
루돌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제법 훌륭한 길을 고르셨군.”
* * *
극빈과 무법으로 이루어진 마을이라고 하나 사람이 사는 곳이다.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개울 저편에서 들려온다.
피부가 어두운 아이와 밝은 아이가 한데 어우러져 돼지 방광으로 만든 공을 차고 놀고 있다.
오랜만에 공을 보자 루페르트는 살짝 몸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오랜만에 실력 좀 발휘해 볼까.’
하지만 옆엔 루돌프가 있다.
루페르트는 빠르게 욕망을 가라앉혔다.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한동안 살얼음이 얼어붙은 개울가 옆을 걸었다.
루페르트는 루돌프에게 그간 있었던 모든 일을 이야기했다.
루돌프는 담담하게 루페르트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마법사의 정체가 수레를 끄는 자라니. 대단히 흥미로운 이야기군요. 거기다가 제국 성인이라니.”
그는 이야기를 듣는 중 가끔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루페르트의 이야기 자체에 의문을 표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늘 위엔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강풍까진 아니지만, 바람이 잦고 힘이 있어 빨랫감을 빨랫줄에서 끌어 내리거나 힘껏 나풀거리게 할 정도는 됐다.
아이들이 고함을 지르며 발랄하게 날아가는 빨래를 쫓아가고 있었다.
“하브루타인이군요.”
놀고 있는 아이 중에 피부가 어두운 아이들이 몇 명 섞여 있는 걸 보고 루페르트가 말했다.
하브루타인은 평판이 좋지 못하다.
생김새도 피부색도 다를뿐더러 종교마저 다르니.
하는 일도 매춘과 사기, 도둑질이라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다.
성실한 제국 사람의 눈엔 눈엣가시 같은 종족이랄까.
그래도 철혈대제는 그들에게 꽤 많은 은전을 베풀었던 것 같다.
도시 안에 하브루타인을 위한 구역을 만들어 주고, 여행자 길드 같은 하브루타인들이 그나마 정상적인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갈 기반을 마련해 줬다.
루페르트는 슈발츠마인 저택에 있던 하브루타인이 주축이 되어 만든 여행자 길드 분사무소와 강력한 황제 후보의 장례식에 나타났던 어두운 피부의 여인을 떠올렸다.
‘그 여자도 하브루타인이었지.’
루페르트가 멀어지는 아이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브루타인이라고 해도 아이는 아이네요. 제국의 여느 아이와 똑같군요.”
별 악의 없이 한 말이다.
솔직히 귀엽다고 생각했다.
특히 저 공을 등 너머로 재주 좋게 넘기는 아이의 발재간은 축구의 마스터인 루페르트의 눈에도 제법 흥미로워 보였으니.
“내 눈엔 덜 자란 시궁쥐밖엔 보이지 않는군.”
루돌프가 말했다.
루페르트가 살짝 놀란 눈으로 루돌프를 바라보았다.
‘하브루타인을 좋게 보는 거 아니었나.’
“어차피 커 봐야 사기꾼이나 납치범, 포주나 강도 같은 걸 하며 여생을 보내겠지. 그게 그들의 죽은 신이 점지한 하브루타인의 운명이니까.”
루돌프의 시선이 마을 반대편으로 향했다.
거기엔 한 무리의 사람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베르크 란이 있었다.
그의 표정은 여전히 무표정하고 무뚝뚝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의와 환영을 거부하진 않았다.
멀리서도 그들의 들뜬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저들의 정체가 뭔 줄 아나?”
루돌프가 입을 열었다.
“글쎄요. 겉으로 봐서는 상이군인?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더군요. 연령대도 다들 제법 있는 편이고.”
“통찰력이 있군. 실제로 그렇다네. 저들은 군인 출신이지. 하지만 평범한 군인은 아니야.”
루돌프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루페르트는 어렵지 않게 그 의미를 눈치챘다.
“서, 설마?”
루페르트는 베르크 란을 에워싼 저마다 개성 뚜렷한 자들을 떨리는 눈으로 보았다.
“도펠죌트너……?”
루돌프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도펠죌트너가 이리도 많이. 거기다 명찰을 안 달고 있군요. 이건…….”
“아마 도펠죌트너 반란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겠지. 한때 그들에게 무대의 주역을 뺏긴 마법사들이 악착같이 추적했지만, 저들도 악착같이 살아남은 것이지. 여기만이 아니야. 제국의 군주와 군주의 손길이 닿지 않는 곳엔 어김없이 이런 무법자의 거처와 그 안에 기생하는 반역 도펠죌트너들이 있지.”
그 말을 들은 루페르트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미 황제 시절에도 알고 계셨군.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이 집단으로 은거하고 있다는걸.’
루돌프가 개울을 따라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클라우데 2세로서 묻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부드러우면서도 거역하기 어려운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루페르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대에게 있어 제국이란 무엇인가?”
“제 목숨과 바꿔 지켜야 할 가치입니다.”
“제국이?”
“그렇습니다.”
루페르트의 꾹 다문 입술에선 타협할 수 없는 고집이 느껴졌다.
루돌프는 그런 루페르트를 두건 너머의 어둠에 반쯤 가려진 눈으로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철혈대제가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 회랑에서 지켜보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약 10년 동안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그동안 제가 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죠. 그저 선제후들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제 치세에서 제국은 멸망했습니다. 이를테면 망국의 암군이 된 셈이지요.”
“후세의 평판이 두려운 건가?”
“후세의 평판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루페르트는 기억의 저편에 생생히 새겨진 아직 아물지 않은 상흔을 직시했다.
내전으로 폐허가 된 거리, 울부짖는 여인과 죽어 가는 아이들, 아무렇게나 널린 시신과 그 시신을 뜯어 먹는 들개, 그 들개를 쫓으며 잡아먹으려 하는 병사들.
제국은 현실의 지옥이 되었다.
“사람들이 고통받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라는 무능한 황제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백성에 대한 연민이 그대의 동기인가?”
클라우데 2세가 마치 몰아세우듯이 물었다.
“아마 그게 상당 부분을 차지할 겁니다. 아, 물론 약간의 공명심도 없잖아 있습니다.”
“공명심?”
“네.”
루페르트는 황궁을 둘러싼 크고 높고 화려한 대리석으로 만든 벽과 담장을 떠올렸다.
그 벽면엔 저마다 최고의 장인이 공을 들여 조각한 역대 황제의 모습이 때로는 웅장하게 때로는 영웅적으로 때로는 조야하게 저마다의 형태로 새겨져 있었다.
그 벽면의 가장자리엔 빈자리가 있었다.
조각사의 손길을 기다리는 대리석 덩어리만 덩그러니 놓인 그 자리는 다름 아닌 루페르트의 자리였다.
루페르트는 조각되지 못한 황제였다.
그 미완성의 돌조각은 옆에 자리 잡은 크고 화려하며 웅장한 선제의 조각상과 대비되어 더 볼품없고 초라해 보였다.
루페르트는 낙엽 쌓인 길모퉁이에 방치된 대리석과 텅 빈 벽을 떠올리며 고소를 머금었다.
“……제 조각상을 보고 싶었습니다.”
“황제의 벽을 이야기하는 건가?”
루돌프가 빙그레 웃었다.
“그렇습니다. 최소한 거기에 제 모습은 남기고 싶었습니다. 후대의 평가가 어떻든 간에 말이죠.”
“소박하지만 대담한 소망이군.”
두건 너머 어둠에 가려진 두 눈에서 형형한 빛이 번득이는 듯했다.
“그대의 조각이 새겨진다는 건 그대 치세에 제국이 멸망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하는 법이니.”
“……네.”
“조각을 남기는 게 목적이라면 편법을 쓸 수도 있는데.”
“조기 퇴위 말입니까? 하하……. 그건 예정에 없습니다. 최소한 후임 황제에게 짐을 떠맡기고 싶진 않습니다.”
“내전이 벌어진다고 했나?”
루돌프가 미소를 지우며 날카롭게 물었다.
루페르트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이미 시작됐는지도 모르죠.”
마을 쪽에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하브루타인 악사들과 명찰 없는 도펠죌트너들이 저마다의 악기를 연주하며 무법자와 버림받은 자들을 흙으로 뒤덮인 광장에 불러 모으고 있었다.
그 중심엔 베르크 란과 그의 손녀가 서 있었다.
술이 술잔에 따라졌고 화로에선 갓 구운 이름 모를 짐승의 고기가 테이블에 놓였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하고 하늘은 흐렸지만, 테이블 주변에 모여 앉은 도펠죌트너의 얼굴엔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장군을 위해!”
조촐하지만 떠들썩한 축제가 시작됐다.
그 모습을 루페르트와 루돌프는 나란히 지켜보았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루돌프 쪽이다.
“……그대의 방식도 나쁘지 않군.”
“네?”
“그대가 그때 내 말을 들어 도펠죌트너를 버리고 갔다면 이곳을 찾아올 일도 없었을 터이니.”
“그건 그렇겠지요.”
“내 방식은 늘 조금이라도 위험한 걸 지워 가며 남은 선택지 중에 그나마 나은 걸 고르는 것이었지.”
“일종의 소거법이군요.”
“안정적이지만 가능성의 크기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지. 하지만 그대는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더군.”
“방식이랄 것도 없습니다. 생각도 안 한 부분이니까요.”
루돌프가 돌아섰다.
“여기까지 온 이상 큰 위험은 없겠군. 난 이쯤에서 실례해야겠어.”
“떠나시는 겁니까? 아직 황궁에 이르지도 않았는데.”
“잠깐이나마 여신을 안 보고 싶거든.”
루돌프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솔직히 지긋지긋해.”
“하하…….”
“아무튼 행운을 비네. 새로운 황제여.”
“……폐하.”
“쉿. 사람들이 들을라. 그대의 조각상. 기대하겠네. 과연 어떤 모습으로 조각될지.”
루페르트 결코 조각되지 못했던 대리석 덩어리를 떠올리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떠나던 루돌프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한마디 덧붙였다.
“자네의 방식. 오랫동안 보전됐으면 좋겠군.”
멀어지는 선제의 모습을 보며 루페르트는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전에는 조각되지 못했다.
이제는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