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19. 하류 (1)
한스 징펠만이 망원경으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전하. 도시 옆에 숙영지를 만들었군요.”
“규모는 어느 정도로 추측됩니까?”
“최소 2개 연대는 되어 보이는군요. 간이 마구간을 세우고 건초를 쌓아 둔 걸 보니 기병대도 포함한 모양입니다.”
한스 징펠만이 물끄러미 루페르트를 응시했다.
“뭔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전하.”
“잠깐만 살펴봅시다.”
루페르트가 범용한 건 맞다.
체력과 순발력은 일반인보다 조금 높은 수준이고 지능과 학식도 간신히 상류층과 보조를 맞출 수준이다.
지략의 부분에선 말할 것도 없고 군략이나 병략 또한 아는 바가 없다.
이능 부문은 단연코 우월하긴 하나 그건 리프니에 덕분이다.
루페르트라는 인간 자체를 놓고 보면 정직하게 저 철혈대제와 비할 바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 루페르트라고 해서 아무 재주가 없는 건 아니다.
그 또한 10년 간 황제 노릇을 했다.
아무 실권도 없고 비난만 받은 꼭두각시라고 할지라도 그에게도 눈이 있었고, 귀가 있었고, 생각이 있었다.
지금 저 앞의 군대는 명백히 이상하다.
* * *
‘에반하우젠 백작령은 사실상 고어문트 선제후 아래에 있는 종속된 영지다. 보리스였나. 보가트였나. 아무튼 에반하우젠 백작 자체가 고어문트 선제후 가문의 혈족이다. 그 영지에 왜 군대가 있는 거지? 최소한 저 정도 규모의 군대는 일개 독립 백작 따위가 불러 모을 수준이 아니다.’
10년간 꼭두각시 황제를 했다고는 하나 허투루 하진 않았다.
간절히 자신의 편을 찾아 제국의 거의 모든 귀족, 일개 제국 기사까지 손을 뻗치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무수한 전쟁을 보았고, 군주라는 느슨한 명칭 아래 각 군주가 어느 정도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동원할 수 있는지도 감각적으로 아는 안목을 익혔다.
그건 일개 총사와 마법사로는 알기 어려운 일이다.
여기 분더발트가 있다고 해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군주의 땅에 어떤 군대가 머무르는 것의 의미를 알게 되는 건 제국이라는 거대한 무대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의 눈에나 보이는 것이기에.
“저 군대의 소속을 알아봐 줄 수 있습니까?”
손녀와 함께 천천히 뒤를 따르던 베르크 란이 루페르트의 말을 듣고 앞서 산비탈 아래에 내려다보이는 숙영지를 가늘게 뜬 눈으로 응시했다.
“렌타이어마르크 쪽 연대로 보입니다.”
“렌타이어마르크?”
“군기에 그려진 저 합장한 손 모양은 렌타이어마르크 가문 문장에서 따온 걸로 보입니다. 선제후가 직접 고용한 연대가 아닐까요?”
루페르트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렌타이어마르크라. 왜 렌타이어마르크 쪽 연대가 이 시점에 이런 곳에 있는 걸까요?”
루페르트의 손짓과 행동이 유례없이 바빠졌다.
“수고스럽겠지만 가까운 곳에서 저 군대의 동정과 목적을 살필 수 있겠습니까? 이왕이면 에반하우젠 안의 반응도 알고 싶군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영역에서 이의를 제기한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확신 혹은 경험 둘 중 하나가 있어야 한다.
지금이 그런 순간이다.
“듣자 하니 테타우에서 저를 둘러싼 모략이 진행되고 있다고들 합니다. 고로 모든 걸 의심해 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베르크 란의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떠올랐다.
‘호오.’
아주 잠깐 베르크 란의 눈에 비친 루페르트의 등에 선제의 모습이 흐릿하게 겹쳤다.
* * *
베르크 란의 추측은 정확했다.
에반하우젠 옆에 숙영지를 마련한 군대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직접 고용한 그나우젠 보병연대와 그 분견대였다.
그들이 렌타이어마르크 주를 떠나 여러 군주의 땅을 거쳐 에반하우젠에 도착한 건 4일 전의 일이라고 한다.
다른 군주가 그러하듯 에반하우젠 백작도 자신의 영지에 다른 군주의 군대가 들어오는 걸 반기지 않았다.
군대가 머문 곳엔 반드시 크고 작은 문제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특히 군대가 몰고 오는 역병은 지난 수백 년간 모든 군주의 골칫덩이였다.
렌타이어마르크처럼 역병이 수시로 도는 곳이라면 더더욱 경계의 대상이 된다.
에반하우젠 백작은 어릴 때 같이 놀이 친구를 하기도 했던 골트문트의 이름을 빌려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에게 직접 퇴거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벌어진 장면이 도시 옆에 애꿎은 경작지 위에 펼쳐진 숙영지다.
“소문에 의하면 골트문트 선제후 본인이 직할 연대에 소집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목적은 불명이나 아마 에반하우젠에 침범한 저 군대를 밀어내려는 게 아닐까요?”
도시에 다녀온 한스 징펠만이 수집한 정보를 전달했다.
루페르트 가우저는 팔짱을 낀 채 생각에 잠겼다.
“…….”
과거의 일이란 이제 큰 의미가 없다.
그가 겪고 있는 현재와 모습이 크게 달라졌으니 말이다.
‘왜 하필 그 많은 선제후 중에 렌타이어마르크 쪽이 이곳에 나타난 걸까?’
현재 루페르트에게 적대적인 선제후는 두 명이다.
대놓고 으르렁거리는 노르드마르크 선제후 게오르크 아르님, 그리고 회귀 전과 회귀 후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는 속을 알 수 없는 고어문트 선제후 골트문트다.
만약 저 벌판에 주둔한 군대가 두 선제후의 소속이었다면 미련 없이 우회로를 찾았을 것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
루페르트는 죽어 가는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의 창백한 잿빛 얼굴과 입에서 풍겨 나오던 썩은 선창 냄새를 연상케 하는 고약한 구취를 떠올렸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회귀 전에도 중립이었고, 이번에도 중립에 가까운 위치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렌타이어마르크 선제후가 루페르트를 적대할 이유는 단 하나도 없다.
그의 영지는 가난하고 척박할뿐더러 주기적인 역병으로 뭔가를 꾸밀 여력도 없고, 무엇보다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아내도 잃고, 후사도 남기지 못한 채 죽어 가는 사람이다.
차라리 내전을 시작한 주범으로 주목되는 레벤호스트가 위험하면 위험했지, 프리드리히 마티아스는 위험과는 거리가 먼 선제후다.
그런데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한 선제후의 군대가 골트문트의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이 시점에 루페르트가 오는 길목을 지키고 있다?
이건 그다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자부아 공국에 갇혔을 때 루페르트는 구원 요청조차 보내지 못했다.
설령 당시 구원요청을 보냈다고 해도 렌타이어마르크에서 출발한 군대가 벌써 도착할 리가 없다.
저 군대는 루페르트가 포위당하기 전부터 출발한 것이다.
“전하.”
생각에 잠긴 루페르트 앞에 가벼운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다름 아닌 마를로네다.
저편에서 지겔슈타트가 매의 눈으로 노려보지만, 간섭은 하지 않았다.
설인에 맞서 루페르트를 구해 낸 걸 두 눈으로 보았으니까.
“무슨 일이지?”
루페르트는 또 마를로네가 감자를 내밀지는 않을까 싶어 살짝 경계심을 드러냈다.
“저기 왜 우리, 도시에 들어가지 않는 건가요?”
“왜 안 들어가냐고?”
“네. 저긴 제국령 아닌가요? 곧 황제가 되실 전하가 가면 저쪽에서 가장 높은 분이 맨발로 뛰쳐나와 환대할 거 같은데요.”
무표정한 얼굴로 말하고 있지만, 속내가 빤히 보인다.
당장 도시에 가서 안락한 목욕물과 따뜻한 침대, 훌륭한 음식을 만끽하며 편안하게 쉬고 싶은 모양이다.
루페르트는 그런 마를로네를 평소와 사뭇 다른 진지한 눈동자로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군대가 심상치가 않아.”
“저 군대가요?”
“렌타이어마르크의 군대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루페르트는 저 아래 나부끼는 기도하는 손이 그려진 군기를 보며 턱 끝을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어서는 안 되는 군대다.”
그의 목소리엔 일말의 흔들림도 주저함도 없었다.
불만을 가지고 찾아왔던 마를로네지만, 확고한 루페르트의 뜻을 보자 생각이 바뀌었다.
‘이 황제님.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는구나.’
마를로네가 감자를 내밀었다.
“거절한다.”
마를로네와의 대화는 그 자체로는 의미가 없다.
새로운 의견이나 관점이 제시된 것도 아니고 기발한 전략이나 술책을 꾸민 것도 아니니.
하지만 루페르트의 결심을 굳히는 데는 도움이 됐다.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함께 정리한 느낌이라고 할까.
루페르트는 마를로네를 제외한 전원을 불러 모았다.
“도시를 우회했으면 합니다.”
루페르트의 의견에 반발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들의 얼굴엔 내심 탄복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제 갓 스물을 넘긴 젊다기보다는 어린 왕이 그들조차 미처 생각하지 못한 점을 짚고 넘어갔으니까.
그들이 보기에도 렌타이어마르크 군대, 그것도 거의 2배로 증원되고 용병 기병대까지 거느린 자들이 제국의 길목을 떡하니 막고 있는 건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런데 여기엔 작은 문제가 있다.
“우회로라. 제가 기억하는 지도 속에선 여기서 저곳을 우회하지 않는 경로는 없습니다. 우회를 하더라도 크게 돌아가야 하죠.”
한스 징펠만이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가다듬었다.
“험준한 산맥을 최소 5일은 더 돌아가야 할 겁니다. 지겔슈타트 님이 있는 이상 추격자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하겠지만, 카제인호프 사냥꾼들의 기습은 무시 못 할 요소입니다.”
에반하우젠을 우회하면 지나칠 정도로 긴 시간을 허비해야 하는 건 물론 추격자의 위협에 다시 맞서야 한다.
“게다가 당장 우리는 물자가 부족합니다. 당장 저부터 쓸 수 있는 탄환이 두 발도 남지 않았습니다.”
루페르트의 계획은 일리가 있다.
그러나 계획이라는 건 언제나 현실을 고려해야 한다.
루페르트는 당면한 현실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물자야 몰래 사람을 보내 보충할 수 있다고 해도 시간이 문제군. 평지라면 말을 빌려서라도 시간을 단축할 수 있겠지만 산맥을 우회해야 한다.’
다시 루페르트가 생각에 접어들 때 짙은 그림자가 루페르트의 몸을 뒤덮었다.
루페르트는 자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다름 아닌 베르크 란이다.
“지름길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인가요?”
“다만 고귀한 분이 가기엔 지나치게 비루하고 비천한 길입니다.”
“길이 비천할 수도 있나요?”
“지나칠 정도로 급이 낮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지금 중요한 건 최대한 빠르게 테타우에 도착하는 것이니까요.”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루페르트는 강한 흥미를 느꼈다.
‘이 사람도 부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건가.’
“어떤 약속입니까?”
이에 베르크 란은 그답지 않게 시선을 피하며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름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못 본 척해 주셨으면 합니다.”
역시 무언가 사연이 있었다.
예상한 바다.
루페르트는 활짝 웃으며 흔쾌히 베르크 란의 청을 수락했다.
“그들이 우리를 적대하지 않는 이상, 저는 아무것도 보지 못할 겁니다. 저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그렇게 해서 여정이 재개됐다.
베르크 란은 한동안 룸 제국 시절부터 깔린 포장도로를 따라 걷더니, 갑자기 방향을 틀어 들판으로 방향을 틀었다.
겉보기엔 아무것도 없는 들판.
표지 하나, 얼씬거리는 이 하나 없다.
하지만 그 방대한 버려진 들판 안엔 분명한 길이 있다.
루페르트는 오래전에 짓밟혀 누운 채 말라비틀어진 풀들을 지나 개울 사이에 아무렇게나 던져진 듯한 통나무를 건넜고, 야트막한 동산 위에 돌과 나무로 만든 비석들을 보았다.
한스 징펠만이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밀수꾼의 길인 모양이군요.”
비석 너머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게 보인다.
마을이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얼굴을 가리고 말을 삼가는 걸 추천합니다.”
늘 분노로 이글거리는 눈이 무질서한 천막들을 눈에 담았다.
“이런 제국의 하류에 원해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요.”